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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가끔 나는 내 세대야말로 행복하다고 생각해 보곤 한다. '저 80년대'에 대학생이었으며 90년대에 대학원 과정을 밟았으니, 철이 든 이래로 유신시대의 종말과 신군부의 등장을 보고 '광주'에 대해 들었으며 민주화운동을 겪게 되었다고 하겠다.
고난의 시대에 청년기를 보냈다는 점만을 보면 불행하다 할 수도 있겠지만, 그 모두가 우리 사회가 민주화되는 과정이었음을 생각해 보면 정반대로 생각할 수도 있다.
한 개인이 살아가면서 자신이 속한 공동체가 질적으로 발전하는 것을 몸으로 느끼게 되는 경우란 그리 흔치 않으리라 짐작해 보면, 엄혹한 군사독재 치하에서 국민의 손으로 뽑은 민선 대통령의 정부로 이행해 온 사회에 발을 딛고 살아온 것은, 사회적 존재로서 귀중한 경험을 한 것임에 틀림없기 때문이다.
내게 있어서 지난 청년기가 더욱 소중한 것은, 인문학도의 길을 걸어오면서 세상이 바뀌는 것을 보게 되었다는 데 연유한다. 성장 위주의 급속한 산업화·근대화 정책으로 인해 인문학적 소양이 설 자리가 사실상 완전히 사라져 온 사회 속에서, '인간과 사회에 대한 진지한 탐구를 지향하는 문학'을 연구하는 방식으로 사회를 읽게 되었으니, 최근 30여년간의 격동의 역사야말로 내 의식을 성숙하게 하고 내 존재를 단련시키는 살아 있는 토양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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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보고 겪고 느껴 온 한에서, 우리의 지난 역사는, 부정적인 현실과 숭고한 이상의 간극이 어느 정도 메워져 온 과정이라 할 수 있다. 20, 30대 청년의 시각에 반영된 것이기는 해도, 실정적인 역사 기술도 대체로 동의하리라 여겨질 만큼 이 사실은 명명백백하다.
절대적인 궁핍의 극복과 냉전 이데올로기의 해체는 민주·시민 의식의 성장 및 시민·대중의 주인화에 대한 명확한 증거가 된다. 상기 요소들간의 길항 관계도 있고 외양에 비해 내실이 얼마나 튼실한가를 따져 볼 여지도 적지 않지만, 지난 한 세대의 역사가 근대국가, 시민사회의 구현에 있어서 놀라운 진보를 이루어냈다는 점만큼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계몽 정신의 옹호자로서 근대시민국가의 이상을 좇는 이상, 이는 엄정한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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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아직도, 갈 길이 멀다.
어느 사회 상태도 완전무결한 것은 될 수 없으며, 발전이나 진보란 현재 상태에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이상을 추구할 때만 이루어진다는 당위론에서 하는 말이 아니다. 우리가 안고 있는 근본적인 문제들, 우리 사회가 겪고 있는 구체적인 문제들이, 우리들 각자 그리고 우리 사회의 정처가 저 미래에 있음을 시시각각 알려 주고 있다.
이러한 신호, 보다 나은 근대사회를 구축하고 그에 걸맞은 시민의식을 갖추어야 한다는 지상의 과제를 일깨우는 이러한 신호 중에서 가장 최근의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이라크 파병 문제'이다.
이 맥락에서 결론적으로 당겨 말하자면, 지금 우리 사회를 들끓게 하고 있는 '이라크 파병 (철회) 문제'야말로, 지난 한 세대의 역사가 얼마만큼 내실을 갖춘 것이었는가를 확인할 수 있게 해 주는 시금석이라고 할 수 있다.
이라크에 대한 추가 파병안을 예정대로 실행할 것인가 아니면 철회 방침을 진지하게 고려할 것인가. 이 문제는 실로 복잡한 자장을 띠고 있다. 한편으로는 대한민국이라는 국가가 세계 속에서 차지하는 위상에 관련되는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한미동맹에 입각한 정치외교적인 약속의 이행 여부라는 현실적인 사안에 걸리는 문제이다.
