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충남 연기군 연기고개 보도연맹 학살 현장 이야기를 해오다 1주일 전 모처럼 시간이 나서 그걸 연구하는 후배랑 그곳을 찾아 나섰다.
후배가 조사한 걸로는 1950년 7월 7일에서 8일쯤 보도연맹이라는 사람들을 150여명나 잡아다 생매장해서 죽였다는 거였다. 우린 이런 단순한 이야기만을 듣고 그곳을 찾았다.
국민보도연맹(이하 보련)은 해방이 된 이후 이승만 정권이 정권 유지를 위해 고안해 낸 좌익 포섭단체였다. 명분이야 "개선의 여지가 있는 좌익세력에게 전향의 기회를 주겠다"는 것이었고 조직이름도 "보호하여 지도한다"는 뜻의 보도연맹으로 했다.
그러나 이승만 정권은 보련을 만든 명분하고는 다르게 좌익세력을 색출하고, 민족진영과 반정부 세력을 단속, 통제할 목적에 이용했다. 1948년 남한 단독정부가 수립된 후 사상대립 속에서 이승만 정권은 정권유지의 법적 장치로 국가보안법을 만들고 뒷받침할 기구로 보련을 만들게 되었던 것이다.
아마 이 사건이 있던 시기는 개미고개 전투를 전후로 한 시기였던 걸로 추정된다. 개미고개는 충남 조치원읍에서 전의쪽으로 가다보면 있는 고개로 그 당시 딘 소장이 이끌던 미군들이 처참하게 몰살당했던 곳이다. 이곳에서 거의 전사하다시피 하다 후퇴한 딘 소장은 금강전투에서도 미군들이 많이 죽어 드디어는 딘 소장 자신마저 포로로 잡히게 됐다.
목덜미로 더위가 달라붙는 오후였다. 연기고개라는 이야기만 듣고 우린 차를 몰았다. 연기고개라면 쉽게 찾을 수 있는데 학살의 현장은 어디서부터 찾아야 할지 난감했다. 우선 연기에 있는 농협 앞에서 노인들을 만났다. 노인들을 만나면 무조건 물어 보자고 했다.
"저기 연기고개가 어디인가요?"
시골에서 물건을 사러 나왔는지 촌로 한 분이 친절하게 가리켜 주었다.
"저기 넘어온 데가 연기고개이고, 이쪽으로 가면 거긴 샛고개라고덜 하지…."
어렴풋이 학살의 현장은 우리가 매일 지나 다니는 국도변인 것 같았다. 대전쪽으로 가다보면 고개 하나가 있는데 그곳이 역사의 현장인 것만 같았다. 우선 그쪽 지역에 가서 다시 물어보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연기고개라는 곳을 넘어도 인가라곤 하나도 안 보이고 새로 생긴 여관과 공장부지만 보였다. 여관을 지나 동네로 접어들었다. 어떤 가겟방에 들르니 60세쯤 되는 부부가 있었다. 고정 1리 노인회관 앞에 사시는 참전군인 김만순씨였다.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여기 연기고개라고 50년도에 보도연맹 사람들을 학살했다는 곳이 있다는데 그 이야기를 아십니까? "
쉽게도 그 할아버지가 안다고 했다.
"그 고개는 연기고개가 아니라 은고개라고 허지. 저기 저 산모퉁이가 은고갠데 저기서 사람덜이 엄청 죽었지."
"보도연맹 맞지요? "
"그려, 근데 젊은이덜은 어디서 왔나?"
"예. 조치원 사는 사람덜인데요. 그 보도연맹 사건을 조사하러 다니는 사람덜입니다."
"응, 난 전장에 나간 국가 유공잔데 직접 보지는 못 혔지만 사람덜이 그라는데 그때 사방 사람덜을 모아다 죽였대. 주위 사람덜이 송장을 찾아가느니 뭐니, 딴데서 데려다 죽였느니 어쨌느니 몰러유."
"저기 꼭대기 쪽인가요?"
"맞아, 꼭대기유. 거기 은고개 맞아유…."
"근디 왜 그라는데유?"
"아, 저희가 그 사건을 조사하러 왔어요."
