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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음력으로 5월 5일 단오날입니다. 또 내 선친의 생신이기도 합니다.
내 선친께서 1986년에 작고하셨으니 벌써 18년의 세월이 흘렀군요. 66세라는 너무도 아까운 연세로 별세하셨으니 지금도 살아 계시다면 올해 춘추는 84세….
요즘은 팔순을 훨씬 넘기고도 정정하게 사시는 노인분들을 쉽게 볼 수 있으니 생각하면 내 선친의 너무도 이르신 타계가 못내 아쉽고 가슴 아프답니다.
선친의 생신을 지낼 때마다 으레 떠올리는 추억이 있습니다. 내 어렸을 적부터 우리집에서는 해마다 아버님의 생신에는 잔치를 했지요. 아침에 큰아버지 큰어머니와 동네 어른들을 오시게 해서 식사를 함께 하는 일이었지요.
지금처럼 집집마다 전화가 있는 시절이 아니었답니다. 나는 이른 아침부터 1Km쯤 떨어진 큰 댁을 시작으로 동네 여러 집을 다니며 초대 전갈을 했는데 그 일은 매년 내 전담 사항이었지요.
"오늘이 즈의 아부지 생신날인디유. 아저씨, 즈의 집이루 오셔서 아침 잡수시래유."
내가 이렇게 전갈을 드리는 동네 어른들은 한결같이 내 아버지보다 연세가 위이신 분들이었지요.
지금은 생일 잔치에 초대를 받으면 빈손으로 가기도 그렇고 부담을 갖게 되지만 옛날엔 아예 그런 게 필요 없었지요. 그냥 부담 없이 모두 빈손으로 오셔서 맛있게 아침을 잡수고 가셨답니다.
동네 어른들이 아침을 잡수고 모두 떠나시고 나면 그 상 주위에 우리 가족이 둘러앉아 아침을 먹었는데 정말이지 아버님의 생신은 온 가족에게 잔치 기분을 갖게 해주었지요.
그런데 점점 세월이 흐르면서 내 아버님의 생신 아침에 오셔서 함께 식사를 하시던 분들이 하나 둘 세상을 떠 모습을 볼 수 없게 되더니 종래에는 내 아버지마저 이 세상에 계시지 않게 되더군요.
생각하면 그 세월이 가물가물 그리워지기도 하면서 정말로 그런 풍경이 내 세월 속에 있었나 아리송해지기도 합니다. 큰아버지와 동네 어른들(바로 옆 집 연길이 아버지, 바로 앞 집 춘명이 형네 아저씨, 삼거리 방앗간 신씨 아저씨, 대서소 김씨 아저씨, 전매소 송씨 아저씨, 읍마당집 이씨 어른…)이 우리 옴팡집 좁은 방안에서 맛있게 아침을 잡숫는 모습이 아련히 떠오르다가도 이미 옛날에 모두 세상을 뜨신 분들이라는 데 생각이 미치면 세월의 덧없음과 허무감 같은 것이 이상하게 가슴 한구석을 에는 것 같기도 하답니다.
아버님이 세상을 뜨신 후로도 해마다 5월 단오날 아침에는 온 가족이 미역국을 먹었습니다. 그리고 성당에 가서 아버님의 영혼을 위한 연미사를 봉헌했습니다. 당일에 저녁미사가 있을 경우에는 온 가족이 미사참례를 했고 저녁미사가 없을 때는 외식을 했지요. 비록 아버님은 계시지 않지만 오늘에도 살아 계시는 것처럼 선친의 생신을 기념해온 거지요.
선친의 84회 생신인 오늘 아침에도 우리 가족은 미역국을 먹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화요일 우리 성당에서는 평일미사를 저녁에 지내는 날입니다. 해서 오늘도 가족 모두 저녁미사에 참례하고 또다시 아버님을 위한 연미사를 봉헌할 예정입니다.
그런데 나는 오늘 저녁 아버님 위령미사에 참례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오후에 출발하는 중국 여행 때문입니다. 태안문화원의 '문화가족' 20여 명이 중국 산동반도 일대를 돌아보는 '뱃길 따라가는 중국문화답사'를 4박5일 동안 하게 되는데 나도 그 일원으로 참여하게 된 까닭이지요.