표면적으로는 이라크의 전후 복구를 위해 실제적으로 어느 정도 관여할 것인가의 문제 곧 국제사회에서 한국의 역할을 어떻게 잡아나갈 것인가의 문제이고, 내면적으로는 우리 사회의 정체성을 어떻게 다듬어 나갈 것인가 즉 한국 사회와 한국인의 지향태를 무엇으로 할 것인가의 문제이다.
둘로 갈라서 말은 했지만 사실은 그 어느 것도 이분법적인 선택지가 아니라는 데에, 이 문제 해결의 어려움과 동시에 사회·역사적인 중요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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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중요한 것은 '사태 자체'가 아니라 '사건'이다. 냉정하게 말해 보자면, 무역센터 건물의 파괴나 이라크의 초토화, 김선일씨의 죽음 자체가 이 문제에 대해 어떠한 판단을 가능케 하는 직접적인 요소는 아니라고 할 수 있다(이 진술이 위의 사태들에서 고귀한 생명을 잃은 숱한 사람들의 죽음에 대한 인간적인 애도와 상반되거나 그것을 무시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이야기의 층위·맥락이 다를 뿐이다).
이보다는, 그러한 사태들을 어떻게 해석하는가, 그러한 사태들을 어떻게 의미화하는가가 중요하다. 모든 사회역사적인 문제들에서 항상 중요했던 것은 바로 이 점이었다.
해서 3000명의 군인을 이라크로 보낼 것인가 자체에, 대한민국 국민을 처참하게 살해한 테러단체들을 무력으로 응징할 것인가 자체에, 우리의 시선이 갇히고 논의가 한정되어서는 안 된다. 이야말로 파병이라는 역사적인 사안에 대해서, 그 결정이 가져올 여러 층위의 미래 결과들이 요구하는 바, 우리의 의식이 마땅히 갖춰야 할 폭과 깊이를 사상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추가 파병 계획을 둘러싼 논의를 풀어나가기 위해서는, 지난 일 년여간의 상황을 검토하고 그것의 현실적·세계사적인 의미를 규정한 위에서, '대한민국과 한국인의 위상을 이 세계에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라는 의식을 가지고 문제에 접근해야 한다.
미래를 염두에 두고, 우리나라의 위상과 우리의 정체성을 고려하면서, 이 문제에 접근해야 한다는 것이다. '미래를 염두에 둔다'는 것은, 모든 미래 기획이 그러하듯이, 어떠한 정체성을 지향할 것인가를 따져야 한다는 말이다.
요컨대 대한민국이 어떠한 나라가 되기를 바라는가, 한국인이 어떠한 국민이 되기를 원하는가를 반성적으로 성찰하면서 이 문제에 접근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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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크 전쟁을 보는 시각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지만 크게 나누면 두 가지가 된다.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인 미국 중심의 세계 평화를 의미하는 팍스아메리카나의 시각과 그 반대편의 시각이 그것이다.
세계 평화를 위협하는 존재가 누구인가, 즉 테러리스트들과 그들을 지원하는 '악의 축'인가 아니면 '악의 축'을 규정하고 자신의 틀에 맞춰 세계 질서를 짜려는 미국(의 이상)인가 하는 문제는, 앞에서 제시한 두 가지 시각 중 어느 것을 선택하는가에 따라 상이한 답을 얻게 된다. 여기서 얻어지는 답을 따라 파병 여부에 대한 '원론적인' 방안이 내려질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보면 앞서 말한 시각의 선택이야말로 먼저 그리고 근본적으로 논의되어야 할 문제라고 할 수 있겠다. 시한을 고려해서 파병 철회 여부를 가지고 막바로 논의해야 마땅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이미 결정된 것이니 아무런 논의도 필요 없다고 하지 않는 한에서 말이다), 그러한 논의는 갈등을 크게 할 뿐 합의를 도출해 내기 어렵다는 점에서 비생산적이다. 국민투표 방안 등 역시 실제적인 차원에서 뿐 아니라 원리적인 맥락에서도 바람직하지 않다. 생산적인 논의를 사상하는 한 소모적인 힘 겨루기를 벗어나기 힘든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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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크 전쟁을 보는 시각을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가 파병 (철회) 문제를 푸는 근본적인 고리라고 할 때, 여기서도 중요한 것은 '이라크 전쟁이라는 사태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우리에게 갖는 의미'이다.
