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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촌장 아들의 친구는 호송원들과 떨어져 앉아 에인 쪽을 지켜보았다. 함께 온 청년이 에인의 손목을 풀어준 후 다시 돌아오고 있었다. 그의 검은 눈에 얼핏 이슬이 어려 들었다. 그는 남자가 아닌 여자, 바로 닌이었다.

"오빠, 장군님은 어때?"
청년이 다가오자 닌이 벌떡 일어나며 물었다.
"잘 견디고 계셔. 걱정마."
"내 얘기는?"
"그대로 말했어. 내 친구라고. 어쨌든 조심해. 호송원들도 눈치를 채면 좋을 게 없으니까."

청년이 말한 후 호송원들 쪽으로 갔다. 닌은 슬며시 자기 머리를 만져보았다. 머리 수건이 단단히 묶여 있었다. 그 수건을 벗지 않는 한 자기 정체는 드러나지 않을 것이다.

그녀는 주위를 살펴보았다. 할머니 말처럼 물웅덩이 저쪽으로 식물 무더기가 보였다. 그녀는 서둘러 그쪽으로 걸어갔다. 어두워지기 전에 벼를 찾아봐야 했다. 할머니는 말했다.

'물웅덩이 주변에는 야생보리나 키 작은 벼도 있다. 벼를 찾아라. 그것은 낟알이 아주 작지만 통째 끓이면 쌀 물이 우러난다. 그것을 아침마다 먹여라. 그럼 사막의 갈증을 막아줄 것이다.'

그밖에도 할머니는 약초와 그것을 사용하는 방법 등을 자세히 일러주었다. 꿀과 계피, 풀뿌리를 이겨서 만든 해독제도 챙겨주셨다. 전갈에 물렸을 때 그 풀뿌리 고약을 붙이라고 했다.

벼과의 풀들은 빼빼마른 아카시아 나무 그 뒤쪽에 군락을 이루고 있었다. 수염이 긴 것이 보리였으나 할머니가 일러준 벼는 찾을 수가 없었다. 사막의 야생 벼는 그 알갱이가 아주 작고 그런 열매가 가지마다 달려 있다고 했는데 여기서는 자라지 않은 모양이었다.

닌은 벼 대신 보리 송아리를 따 모았다. 그것이라도 어디엔가 쓸데가 있을 것 같아서였다. 다시금 에인이 생각이 났다. 그에 대한 생각은 늘 폭포처럼 터져 그녀 심장으로 관통했고 그럴 때마다 심장은 물론 온 가슴은 왈칵왈칵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그래도 다행이지. 이렇게라도 따라올 수 있었으니….'
불쑥 또 처음 만났을 때가 떠올랐다. 그때 그녀가 본 것은 그의 눈이었다. 그 눈에서 그녀는 하늘 호수를 연상했다. 외할아버지가 들려주시던 그 호수였다.

'환족이 태어난 천산 위에는 하늘이 있단다. 그 하늘에는 또 아주 커다란 호수가 있고…. 환인천왕께서는 그 하늘호수에서 환족을 잉태해 천산으로 내려오셨고 거기에서 신시라는 나라를 지으셨단다. 그리고 자손을 번창시킨 후 어세(御世)가 천세이실 때 다시 그 하늘 호수로 돌아가셨지.
그때 말이다. 하늘 호수가 천산까지 내려와 환인천왕을 살포시 떠안고 올라갔다는구나. 그 뒤로는 하늘이 어떻게나 맑고 투명하던지 그것이 하늘인지 대기인지 분간을 못했다는구나. 그렇게 하늘은 한 달 내내 티끌 하나 비치지 않았고….'

에인의 눈이 그랬다. 젊은 장군이 손님으로 왔다기에 크고 건장하거나 털 복숭이 남자일줄 알았는데 그는 보기 드물 만큼 희고 깨끗한데다 그 눈이 영락없는 하늘 호수였다.

닌은 그 호수에 자신의 미소를 던져 넣고 싶었다. 왠지 자꾸만 그런 충동이 일어났다. 어쩌면 엄마 때문인지도 몰랐다. 엄마는 고기를 썰면서도 할머니 귀에 대고 '저런 사위를 봤으면…'하고 속삭였다. 엄마가 그런 말을 했을 때, 닌도 자신감이 생겨 그에게 미소를 던져보았다. 그러나 자신의 미소는 그의 눈에 닿지 않았다. 한점 그림자조차 다가가지 못했다. 그는 사람이 닿을 수 없는 그런 하늘 호수를 가진 것이었다.

그런데 느닷없이 이런 일들이 일어났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시냇가에서의 일도 나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아니 그 동기는 엄마 때문이었다. 엄마는 오늘이나 내일 장군이 돌아올지 모르니 눈비르두에 가서 목욕이나 하고 오라고 했다. 긴 머리를 가진 처녀는 머리냄새가 나니까 청결해야 한다, 청결하지 못한 처녀에게 누가 웨브를 사다주겠느냐는 것이었다.

그랬다. 장군은 나에게 웨브를 사오기로 약속을 했다. 두두 오빠도 싫다는 것을 그이가 자청했다. 오오, 그때 얼마나 기뻤던가!

그래서 닌은 시냇가로 갔다. 장군에게 웨브를 받을 때 자신의 몸 향내를 선사하고 싶었다. 목욕을 한 후 머리에 아카시아 꽃잎 화관을 쓴다면 필시 좋은 냄새가 날 것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먼저 아카시아 꽃잎을 따둔 뒤 물가로 갔다.

하지만 옷을 벗을 수가 없었다. 해가 그녀를 보고 있었던 때문이었다. 처녀가 된 이후로 대낮에는 한번도 목욕을 한 적이 없었던지라 태양이나 바람에게도 자기 몸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머리는 감고 가야할 것 같았다. 그래서 그녀는 긴 머리를 앞으로 풀어내렸다. 그리고 그 머리끝을 막 물속에 담그려던 순간, 누군가가 저 아래서 올라오고 있었다. 장군이었다. 그녀는 깜짝 놀라 자기 얼굴을 치마폭에 감추었다. 여자가 남자 앞에서 머리를 감으면 아니 되었던 때문이었다.

자기는 그렇게 잘못을 저질렀고, 숨을 곳이 없어 얼굴만 가리고 있는데 장군도 그걸 알아차리고 얼른 돌아서 가주었다. 얼마나 고맙던지…. 한데 그의 발소리가 멀어지자 그만 그녀 온몸이 뜨거워지는 것이었다. 어떤 불의 혓바닥이 그녀 몸을 핥아대는 것 같았다. 살갗이 타들어가는 듯했다. 가만히 두면 정말 타버릴 것 같아 물로 뛰어든 것이었다. 한데 뱀이, 그 놈의 뱀이….

뱀과 자신의 알몸을 떠올리자 다시금 뜨거운 것이 치밀어 올랐다. 수치심이었다. 그 뱀만 나타나지 않았어도…. 그녀는 '휴,'하고 숨을 내쉬었다.
'어쨌거나 모든 것이 나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한데도 고통을 당하는 사람은 장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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