장남인 제가 선친 위령미사에 불참해 보기는 이번이 처음이지 싶습니다. 아버님께 죄스러운 마음도 없지 않군요. 한편으로는 나의 중국 여행 출발이 겹쳐 올해의 선친 생신은 더욱 특별한 날이지 싶기도 합니다.
선친의 84회 생신에 저녁의 위령미사에도 불참하고 중국 여행길에 오르는 것을 선친 영전에 사죄 드리면서 내가 얼마 전에 태안군 홈 사이트 게시판에 올렸던 글 하나를 소개할까 합니다.
선친의 고향이신 태안군 근흥면 두야리 출신으로 현재 서울에서 사는 최기훈 시인이 20여 년 전 내 아버님 모습을 추억하는 글을 태안군 홈 게시판에 올려놓았기에 그 답례로 쓴 글입니다.
최두리 시인님
제 선친 지동환(池東煥)님의 시집 <장명수 산조>를 기억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벌써 아스라이 멀어진 옛일이 되었군요.
1980년 초여름이었지요.
그리고 그때는 제가 경기도 남양만의 한 간척공사장에 몸을 놓고 있을 때였지요.
회갑을 맞으신 아버님께 자식으로서 해드릴 일이 아무 것도 없어서(장가들어 며느리와 손주를 보시게 해드리기를 했나…) 조금이라도 불효를 면할 방도를 궁리하다가 정월에 집에 갔을 때 입수했던 아버님의 습작 시편들을 묶어서 시집을 만들어 드릴 생각을 했었지요. 소설가 천승세 선생님과 안양에서 사시는 자형의 도움으로 500부를 만들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급하게 서둘러 만든 탓에 아버님도 저도 모든 시편들을 깔끔하게 정리를 하지 못해서 그때나 지금이나 미흡함과 아쉬움이 많이 남는 일이었지요.
아무튼 그 시집은 우리 고장 태안에서는 최초로 세상에 나온 개인시집이 되었습니다. 제 아버님이 당시에 정식으로 등단 절차를 거친 시인은 아니셨지만, 우리 고장 최초의 개인시집을 갖게 되신 분이라는 사실에 저 나름대로 의미 부여를 하고 있답니다.
아버님의 회갑상에 올려놓아 드렸던 그 시집이 최두리 시인의 동생 분들에게도 전달이 되어서, 오늘에도 최 시인으로 하여금 그 시절의 그 일을 기억하게 만들었으니, 저는 거기에서도(20여 년이 흐른 오늘에도) 살풋한 보람을 느끼게 되는군요. 정말이지 그것만으로도 좋은 보람이 될 것 같습니다.
돌이켜보면 그 당시 아버님 몰래 그 시집을 만드는 일을 하면서 여러 가지 남다른 괴로움이 꽤나 컸지 싶습니다.
노동판을 전전하며 너무도 엉뚱하게 세상을 살아가는 내 못난 몰골에 대한 자괴감, 아버님 시집 발간이 뜻 있는 일이긴 하지만 그것으로 내 불효를 한껏 분식하려는 행위에 대한 회의, 저 광주로부터 번져오는 슬픈 핏빛 음영 속에서도 한가롭게 책을 만들고 있는 내 행위가 과연 온당한 일인가에 대한 번뇌 등이 내 잠자리를 몹시 괴롭혔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몹시 부끄러워하면서도 흐뭇하고 고마운 눈빛으로 자신의 시집을 대하시던 아버님의 모습도 잘 기억합니다. 수건으로 얼굴 땀을 닦으시며 어린 학생들에게도 손수 사인을 해서 시집을 선사하시던 아버님의 그 진지하면서도 소년 같던 모습이 아련히 그리워집니다.
그렇게 흐뭇하고 진지한 표정으로 자신의 시집에 사인을 하시던 아버님이 앞으로 겨우 6년을 더 사시고 세상을 하직하시게 되리라는 것을 그때는 상상이나 하셨겠는지 생각하면 새삼스럽게 가슴이 아파 오기도 합니다.
제 아버님께서 간경화라는 중병을 얻어 1986년 이승을 하직하신 후부터 저는 <장명수 산조> 이후에 쓰인 아버님의 시작품들과 동화작품들을 찾아 정리를 한 다음 <갯마을> <충남예술> <천주교문학> <소년>과 사보 <매일유업> 등에 속속 발표를 했지요.