사실 '이라크 전쟁 자체'는 어떠한 것인지 알 수 없다고도 할 수 있다. 물리적, 현실적으로 정보들이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그렇기도 하고, 역사적으로 볼 때 그 의미 규정은 미래의 것이기 때문에 그렇기도 하다(누가 역사와 그 의미를 규정하는가 또한 결정적인 변수가 된다). 따라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이라크 전쟁이 우리에게 갖는 의미', 달리 말하자면 '우리의 이라크 전쟁'일 뿐이라고 할 수 있다.
사정이 이렇다 하면, 결국, 이라크 전쟁이 우리에게서 '의미화되는 방식'에 대한 성찰이 관건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 동안 우리가 이라크 전쟁을 어떻게 의미화해 왔는가, 이라크 전쟁과 관련된 일련의 사태를 어떻게 해석해 왔는가, 그 해석 과정에 우리가 개재시킨 의미 항목들은 무엇이었는가 등을 반성적으로 살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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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볼 때, 저간의 사정은 참괴스럽기까지 하다. 세계무역센터 건물 등이 테러 공격으로 무너질 때 우리가 중동의 역사와 세계 정세에 대해 얼마나 진지하게 성찰해 보았던가, 미영의 최첨단 군대가 이라크를 공격할 때 CNN을 통해서 우리가 보고 느낀 것이 어느 정도의 현실감을 갖추고 있었는가,
그러한 사태들이 우리의 현실과 운명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어떤 의미를 갖는가에 대해서 도대체 조금이라도 진지하게 성찰해 보았는가 등을 자문하면, 이 글을 쓰는 나 자신부터 너무도 부끄러울 뿐이다. 그러한 일련의 사태들이 나와는, 우리와는, 우리나라와는 별다른 관계도 없는 것인 양 너무도 안이하게 지난 일 년을 보내 온 것은 아닌가 싶기 때문이다.
사정이 바로 이러했기에, 이라크 교민의 피살이라는 '충분히 예견할 수 있는 사태'가 현실로 벌어졌을 때 '국론의 분열'이라는 말이 과장이 아닐 만큼 어지러운 국면이 펼쳐진 것이 아니겠나 한다.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나는, 민의를 구축하고 수렴하는 일에 직간접적으로 관여된 모든 이들이야말로, 가장 먼저 스스로를 비판, 반성하면서 논의의 근본을 바로잡는 데 진력해야 한다고 믿는다.
호소와 선동, 냉소와 비아냥이 아니라, 파병 (철회) 문제가 갖는 의미망부터 명확히 해 보는 데 앞장서야 한다고 믿는다. 파병 철회를 주장하든 파병 지지를 밝히든 이 문제에 대해 발언하는 모든 국민들 또한, 그러한 판단이 어떠한 경로를 통해서 내려진 것이며, 그것이 현실화될 때 갖게 될 의미가 어떠한 것일지를 차분하게 돌아보아야 한다.
이 층위에서 논의가 진행되고 수렴되어야 할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자기를 반성하지 않고 상대를 비판하기만 하는 쉽지만 무책임한 길이 아니라, 이 사태를 나의 문제이자 우리의 문제로 보는 어렵고도 책임지기 버거운 자리에 우리 모두가 서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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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라도 우리가 이라크 전쟁을 제대로 의미화하는 일은 어떠한 것일까. 그 위에서 파병 (철회) 문제에 대한 의견을 수렴하고 입장을 결정하고자 할 때, 우리가 끌어들여야 할 의미화 항목은 어떠한 것이어야 할까. 이 글에서 내가 밝히고 싶은 것은 바로 이와 관련한 사항일 뿐이다.
