대극장 무대를 대도구나 소도구로 채워야 한다는 강박감이나 관객을 사로잡는 화려한 볼거리를 보여줘야 한다는 욕심을 버리면 뜻밖의 대단한 작품이 나올 수 있다.
극단 미추가 공연하는 <허삼관매혈기>가 그렇다. 국공내전에서부터 대약진운동, 문화혁명, 자본주의화 된 현재까지의 중국현대사를 배경으로 주인공 ‘허삼관’과 그의 가족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허삼관매혈기>는 힘을 주어야 할 곳과 힘을 버려야 할 곳을 아는 깔끔한 공연이다.
막이 오르면 관객은 텅 빈 무대를 마주하게 된다. 전통 연희 공간인 '마당'이다. 전통 연희와 연극을 결합한 성공적인 문화상품 ‘마당놀이’를 창조하고 발전시킨 극단 미추의 공연답게 <허삼관매혈기>의 무대는 무대가 아닌 '마당'이고 배우들은 무대 뒤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무대 양옆에 준비된 자리에 앉아 자기 차례가 되면 나와 연기한다. 우리의 전통 연희처럼 객석의 관객뿐 아니라 무대의 배우 또한 관객이 되어 극을 즐기는 것이다.
'마당'에 세트가 필요하지 않듯이 <허삼관매혈기>의 무대에도 세트는 필요하지 않다. 무대를 채우는 것은 잘 훈련된 배우와 배우를 비추는 조명뿐이다. 때문에 관객은 배우의 말 한마디, 한마디, 움직임 하나, 하나에 집중하게 되고 배우들의 연기는 어느 무대보다 더욱 빛을 발하게 된다. 여기에 적절한 조명과 장소를 설명해주는 제한된 대, 소도구들이 극에 윤활유 역할을 한다.
<허삼관매혈기>라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작품은 주인공 '허삼관'이 인생의 중요한 순간마다 피를 판 이야기이다. 혈통이니 혈육이니 하는 말처럼 ‘피’는 조상이 자손을 통해 대대로 물려준 것이기에 피를 판다는 것은 조상을 팔아버리는 것과 같은 불경한 의미를 갖는다. 한국이나 중국 같은 유교문화권에서는 말이다. 돈 되는 것이라면 뭐든 하는 중국 사람이 피 파는 것을 영혼을 파는 것처럼 꺼림칙해 하는 것도 그 이유이다.
하지만 출신이 불분명한 ‘허삼관’은 좀 더 쉽게 피를 팔수 있었다. 극의 초반부, 그는 자신을 위해 피를 팔았다. 장가를 가기 위해, 바람을 피기 위해서. 하지만 아버지가 되면서 그는 자신이 아니라 가족을 위해 피를 팔게 된다. 큰 아들 일락이 싸움을 해서 합의금이 필요할 때, 대가뭄으로 인해 먹을 것이 없어 처자식에게 국수를 먹이기 위해, 씨 다른 자식이라 구박하던 큰아들 일락이 병에 걸려 치료비가 필요할 때 그는 전국을 떠돌며 피를 팔아 돈을 마련했다.
허삼관은 조상으로서 아버지로서 해줄 수 있는 최상의 것을 자식에게 해주었다. 일락의 친아버지인 하소용을 일락이 찾아가 아버지라 불렀을 때 외면하고 때리기까지 했지만 허삼관은 자신의 피를 팔아 죽어가는 일락의 목숨을 살렸고, 대가뭄과 문화혁명기의 어려운 시기를 피를 팔아가며 힘들게 버텨냈다. 허삼관과 하소용이 대비되며 부모란 무조건 낳기만 한다고 부모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텅 빈 무대 위로 핏방울을 상징하는 붉은 등이 허삼관이 피를 팔 때마다 무대 위에서 하나씩 하나씩 내려온다. 허삼관이 전국을 떠돌아다니며 피를 팔 때 무대 위로 내려오는 수십 개의 붉은 등은 이 공연의 클라이맥스이며 이 공연이 언제 힘을 줘야 하는지를 제대로 아는 잘 만들어진 작품이라는 것을 말해 준다. 많은 관객이 그 장면에서 작은 탄성을 냈다.
수준 높은 작품들을 엄선한 <연극열전>의 여덟 번째 작품으로 공연 중인 <허삼관 매혈기>는 중국의 소설가 위화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으며 극작가 배삼식에 의해 탄탄한 극본으로 만들어졌다. 연출은 <춘궁기>등의 작품을 연출한 젊은 연출가 강대홍이 맡았다. 그는 동양화와 같은 여백 있는 무대와 편안한 연기, 창의적인 연출로 수준 높은 작품을 만들어냈다. 특히 극단 미추의 잘 훈련된 배우들은 연극이 배우의 수준 높은 연기에 따라 얼마나 빛날 수 있는지 보여주었다.
우리의 파란 많은 근, 현대사와 우리만큼이나 파란 만장한 중국의 근, 현대를 비교해서 보는 것도 <허삼관매혈기>의 즐거운 볼거리이다. 동시대를 살았던 우리의 아버지 할아버지들의 고단하고 희생적인 삶을 추억해보는 것도 이 공연을 보며 할 수 있는 의미 있는 일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