그리고 아버님의 동화작품 26편 중에서 13편을 묶어 1993년 산하출판사에서 <팥죽할머니와 늑대>를 펴내었습니다. 또 1994년에는 유고시집 <바람 뫼뿐이어라>를 대전 시도출판사에서 펴내었고, 1998년에는 나머지 동화 13편을 묶어 글벗사에서 <까마귀할머니와 파랑새>를 펴내었지요. 이로써 저는 아버님이 이 세상에서 지으신 모든 시작품들과 동화작품들을 모아 책으로 묶어내는 임무를 모두 마쳤습니다.
1993년 '산하 어린이 시리즈 54번'으로 출간된 <팥죽할머니와 늑대>는 현실적인 보람도 있었습니다. 어린이도서연구회와 전국의 많은 YMCA, YWCA 등에서 권장도서로 추천을 해주었고, 여러 출판사에서 한 편씩 두 편씩 자기네 책에 수록을 하겠다고, 사용승낙을 해달라는 요청을 많이 해왔지요.
제가 엄청난 보증 덫에 치어 매월 200만원씩 빚잔치를 하며 사느라 천주교 신자로서 하느님께 바쳐야 하는 '교무금'의 의무마저 다하지 못할 위기에 처했을 때 아버님이 그렇게 도움을 주셨지요. 살아 생전에는 50세 이후부터는 전혀 돈을 벌지 못하시던 아버님이 돌아가신 후에 적게나마 돈을 벌어주시는 현상에 재미있는 느낌을 삼키며 참으로 고마운 마음을 가졌지요.
정말 세상 떠나신 아버님께서 벌어주시는 그 돈으로 두어해 동안 교무금을 무난히 해결할 수 있었답니다. 내 생활이 아무리 어렵고 힘들어도 돌아가신 아버님이 벌어주시는 돈까지 내 목구멍으로 넘길 수는 없다는 생각으로, 그 돈을 모두 하느님께 바치며 신자로서의 의무를 다할 수 있었지요. (천주교는 개신교와 달리 십일조가 아닌 삼십일조를 권장합니다.)
내 아버님은 비록 현실적으로는 무능하신 분이셨고 내게 가난만을 물려주신 분이지만, 나는 내 아버님을 진심으로 존경하며 늘 감사하는 마음을 갖습니다. 일찍이 청년 시절에 사람은 왜 자신의 뜻과 아무 관계없이 이 세상에 태어나고 살고 죽는가?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인가? 이 세상은 언제부터 왜 존재하는가? 등등 엄청난 신비감 속에서 크고도 무거운 의문부호를 세워놓고 줄기차게 고뇌를 하셨던 분이지요.
그 물음표와 고뇌에 의해 마침내 스스로 하느님을 찾으신 그 분은 평생 동안 욕심 없는 마음으로 착하게 세상을 사셨지요. 현실적인 무능력과 신병으로 아내를 지독하게 고생시킨 죄를 짓기는 하셨지만, 그것밖에는 아버님이 하느님께 지은 죄는 거의 없으리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진심으로 하느님을 믿고 하느님의 나라를 소망하셨던 그분은 가난과 하느님 신앙을 자식들에게 고스란히 물려주셨지요. (여기서 말하는 '가난'이란 물질적인 빈곤이나 궁핍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그렇기에 저는 제 아버님을 존경하고 늘 감사하며 삽니다. 자식에게 이런 마음을 갖게 하신 것만으로도 내 아버님은 인생을 매우 성공적으로 사신 분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자식이 존경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아버님의 영혼을 위해 해마다 출생하신 날과 기일과 명절들, 그리고 11월 '위령의 달'에는 꼭꼭 위령미사를 지내 드리니, 그보다 더 성공적인 이승의 삶이 또 어디 있을까 싶기도 합니다.
제 홈피에는 '선친방'이라는 이름의 방이 있습니다. 제 아버님의 시집들과 동화집들에 관한 사항들, 여러 가지 관련 글들이 가지런히 올려져 있습니다.
최두리 시인의 인사 글로 말미암아 잠시 동안 제 아버님을 추억할 수 있는 좋은 시간을 가졌습니다. 최 시인께 더욱 고맙게 생각합니다.
처음에는 최 시인의 인사 글에 답글 형식으로 간단한 글을 적으려고 했다가, 아버님에 대한 그리움이 많이도 여울져서 제대로 아버님 이야기를 해보고 싶은 충동으로 이런 글을 썼습니다. 너그러이 관용해 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