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정관리 중인 한 회사의 대표가 회사 돈을 빼내 지분을 장악한 뒤, 비리가 드러나자 180여억원을 챙기고 경영권까지 넘기는 사건이 발생했다. 1900억원이 넘는 공적자금이 투입된 광주의 한 기업에서 벌어진 일이다.
애초 이 회사의 대표가 가지고 있었던 주식은 불과 3000주 남짓. 그러나 경영권 장악 후 주식매각으로 손에 쥔 돈만 180여억원에 달한다. 그는 법정관리 틈을 이용, 구조조정전문회사(CRC)와 법정관리인을 동원해 돈 한 푼 들이지 않고도 180여억원을 챙길 수 있었다. 한국시멘트의 전 대표이사 이모(50)씨다.
그는 업무상 배임 등의 혐의로 지난해 11월 구속됐고, 1심에서 징역 3년, 추징금 31억4000만원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광주고법 특별부(재판장 박행용 부장판사)는 항소한 이씨에 대해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을 선고한 후 석방했다.
<오마이뉴스>는 기업구조조정의 근본 취지를 뒤흔들고, 공적자금의 수혜를 혼자서 독차지한 '한국시멘트' 비리 사건을 추적해 보았다.
공적자금 1900억 투입, 법정관리 종결
| | | '한국시멘트'는 어떤 회사인가? | | | | 1976년 (주)한국고로시멘트로 출발한 한국시멘트는 국내 최초의 슬래그 시멘트 제조회사. 76년 경북 포항철강공단 내에 시멘트 공장을 건설하여 철강 제조공정에서 나오는 부산물을 원료로 본격적인 시멘트사업에 뛰어 들었다.
덕산그룹 계열사였던 이 회사는 95년 1월 광주시 북구 중흥동 광주역 앞에 사옥을 준공하며 도약을 맞는 듯 했으나, 그해 뜻하지 않은 부도사태를 맞았다. 주 생산시설은 포항에 있었으며, 본사는 광주였다.
99년 현재의 한국시멘트로 상호가 변경됐다. 법정관리에 들어간 지 7년만이 지난 2002년 5월 법정관리를 조기 종결하기도 했다.
국내 최초의 슬래그시멘트 KS 인증을 획득하기도 한 이 회사의 현재 시장점유율은 약 30%정도. 지난해에는 매출액 1108억원에 154억원의 순이익을 기록하기도 했다. 비리가 드러난 전 대표 이모씨는 지난 81년 한국시멘트에 입사했다. | | | | |
국내 최초의 슬래그 시멘트 제조회사인 한국시멘트가 법정관리에 들어간 것은 지난 95년. 지급보증을 선 덕산그룹의 부도로 갑작스런 동반 부도 사태를 맞은 것이다. 자체 요인에 의한 부도가 아니었던 것만큼 회생의 여지는 남아있었다.
법정관리 직전 이 회사의 수익은 매년 160억원 정도. 법정관리를 벗어나기 위한 종업원들의 고통감수가 뒤따른 것은 물론이다. 회사는 2002년 5월 최종 법정관리를 탈피했다. 당초 2011년이었던 법정관리 종결시점 보다도 무려 9년여 앞선 결과였다.
그러나 법정관리 조기 종결의 결정적 배경은 따로 있었다. 총 2861억여원의 정리채권 중 무려 77%에 달하는 1941억원의 채무탕감이 그것이다. 바로 공적자금 투입에 의해 법정관리를 조기 종결할 수 있었던 것이다.
당시 채권단과 관할 법원은 회사가 변제해야 할 정리채권 총 2861억원 중 1941억을 탕감하는 것을 주 내용으로 회사 정리계획안에 대해 최종 승인했다. 현금변제는 480억원 뿐이었고, 나머지 채권 360억원은 출자 전환키로 한 것이다.
전 대표이사 이씨는 한 때 법정관리를 10년여 앞당겨 세간의 주목까지 받았던 인물. 그 전말이 드러난 것은 지난 해 11월 검찰의 공적자금 비리 수사가 진행되면서부터다.
불법자금 어떻게 조성했나
검찰수사 결과 이씨는 S건설 사장 이모(54)씨로부터 공사수주 대가로 31억4000만원의 뇌물을 수수하는 한편, 회사 양도성 예금증서를 담보로 은행권으로부터 47억원을 대출받은 것으로 드러났다. 불법자금으로 밝혀진 금액만 80억원대에 달했다.
이씨의 수법은 치밀했다. 회사의 양도성 예금(CD)을 이용한 것이다. CD가 무기명인데다 바로 현금으로 전환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회계장부상으로만 놓고 보면 아무런 흔적이 남지 않는다는 점을 노린 것이다.
