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박자? 한 세 박자는 늦다."
"최근 민주노동당의 움직임이 한 박자 늦다"는 기자의 말에 대한 한 당직자의 답변이다. 민주노동당 내에서는 "잇따른 사회정치 현안마다 '뒷북'으로 대응해 기회를 놓치고 있다"는 내부 비판의 목소리가 일고 있다.
민주노동당의 '뒷북 대응'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은 지난 9일 청와대 만찬. 이 자리에서 민주노동당 의원들은 구체적인 정책현안을 놓고 논쟁을 벌였고 노무현 대통령은 '아파트 분양원가 공개 반대' 입장을 분명히 해 언론의 관심이 집중됐다.
그러나 막상 민주노동당 의원들은 "의견 차이가 너무 커서 답답하다"는 소감을 밝혔을 뿐, 아무런 후속조치를 내놓지 않았다. 지난 16일 오전에 열린 보좌진 및 공동정책연구원 실무강연에서는 "청와대 만찬이 끝나자마자 반대 성명을 내고 '집값반값 네트워크'를 구성했어야 하는 것 아니냐, 지지율 상승의 호기를 놓쳤다"는 지적이 나왔다.
또한 민주노동당은 이라크 파병 철회를 최우선 개혁과제로 추진하면서도, 열린우리당 파병반대파 의원들의 입장 변화를 비판하는 기자회견도 한 번 열지 않았다. 불량만두 파동의 경우, 지난 18일 뒤늦게 진상조사단을 꾸리겠다고 나섰다가 일정을 연기했고, 국민연금 문제에 대해서도 다른 당이 한 번씩 토론회를 가질 때까지 별다른 대응을 못하다가 17일에서야 당 주최 토론회를 열었다.
상황이 이러다 보니 출입기자들 사이에서는 "쓸 기사가 없다, 논평이 늦고 입장도 명확하지 않다"는 불만이 높다. 브리핑룸에서 상주하던 기자들이 다른 당과 함께 민주노동당을 취재하는 방식으로 출입 빈도수를 줄이거나 아예 민주노동당에 나오지 않는 경우도 늘어나고 있다. 뉴스전문채널인 YTN은 19일을 마지막으로 민주노동당 브리핑룸에서 철수했다.
정보 부족, 감각 부재, 당체계 미비... '고난의 행군'
민주노동당 당직자들은 최근 계속된 소극적 현안대응의 원인으로 정보 부족과 감각부재를 꼽는다.
정책국의 한 당직자는 "정부 지원이 적고 의정활동에 대한 정보도 없다보니 대응이 느릴 수밖에 없다"며 "앞으로도 고난의 행군이 될 것 같다"고 말했다. 다른 당직자 역시 "현실정치에 밝지 않아 쟁점의 배경과 상황을 놓친다, 미리 준비하지 못한 채 정치사회 쟁점에 맞닥뜨리는 경우가 많다"고 고충을 털어놓았다.
의원 중에는 아직 신문 가판을 읽는 습관을 들이지 않아, 다음날 아침 일반 국민들과 같은 시간대에 현안의제를 파악하는 경우가 많다. 대신 의원들은 자주 내부 토론회를 열어 각 상임위별 현안과 정책에 대해 공부하고 있다. "사안을 정확하게 파악해 대안을 제시하겠다"는 방침이다.
민주적이지만 다소 복잡한 의견수렴절차도 당의 활동 속도를 지연시킨다. 민주노동당은 담당 실무부서와 의원단, 최고위원회의 결정을 두루 거쳐 당의 입장과 세부활동을 정하고 있다.
김성희 부대변인은 "예전에는 빠른 논평을 요구받지 않았고 그것이 중요하지도 않았다"고 전했다. 민주노동당에서는 오히려 '늦더라도 정확한 논평' '당내 합의를 거친 논평'이 강조되어왔다는 것이다.
게다가 최고위원회를 비롯한 중앙당 당직자가 최근 새로 구성되면서 당내 합의도 빨리 진행되기 어려운 상황이다. 지난 6일 선출된 최고위원들은 현재 당 업무파악과 역할분담을 진행하고 있고, 정책연구원 등 의정지원과 관련된 당직자들도 대부분 지난 5월부터 당에 출근하기 시작한 상황이다.
"느리지만 정확한 당론, 말바꾸기는 하지 않는다"
민주노동당 당직자들은 "당이 각 현안에 대해 다소 느리게 대응하기는 하지만 정확한 당론을 모으기 때문에 다른 당처럼 말바꾸기는 하지 않는다"며 장점을 강조하기도 한다. 김성희 부대변인은 "기존 정당처럼 상대편 당에 배치되게만 입장을 내면 쉽게 돋보일 수 있지만 그게 바람직하다고 보지 않는다"고 말했다.
당직자들은 대부분 "앞으로도 정치현안마다 대응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며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의 정치공방에 일일이 끌려다녀서는 안 된다"고 입을 모았다. 한 당직자는 "당장 불거진 현안에 대응하는 것이 7, 민주노동당이 독자적으로 만드는 현안이 3이었으면 한다"며 '7:3'의 의제형성 모델을 목표로 제시하기도 했다.
민주노동당이 현실정치에 안착하는 시기에 대해서는, '1달 이내'부터 '6개월 이상'까지 당내 의견이 다소 엇갈리지만, 대체로 당직자들은 "걱정할 정도로 기간이 길진 않을 것"이라는 예측을 내놓고 있다.
한 핵심당직자는 "지금까지는 지도부 공백 때문에 대응이 늦었지만, 다음주 내로 최고위원들의 역할분담이 끝나고 중앙당 체계가 정비되면 조만간 '민주노동당 달라졌다'는 소리가 나올 것이다, 기대해도 좋다"며 자신감을 내비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