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신문협회(회장 홍석현 중앙일보 회장)가 2005년 세계신문협회(WAN) 서울총회와 관련, 문화관광부에 20억여원의 국고지원을 요청한 것으로 밝혀졌다.
신문협회에서 WAN 서울총회 예산으로 잡고 있는 규모는 약 36억원으로 알려져 있다. 신문협회는 정부협조를 구하기 위해 WAN 회장이기도 한 홍 회장이 지난 5월말 이창동 문화부 장관을 직접 면담하기도 했다.
그러자 전국언론노동조합(위원장 신학림)은 23일 "죽어가는 국내 신문시장을 방치한 채 특정 언론인단체 지원에 나서는 게 정부 역할이냐"며 반박 성명을 내는 등 논란이 일고 있다.
언론노조는 "정부의 수수방관으로 신문시장은 '경품을 놓고 신문을 파는 투전판'이 계속 되고 있다"며 "그런데도 1년 넘게 신문 공동배달제 지원을 미루고 있는 정부가 WAN 축제에는 10억원을 선뜻 지원하겠다고 나섰는가"라고 비판했다.
언론노조는 WAN이 과거 박정희·전두환 군사정권의 언론인 탄압을 '언론자유 신장'으로 왜곡하고 2001년 언론사 세무조사를 언론탄압으로 비난했던 사례를 들어 지원불가론을 역설했다. 이어 "국내 신문시장을 파산지경으로 내본 장본인 중 한 사람이 현재 WAN회장으로 있는 홍석현 중앙일보 회장"이라고 꼬집었다.
문화부 "확정된 것 없다..국가차원에서 기대효과 있다면 지원가능"
하지만 문화관광부는 "아직 종합적인 검토 단계일 뿐 확정된 게 없다"는 입장이다. 문화부 관계자는 25일 <오마이뉴스>와의 통화에서 "WAN 총회가 국제행사인 만큼 국가홍보 등 정부차원의 명분이나 기대효과가 있다면 지원이 가능하겠지만 아직은 정해진 게 없다"고 말했다. 신문협회의 이번 지원은 공식적 요청이 아니었다고 문화부측은 덧붙였다.
문화부측은 또 "타당성과 함께 구체적인 금액, 지원형태 등에 대해 검토 중이지만 예산처와도 협의해야 한다"며 세간의 지원 확정설을 부인했다. 이어 문화부측은 "가령 회의장소나 행사장 대여, 편의제공, 관광 알선 등과 대통령의 관심 표명 등도 지원형태로 볼 수 있는데 이를 돈으로 계산할 수는 없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 현재 문화부가 예산처에 요청한 지원규모는 금액으로 치면 2억 5600만원인 것으로 알려졌다.
문화부는 신문협회 지원요청의 타당성을 검토하기 위해 지난 5월 31일부터 6월 2일까지 터키 이스탄불에서 열린 세계신문협회 총회에 관계자 2명을 직접 파견하기도 했다. 이와 관련, 문화부측은 "올해 총회에 가보니 세부 리셉션까지 다 후원업체가 붙더라"며 "더욱이 각국 신문사 발행인이나 편집인들이 주요 회원인 조직에 정부가 큰 규모로 지원하는 게 적절한지 검토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동안 정부에서 예산을 지원한 언론관련 국제행사는 2002년 국제언론학회 서울총회(1억원)와 국제잡지연맹 아시아ㆍ태평양지역 잡지매체 서울대회(1억9200만원) 등이 있고 95년 국제언론인협회(IPI) 서울총회와 2001년 국제기자동맹(IFJ) 서울 총회 당시 정부는 방송발전기금을 통해 각각 8억원과 4억원을 지원한 바 있다.
신문협회 "범국가적 행사로 서울총회 성공적으로 치러야"
이에 대해 한국신문협회는 "WAN 서울총회 개최에 각계 협력이 필요하고 성공적인 개최를 위해 범국가적 행사로 치러져야 한다"는 입장이다. 신문협회는 22일 홈페이지를 통해 "57차 이스탄불 총회는 터키 정부와 국민의 전폭적인 후원과 협력 하에 치러졌다"며 이를 "정부, 재계, 신문업계의 완벽한 삼위일체"로 표현했다.
따라서 신문협회는 정부와 국회, 언론단체, 재계 등을 대상으로 본격적인 홍보 활동을 전개할 방침이다. 신문협회는 문화관광부 관계자 2명이 이스탄불 총회에 참여한 것과 관련 "언론인뿐 아니라 서울총회에 대한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이 기대된다"고 당부하기도 했다.