다소 길어졌으므로 논의를 매듭지어 보자. 우리가 밟아 온 지난 한 세대의 역사를 더욱 발전시키는 방안에서 이 문제를 사고해야 한다는 것이 나의 바람이다. 바람직한 근대국가의 건설, 성숙한 시민사회의 구현이라는 역사적인 과제를 계속 수행해 나가면서 우리 국민 모두가 바로 이 과제에 대해서 반성적으로 사유하는 능력을 갖춰 나아가야 한다는 목적의식하에서, 이라크 파병 (철회) 문제를 의미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제 우리나라는 냉전체제의 최전방에 선 힘없는 약소국가가 아니다. 우리의 안전을 남에게 일임하다시피 하면서 타의에 조종되는 삼류국가 또한 아니다. 이제 우리는 '고무신이나 돈봉투'가 통할 만큼 정치 의식이 미미한 맹목적인 국민이 아니다. 자신만의 이익을 위해서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는 맹목적인 우중 또한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는 아직 세계 정세의 흐름 속에서 자신의 위상을 확고히 세워 나가는 데 미숙하고, 우리 국민은 여전히 세계시민적인 사유에 서투르다.
제1세계와 제3세계의 국가 및 국민을 대하는 데 있어서 보이는 분열적인 양상은, 나라의 정책에도 국민들 개개인의 태도에도 여전히 짙게 배어 있다. 고난의 민주화운동을 수행해 내고 월드컵 신화를 만들었으며 촛불 집회를 평화적으로 치러온 반면에, 외국인 노동자 문제나 국내의 비정규직 문제, 세계 차원의 평화 운동과 환경 문제, 여성 문제 등에 대해서는 미숙한 모습을 보여온 것이 사실이다.
위험을 무릅쓰고 다소 단순하게 정리하자면, '우리의 문제'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성과를 보여 온 반면에 '타인과의 문제, 더불어 사는 문제'에 대해서는 아직도 편협한 태도를 벗어나지 못한 것이 오늘날 우리나라와 우리 국민의 실제 모습이라 하겠다. 동일성론에 갇혀 있어서 차이에 대해 관대하지 못한 것이라고 추상적으로 정리해 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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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크 파병 (철회) 문제를 두고 극심한 분열 양상이 벌어지는 근본 원인은, 위에서 말한 우리의 현재 모습, 그 분열상에서 찾아져야 한다. 세계를 어떻게 볼 것인가 곧 국가 차원이든 개인 차원이든, 나와 내 동류만의 세계로 볼 것인가 아니면 차이를 지닌 타자들간의 조화를 모색해 나아가야 하는 세계로 볼 것인가에서 아무런 합의도, 아니 제대로 된 논의조차도 범국가적으로 해 본 적이 아직 없기 때문에 오늘의 분열상이 생긴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 자리에서 보면, 파병 (철회) 문제야말로 오늘날 우리나라와 우리 국민의 위상을 점검해 보고 그 미래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데 있어 중요한 시금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문제에 관한 우리의 논의는 바로 이 지점, 대한민국의 위상과 한국인의 정체성을 어떻게 잡아 나갈 것인가 하는 문제를 끌어안고 이루어져야 한다.
이러한 진술은 진단이 아니라 호소이며, 매우 고통스러운 것이다. 사태와 거리를 두고 혼자 잘났다는 식으로 진단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부터 헤어나지 못한 부끄러운 모습을 고백하면서 우리가 함께 그 부끄러움을 직시해 보자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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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세대 후의 우리 사회가 어떤 모습을 띨 것인가, 그때의 우리가 어떤 시민이 되어 있을 것인가 하는 중차대한 문제가, 이라크에 군대를 보낼 것인가 아닌가 하는 결정에 적지 않게 좌우될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사정이 이러한 까닭에, '서로 차이를 인정하면서 공존을 모색하는 것이 개인간에든 국가간에든 보다 민주적인 모습'이라고 믿는 입장에서 나는, '추가 파병'의 역사적인 의미가 진지하게 논의, 고려되어야 하고, '바로 그 위에서, 그리고 그에 따라' 파병 철회가 이루어지길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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