이씨는 우선 회사의 현금으로 CD를 구입한 후, 다시 이 CD를 담보로 은행대출을 이용했다. 친인척과 측근 등 제3자 명의를 통한 대출금은 총 47억원에 달했다.
이씨는 시설공사 발주과정에도 눈을 돌렸다. 포항공장 증설공사였다. 당시 회사가 내부 분석한 증설비용은 약 300억원. 그러나 2003년까지 S건설은 이들 공사를 460억원대에 수의로 계약했다. S건설에 공사비를 부풀려주는 대가로 뇌물을 수수한 것. 이 공사를 수주하기 전까지만 해도 S건설은 년 매출액이 5억원 정도에 불과한 중소 영세회사였다.
이 외에도 검찰수사에서 이씨가 김모(49) 전 노조위원장에게 5000만원, 한국시멘트 법정관리인 정모(66) 변호사에게는 7000만원의 뇌물을 제공한 것도 추가로 확인됐다. 채권은행에 대한 압력성 시위동원 명목과 각종 비리를 무마하는 조건이었다.
주식 매집...경영권 장악
이씨는 곧바로 이 불법자금을 이용해 회사 주식에 눈독을 들였다. 애초 경영권 탈취가 목적이었던 것. 1900억원이 넘는 채무가 일시에 탕감된 마당에 주식이 뛸 것은 정해진 이치였다.
그러면 애초 3148주에 불과했던 이씨는 어떻게 경영권을 장악할 수 있었을까.
우선 대규모의 감자조치가 단행됐다. 당시만 해도 대주주는 57%의 지분을 갖고 있었던 우리사주 조합. 43%는 학교법인 조선대학교였다. 이 지분을 1/4로 낮춘 것이다. 70만주 주식이 일순간에 17만5000주로 줄어들게 된 것. 액면가로는 9억원에 못 미치는 금액이었다.
동시에 법정관리 종결과정에 80억원의 유상증자가 이뤄졌다. 경영권을 누가 쥐는가는 이 80억원의 출자금을 누가 대는가에 달려있었다. 결과적으로 이씨는 이 80억원의 유상증자 중, 줄잡아 50억원의 주식을 혼자서 독차지했다.
법정관리 상태의 한 기업에서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이씨의 지분장악은 또 어떻게 이뤄졌을까.
이 베일을 풀기 위해서는 법정관리 종결 직전 이 회사와 용역을 맺은 'ㅇ'이라는 한 기업 구조조정전문회사(CRC)와, 이 회사의 법정관리인이었던 정모(66) 변호사의 역할이 컸던 것으로 알려졌다.
구조조정전문회사·법정관리인은 어떤 역할이었나
당시 유상 증자키로 한 총액은 80억원. 160만주의 주식을 새로 발행하는 것이다. 80억원 중 50억원은 구조조정조합을 설립 투자하고, 30억원은 CRC 'ㅇ'이 직접 출자한다는 것이었다. 구조조정조합을 통해 출자키로 한 50억원 중 20억원은 종업원이, 30억원은 CRC 'ㅇ'이 출자하는 형식이었다.
그러나 CRC 'ㅇ'과 전 대표 이씨, 전 법정관리인인 정씨 사이에는 이미 각각 이면계약이 있었다. 이면계약은 법정관리를 종결하기 위해 관할 법원에 회사 정리계획안을 제출하기 2개월여 전인 2002년 1월 초에 이뤄졌다.
경영권을 장악하게 된 비결은 이 이면계약에 있었다. CRC 'ㅇ'를 전면에 내세워 명의만 빌린다는 것. 애초 구조조정조합을 통해 'ㅇ'이 직접 출자키로 한 30억원의 돈을 금전소비대차 방식으로 이씨가 대여키로 한 것이다. 30억원은 실제 이씨의 돈이라는 얘기다. 이면계약은 이것이었다.
이면계약은 법정관리 종결 후 주식의 처리 문제까지도 구체적으로 명시하고 있다. 이씨가 주식을 재 매입한다는 조건이 그것. 매입가격은 매 3개월을 기준으로 10%의 이자를 가산키로 했다.
법정관리가 끝나자 마자 이 CRC는 곧바로 이 주식을 이씨에게 넘겼다. 매각대금은 10%의 가산금리를 붙인 33억원. 지분확보를 위해 구조조정전문회사를 동원한 것이다.