신문협회는 무엇보다 WAN 총회가 단지 회원들의 친목모임에 그치고 있지 않다고 주장했다. 신문산업 전반에 대한 세계 언론인간 정보교류와 토론이 이뤄지는 자리를 통해 한국언론의 세계화 및 언론개혁 방향 모색도 가능하다는 게 신문협회 해석이다. 신문협회는 "청와대, 국정홍보처, 문광위 소속 국회의원 등 언론담당 관계자들이 이번 총회를 참관했다면 언론정책 방향이 크게 달라졌을 수도 있을 것"이라는 아쉬움을 나타내기도 했다.
한편 올해 이스탄불 총회가 열렸던 터키는 통상 정부 당국이 직접 나서지 않는 이전 개최국과 달리 이번 WAN 총회를 국가홍보 장으로 활용했다. 에르도간 총리는 개막식에 참석, 올해 말 EU 가입결정을 염두에 둔 듯 터키의 EU가입 문제를 집중 언급했는가 하면 최근 단행된 언론개혁 조처를 홍보했다. 터키는 그동안 언론자유를 탄압한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이어 터키 문화관광부는 장관 주최로 세계 5대 박물관 중 하나로 꼽힌다는 '이스탄불 고고학 박물관'에서 환영만찬회를 여는 등 파격적 지원으로 참석자들을 놀라게 했다. 터키의 각 기업과 언론사 등도 각종 리셉션 오·만찬과 음료 제공 등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방법으로 스폰서 역할을 담당했다.
다음은 언론노조 성명 전문이다.
죽어가는 신문시장 외면하고 축제 뒷돈 웬말이냐
“경기도 과천에서 시범 실시하고 있는 공동배달제를 분석 평가해 개선책을 마련하고 공동배달회사 등 신문업계의 여건이 조성되면 문화산업진흥기금을 활용해 신문 공동배달제를 적극 지원하겠다.”
이창동 문화관광부 장관의 지난해 4월 15일 발언이다. 당시 이 발언은 취중 농담이 아니라 백주대낮에 국회 문화관광위원회에 출석, 의원들의 질문에 답한 것이다. 문광부는 당시 장관 발언을 계기로 당장이라도 기금을 내 줄 것처럼 했다.
장관의 말대로 신문업계는 과천 시범 실시에 이어 지난해 11월 공동배달회사를 출범시켰다. 정부의 수수방관으로 수 십년째 신문시장은 '경품을 놓고 신문을 파는' 투전판이 됐다. 그 결과 일부 신문의 여론독점은 국가권력은 물론 국민 전체의 여론마저 좌지우지하는 상황을 자주 연출하고 있다. 신문업계가 돈이 남아서 공배회사를 출범시킨 게 아니다. 더는 감당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는 절박함 때문이었다.
그런데도 1년이 넘도록 문광부는 신문 공동배달제 지원을 미루고 있다. 내용을 들여다보면 더 황당하다. 문광부는 “50억 원의 담보를 주면 30억 원의 기금을 빌려주겠다”는 식이었다. 지난해 조선, 중앙일보를 빼고 나면 10대 중앙일간지 중 모든 회사가 적자였다. 50억원 담보 설정할 돈이 있으면 당장 밀린 빚부터 갚아야 할 처지다. 또 관료들은 신문사가 당장 돈이 없으니 투자조합을 구성해 외부에서 펀딩(자금조달)을 하자고도 했다. 이렇게 어영부영 1년의 세월이 흘렀다.
신문시장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 놓은 문광부는 최근 신문시장을 파산지경으로 내몬 그 장본인 중의 한 사람인 중앙일보 홍석현 회장이 대표로 있는 세계신문협회(WAN) 총회에 10억 원의 예산을 지원키로 했다. 세계신문협회는 한국의 신문시장은 뒤로 한 채 내년 봄 서울총회를 확정, 그 비용 중 상당 부분을 문광부에 지원 요청한 바 있다.
세계신문협회는 박정희 전두환 군사정권의 언론인 탄압에 대해서는 “언론자유가 신장되고 있다”고 발표했고, 2001년 국내 신문사 세무조사 때는 “언론탄압”이라고 주장했던 단체다. 홍 회장이 세계신문협회의 서울총회를 성대하게 개최하려면 중앙일보가 신문고시 등을 위반해 가며 밤낮으로 뿌려대는 무가지와 경품만 비용 중 극히 일부만 절약해도 충분하다.
이같은 한국 신문시장의 현실을 목도하면서도 문광부가 선뜻 10억원을 지원하겠다고 하는 건 말이 안된다. 결국 문광부는 생존 자체를 고민하는 무수한 국내 신문들의 비명을 뒤로 한 채 한 켠에서 축제의 팡파르를 올리겠다고 선언한 꼴이다. 이것은 정부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