"뭐하는 사람덜유?"
"인터넷 신문 기자고요. 지역에서 이런 일을 하는 사회단체입니다. 그때 시체들은 다 어떻게 했나요?"
"찾아간 사람두 있구. 묘두 있구."
"지금두 찾아가면 현장을 쉽게 알 수 있겠지요?"
"그럼유."
"그때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습니까?"
"여기 사람들은 없었지유. 서면 사람두 있지유. 사람덜이 보니께 군인덜이 엄청 오길래 피했대. 사람덜을 죽였는디 새 신발두 많구, 군인덜이 오지두 못혀게 하구. 총소리두 나구, 그랬대유."
곱상하게 생긴 할머니가 옆에서 하는 말을 듣고 말문을 터뜨렸다. 이 할머니는 이 가게 주인이고 좀 전에 말씀하신 할아버지의 아내되는 분이셨다. 그때는 조치원 읍내에서 유복하게 잘 살아 하숙을 쳤다고 했다.
"우리 셋방 살던 임순경이 있었는디. 나중에 이야기 하더군. 서면 성제리 사는 홍서방네 사람이 우리 친척인디 그때 보도연맹 회의 있다고 나오라고 혀서 가보니께 트럭에 싣고 가 다 죽였대. 그 순경은 이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두 말을 못하고 다른 사람덜은 잡혀가 그닥 다 죽였지유. 여기루 와보니께 신체를 묶어서 쏴 놨지. 아주 엉망이라 신체두 찾기 힘들었슈."
우리는 이분들 이야기를 정리하고 그 분이 가르쳐 주는 유족이 사는 주변을 찾아 나섰다. 그곳을 가기 전에 어떤 노인이 등에 분무기를 메고 소독을 하고 있기에 말을 걸었다. 그 집터는 현장에서 가장 가까운 집이었다. 역시 그 집은 국가유공자 팻말이 붙여져 있었다.
"할아버지 저기 은고개에서 보도연맹 사람덜이 수없이 죽은 일 아시죠?"
"알지. 사상 났다구 엮어다 죽였지. 난 나이가 줄어서 의용군 안 갔지. 그때 14살 먹었지. 내가 9살 먹어 해방되었지. 그때 시신 더러 찾아가구. 총맞구 죽지않은 사람덜이 사흘동안 계속 울었댜. 총을 쏘구 대충대충 흙을 쓸어덮구 도망갔지. 다 죽구 한 사람만 살았대. 그때 임자만 있으믄 다 살아났지만 워낙 살벌한 때라 군인덜이 총을 들구 지키는 바람에…."
그 집을 지나 원래 찾던 유족을 만났다. 수산리에 퇴촌이라는 곳인데 그때 당시 돌아가신 분이 정헌모씨라고 연남초등학교 교편까지 한 인텔리였다고 했다. 지금 현재는 정 선생 동생 정춘용씨가 살고 있었다. 8촌 된다는 분을 만났는데, 그 당시 정헌모씨는 결혼은 했는데 자녀가 없었다고 했다.
"정헌모 양반 시신은 찾아다가 종중 땅에다 운구혔지. 저기 산 넘어가 묜디 그 당시 바로는 안되구 모신 것은 4·19 전이지. 응 4·19 이전에 유족회 움직임이 있었구."
"시신은 어떻게 찾았습니까?"
"입성 입구 간 거 있지. 금니, 그때는 금니 한 사람이 읎었거덩. 유골은 완전 안되구 반부패상태에서 그때 찾아 올 때두 쌕쌕이(비행기)가 계속 날아다녔어."
"그때 몇 명이나 죽었습니까?"
"몇 명인지 추상(추산)을 못 허지. 구덩이가 150명 이상이믄 목만 내놓구 묻었댜. 총을 쏴서 죽었거나 살았거나 다 묻었대. 아, 누구헌티 이야기두 못 허구. 3일 정두 살은 사람덜이 애장 우는 소리를 했다는 겨. 사람덜이 그때부터 거긴 육이오 때 사람들을 다 죽여 구신 나오는디라구덜 혔지."
(계속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