이면계약은 이 외에 하나가 더 있었다. 경영권이 혼미한 틈을 타고 이번에는 법정관리인인 변호사 정씨까지 가세했다. 법정관리 기업의 관리인이란 국가기관인 법원을 대리한 위치. 이씨와 정씨 모두 '산업발전법'에서 규정하고 있는 특수관계인의 신분이었다. 경영상 영향력을 가진 임원에게는 매각을 금하도록 하는 조항이다.
이면계약은 이씨가 20억원, 법정관리인 정씨가 10억원을 한미은행에 예치하는 대신, CRC 'ㅇ'는 이를 다시 차입해 자신의 명의로 투자한다는 것. CRC 'ㅇ'가 자신의 고유자금이라고 주장해 온 30억원 역시 경영권 탈취를 노린 이씨와, 이 틈을 타고 투자 수익을 노린 법정관리인의 돈인 셈이다.
혈세 1900억대 투입 기업의 경영권 넘기고 186억 챙겨
이렇게 해서 이씨가 CRC 'ㅇ'를 통해 확보한 주식만 총 82만여주. 본인 돈으로 출자해 배당 받은 것이라고 주장하는 주식을 제외한다고 해도 69만여(37%) 주식을 차지하게 된 것이다. 3148주로 고용사장에 불과했던 이씨가 일 순간에 대주주의 위치를 확보한 것이다. 측근 명의로 분산 된 것까지 합치면 이미 60%가 넘는 지분이었다.
이씨는 구속 상태였던 지난 2월 이 주식을 남화산업(대표 최재훈)과 대호전기(대표 이기상)의 컨소시엄에 일괄 매각했다. 1900억원대의 혈세가 투입된 기업의 경영권까지 넘긴 셈이다. 매각대금만 186억여원. 거래 평균가는 2만 2500원이었다.
지난 2일 광주고법 특별부(재판장 박행용 부장판사)는 1심에서 징역 3년을 받고 항소한 이씨에 대해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을 선고했다. 구속된 기간은 불과 6개월 남짓. 법의 심판을 받은 이씨는 180억원이 넘는 돈을 챙기고도 이제 일상의 시민으로 돌아와 있다.
국민의 혈세 1900억원대가 고스란히 한 개인의 치부로 귀결돼 버린 사건. 종업원들이 뒤늦게 경영권 환수 투쟁에 나선 한 기업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다.
| | | "눈 먼 돈 쉽게 먹어도 된다는 사례 될 것" | | | 비리 연루자 무더기 석방 '논란' | | | |
| | ▲ 광주고법 청사 | ⓒ이국언 기자 | 한국시멘트 비리 관련자에 대해 법원이 무더기 석방 판결을 내린데 대해 "국민의 법 감정을 무시한 것"이라는 비난이 일고 있다.
광주고법 특별부(재판장 박행용 부장판사)는 지난 2일 업무상 배임 및 배임수재 등의 혐의로 구속 기소된 한국시멘트 전 사장 이 모(50)씨에 대한 항소심 선고공판에서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을 선고했다.
또 7000만원 뇌물 수수혐의로 기소된 전 한국시멘트 법정관리인 정모(66)변호사에 대해서는 벌금 2000만원을, 이 전 사장에게 뇌물을 건네고 비자금 조성을 도운 S건설 사장 이모(55)씨, 회사 자금을 횡령한 이 회사 전 영업팀장 양모(46)씨에 대해서는 징역 1년 6월에 집행유예 3년씩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피고인들이 잘못을 깊이 뉘우치고 있고 별다른 전과가 없으며, 법정관리를 종결시킴과 동시에 연평균 168억원의 영업이익을 얻도록 한 점을 인정, 이 같이 판시한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는 법정관리중인 회사 대표가 자신의 이익을 위해 회사 돈을 이용한 것도 모자라 경영권까지 탈취한 사건치고는, 너무 관대한 법 집행이 아니냐는 비판이다. 또 국가기관을 대리해 엄격한 감시에 나서야 할 법정대리인이 오히려 비리에 가담, 시세차익만 30억원 이상을 남기게 된 것도 경제 정의에 어긋난다는 지적이다.
앞서 이들은 1심에서 이 전 사장은 징역 3년, S건설 사장 이씨와 전 영업팀장 양씨는 징역 1년 6월, 정 변호사는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은 바 있다.
경영권 환수 투쟁에 나선 한국시멘트 비상대책위원회는 한마디로 어이없다는 반응이다. 한 관계자는 "30억원의 뇌물과 47억원의 회사 돈을 빼돌리고도, 단지 6개월을 살고 시세차익만 140억원을 챙기게 됐다"며 "이번 판결은 눈 먼 돈은 쉽게 먹어도 된다는 사례를 열어 준 것 아니냐"고 비난했다. / 이국언 기자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