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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강 하연송
시강 하연송 ⓒ 전영준
경남 양산시 웅상읍 덕계리에 글씨와 그림, 그리고 전각까지 다 아우르고 있는 서예ㆍ문인화가가 있다 하여 찾아가 보았다.

시강 하연송(是江 河延松). 부산 노포동에서 7호선 국도를 타고 곧장 울산 방향으로 달리다 보면 덕계리에 다다라 길 오른쪽에 덩그러니 서 있는 아파트 두 채를 만나게 된다. 두 채 중 대승하이아트 1차 아파트의 상가에 시강 하연송의 서실(書室)이 있다.

저녁 8시가 넘은 시각에 찾았는데도 시강이 홀로 기다리다 반갑게 맞는다. 웃는 얼굴이 해맑다. 그윽한 묵향과 그의 웃는 모습이 썩 잘 어울린다 싶다.

- 여기가 고향입니까?
"아닙니다. 태어난 곳은 경남 진양군 수곡면인데 거기서는 다섯 살까지만 살았고 유년 시절과 청년 시절은 줄곧 부산에서 살았습니다."

그렇다면 또 양산과는 어떤 인연이 닿았기에 시방은 여기 이곳에 삶의 둥지를 틀고 있는 걸까? "결혼을 하고 부모님 슬하를 떠나 분가를 해야 했는데 어디가 마땅할까 하고 이곳저곳을 찾아 헤매다 눈에 띈 곳이 바로 여깁니다."

길에서 주운 '펜글씨 교본'이 서예의 길잡이

무지개 폭포가 좋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 왔다가 아파트 분양 광고를 보게 됐다. 알아 보니 분양가가 부산의 전세금밖에 안 되더라고. 그래서 그만 주저앉은 세월이 어느새 8년. 그때만 해도 대도시 인심과는 달리 시골다운 인정도 있고 주변 경관도 아름다워 그냥 양산 사람으로 살기로 작정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동안 어려운 곡절도 적잖았다.

덕계에서 태어난 첫 아이가 자꾸만 아픈데도 마땅한 의료 시설이 없어 하는 수 없이 부모님 계신 본가로 다시 들어 앉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막상 자신의 작업실이자 삶의 터전인 서실은 버릴 수 없어 부산 당감동에서 2, 3년 출퇴근을 했다니 그 어려움이 만만찮았을 것이다.

아예 서실까지 부산으로 옮겨 볼 요량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당시 양산 평산초등학교 교장으로 있다가 덕계초등학교로 옮긴 조길남 교장 선생님이 학교 빈 공간 하나를 마련해 주기까지 하면서 한사코 말려 시강과 양산과의 인연은 그대로 이어졌다.

"조길남 교장 선생님과는 제가 평산초등 방과 후 과외지도를 하면서 인연을 맺었는데 제게는 참으로 고마운 어른이시죠. 지금은 퇴직을 하셨지만 늘 저를 보살펴 주고 이끌어 주셨습니다."

말하자면 조길남 교장이 자신이 덕계에 뿌리를 내리고 정 붙여 살게 해 준 은인인 셈이다.

- 그런데 서예는 언제부터 손을 대기 시작했습니까? 서예를 하게 된 무슨 곡절이 있을 듯 싶은데.
"초등학교 때는 아주 개구쟁이였어요. 그런데 어찌된 셈인지 중학교에 들어가고부터는 혼자 조용히 있고 싶고 정적인 것을 추구하게 되었어요. 그 무렵에 한창 낚시에 빠져 들었죠. 학교가 파하기가 무섭게 낚싯대를 울러 메고 광안리 바닷가로 달려갔습니다."

해가 지고 사위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낚시에 몰입했다니 어린 나이에 어지간한 낚시광이었던가 보다. 그런 어느 날, 밤길을 걸어 집에 가다가 뭔가 발길에 걸리는 것이 있어 주워 보았더니 다 낡은 책 한권.

집에 가서 밝은 불빛 아래서 자세히 살펴보니 '펜글씨 교본'이었다. 별 생각 없이 책장을 슬쩍슬쩍 넘기다가 책 뒷부분에 있는 한글 고문에 그의 눈이 박혔다. 단아한 글씨체가 예쁘기 그지없어 그는 그 자리에서 글씨를 베껴 썼다. 그 뒤로도 그는 틈이 날 때마다 글씨를 쓰고 또 썼다. 그때만 해도 글씨가 무엇인지 모르던 어린 소년은 마치 무엇에 홀린 듯 거듭거듭 그것을 옮겨 썼다.

집중력을 기르고 심성을 바로 잡는 데는 서예가 제격

그것이 그가 글씨와 인연을 맺게 된 첫 인연이란다. 어찌 보면 우연인 듯 싶지만 아마도 그것은 오늘의 서예가 '시강'을 있게 한 필연이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 일이 있고 난 얼마 뒤 친구네 집에 갔다가 친구 할아버지께서 글씨를 쓰는 것을 보게 되었는데 그 모습이 너무나 기품 있게 보였어요. 아마 제가 평생 글씨를 쓰기로 작정한 것은 그때가 아니었나 싶어요."

처음에는 홀로 글씨 공부를 하다가 한글, 한문, 문인화, 전각을 다 각 분야의 내로라 하는 스승을 찾아다니며 사사했다. "지금도 함자를 대면 금방 알 수 있는 대가들이신데 그런 훌륭한 스승을 사사할 수 있었던 것은 제게 큰 복이지요."

무제. 시강은 이 작품에 제목을 붙이지 않았지만 소나무 등걸에 움트는 생명력을 표현하려 했다고 한다.
무제. 시강은 이 작품에 제목을 붙이지 않았지만 소나무 등걸에 움트는 생명력을 표현하려 했다고 한다.
- 서예의 어떤 점이 끌리던가요?
"하얀 종이에 내가 표현하고자 하는 것을 마음껏 표현할 때의 벅찬 감동은 경험해 보지 않은 사람은 모를 것입니다. 어떤 때는 밤새도록 먹을 갈아본 적도 있는데 그런 것을 무아지경이라고 할까요."

그러면서 그는 서예가 집중력을 길러 주고 심성을 바로 잡는 데는 그만이라고 서예 예찬에 입을 다물 줄 모른다. 또 태교에도 서예가 제격이란다. 그래서 그는 젊은 주부들에게는 곧잘 서예를 태교에 활용하라고 일러 주기도 한다.

- 처음 서예에 입문하는 사람이 갖추어야 할 마음가짐은 무엇일까요?
"먼저 일등 추구심을 버려야 합니다. 내가 서예를 해서 당대의 대가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버리고, 다만 서예를 내 인생의 길동무로 삼겠다는 마음가짐을 가져야 합니다."

그렇구나. 굳이 서예가 아니라 하더라도 일등 추구심이 우리네 인생살이를 곤비케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무슨 일이든 즐기는 마음으로 하면 편안할 것을…. 그냥 욕심 없는 마음으로 정진하다 보면 어느 날엔가는 자신도 모르는 새 자신의 기량이 성큼 자라있는 것을 보게 될 터.

제5회 부산비엔날레 휘호대회 '대상' 수상작
제5회 부산비엔날레 휘호대회 '대상' 수상작
본디 공모전 따위에 별 관심을 두지 않는 시강이 최근 큰 상을 하나 받았다. 제5회 부산비엔날레 휘호대회 대상. 문화관광부장관상이란다. 그는 그전에도 적잖은 상을 받은 바 있다. ‘대한민국미술대전(서예, 사군자) 입선’ ‘미술세계한국문인화대전(사군자) 특선’ 등 각종 미술대전, 문인화대전, 초대전 등에서 크고 작은 상을 10여 차례 넘게 받았다. 그 중에서도 이번 대상은 서예가로서의 그의 기량이 얼마만한 경지에 이르렀나를 가늠케 하는 상이어서 그도 영광이고 그를 아끼는 이들도 함께 기뻐하는 일이었다.

작별을 하고 서실을 나서려는데 A4용지에 볼펜으로 쓴 고시 한편을 건네 준다. 펼쳐 보니 왕적(王積)의 오언고시(五言古詩) <춘일(春日)>이다.

왕적이 누구던가? 중국 수나라 말기에서 당나라 초기에 살았던 시인이 아니던가. 당나라 때 문하성대조(門下省待詔) 등을 역임하였다가 관직을 그만둔 뒤 술과 노자ㆍ장자의 책을 벗 삼아 여생을 보내면서 도연명에 심취했고, <취향기> <오두선생전> <무심자선> 등의 저서를 남겼다 했다. 육조 말기 이래 화려한 시가 유행하던 무렵에 소박한 시풍을 지녀 이채를 띤 인물. 왕적의 시를 아끼는 것으로도 그의 소박한 일면을 보는 듯해 왕적의 시를 여기에 옮겨 본다.

春日(봄날)

前旦出園遊 / 전날 정원에 나와 거닐 때
林華都未有 / 나무엔 아직도 꽃이 피지 않았더니
今朝下堂來 / 오늘 아침 집 밖을 나와 보니
池氷開已久 / 연못에 얼음은 녹은 지 이미 오래더라
雪被南軒梅 / 눈은 남쪽 처마 밑 매화나무를 덮었더니
風催北庭柳 / 어느덧 봄바람은 북쪽 뜰의 버들 싹을 재촉한다
遙呼竈前妾 / 멀리 부엌 앞 첩을 불렀더니
却報機中婦 / 도리어 베 짜는 아내에게 알렸네
年光恰恰來 / 세월은 마침맞게 돌아왔으니
滿甕營春酒 / 독에 가득 봄술을 빚어야겠다


이제 양산 사람이 다된 시강이 애오라지 서예를 위해 기울이는 공력이 이곳 양산 문화의 텃밭을 살찌우는 거름이 되었으면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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