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뚱거리며 찾아온 7월을 맞이하기 위해서 길을 나선다. 제주시내 중심가에서 동쪽으로 2km. 동쪽으로 약간 비켜 보이는 조그마한 산에는 초록의 생명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성산 일출과 쌍벽을 이루며 나지막이 누워있는 사라봉은 일몰이 아름답다. 7월의 사라봉은 영주십경의 하나로 꼽을 만큼 장관이었다.
입구에 피어있는 빨간 꽃이 사라봉을 안내한다. 사라봉은 초록을 잉태하듯 파랗게 물들어 있었다. 계단으로 통하는 숲 사이에는 무리 지어 피어있는 야생화가 꽃동산을 이뤘다.
쪼르르르. 흉내도 낼 수 없는 새 한 마리가 내 뒤를 쫓고 있다. 한 계단 한 계단을 밟고 올라 갈 때마다 초록의 향기는 코끝에 스민다. 시간과 시간 사이에 서 있는 자연은 환절기를 모르는 것 같다. 꿋꿋하게 자태를 자랑하고 있는 수령 깊은 나무들은 늘 나이 어린 나무를 보호한다.
꽉 차 있는 숲을 환하게 해 주는 것은 끝없이 이어진 계단이다. 장마 속에서 잠시 일손을 멈추고 허리를 편 햇빛이 휴식을 취한다. 구부러진 산허리 자락을 타고 한 계단씩 오르는 마음의 여유. 사라봉 산허리에 서 있으니 보이는 곳이라고는 파란 숲 뿐이다.
사라봉 정상이 다다르자 첫 번째 문을 만날 수 있었다. 마치 사찰에 들어서면 처음 만나는 일주문 같은 느낌이 든다. 신성한 가람으로 들어가기 전에 '세속의 번뇌를 불법의 청량수로 말끔히 씻고 일심으로 진리의 세계로 향하라'는 상징적인 가르침이 담겨 있는 일주문. "수행자는 인내하는 마음으로 부처나 진리를 생각하며 일주문을 통과해야 한다"는 어느 스님의 말이 생각났다.
급하게 달려온 인생의 주기를 조금이나마 늦출 수 있는 곳. 마치 마음의 창처럼 자신을 돌아다 볼 수 있는 순간이다. 사라봉 정상에서 바라본 풍경은 북쪽으로는 제주항을 옆에 끼고 남쪽으로는 한라산이 코앞에 다가온다.
제주시민공원으로 자리잡은 터가 되어버린 정상에는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모여든 사람들이 땀방울을 굴리고 있었다. 파란 잔디 위에 길게 늘어트려 있는 그네는 주인을 기다린다. 초등학교 시절 운동장에서나 볼 수 있었던 그네. 그 그네를 한 번씩 타기 위하여 줄을 서야 했던 어린시절을 생각하니 저절로 웃음이 나온다.
그런데 요즘 아이들은 그네에는 관심도 없다. 아날로그 시대에서 디지털 시대로 바뀌어 버린 지금. 그네를 보면서 아날로그에 대한 향수에 젖어 본다.
해발 148m. 푸르름을 담아 온 보따리를 풀어 보는 곳이 정상을 지키는 '망양정' 이다. 항상 정상은 우리들의 마음속 이상향이다. 사람마다 눈 높이가 다르듯이 정상의 높이는 우리들의 마음 속에 있다.
좀 더 하늘과 가까이 가기 위해 망양정에 올라 본다. 사방은 확 트였으나 안개가 자욱하다. 마치 세상이 오리무중에 빠져 있는 듯하다. 바다 주변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우리가 살아가는 동네가 희미하게 보인다.
정자 뒤에는 봉수대가 있었다. 사라봉수는 제주성에 소속된 봉수로 봉수대 동쪽에는 원당봉수, 서쪽에는 제주성과 도원봉수와 교신했다고 한다. 1989년에 해체 보수된 것으로 가로8m, 세로 10m, 높이 4m 정도의 석축을 한 연대 모양을 하고 있다.
정상에서 동쪽으로 타고 내려오는 산책로에는 야생화들이 키 재기를 한다. 자연의 섭리는 누구에게나 평등하다고 한다. 키 큰 소나무 아래 피어있는 노란 꽃잎이 더욱 싱그러움을 준다.
발길을 다시 서쪽으로 돌려 모충사로 향했다. 제일 먼저 모충사에 세워진 '의병항쟁 기념탑'으로 다가갔다. 묵념을 하고 일본인 관리를 축출하고 국권을 회복하려던 의병장들에게 묵념으로나마 그들의 뜻을 달랜다. 의병 창의자들의 숭고한 정신이 후세에 전해져서 주체적 의식으로 깨어났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리고 사라봉 동남쪽 기슭에 서 있는 김만덕 할머니기념탑, 조봉호 기념탑을 둘러봤다. 삼각형을 이룬 20m의 의녀 김만덕 묘탑. 나보다 먼저 온 이가 고개를 숙이고 있다.
정조 때 제주에 큰 흉년이 들자, 자신의 돈 1천금으로 육지부에서 양곡 500석을 구입하여 450석을 관에 기부하였던 김만덕 할머니. 자주, 근면, 박애정신을 확인이라도 하듯 김만덕 전시관이 들어섰다. 하얀 옷을 입고 서 있는 김만덕의 사진을 보며 여행길에서 다소 흐트러진 자신의 마음을 가다듬는다.
여행은 늘 마음을 비우기 위해 떠나지만, 자연과의 대화를 통해 늘 자신을 가다듬고 나를 반성하고 돌아온다. 사라봉에 꽉 차 있는 무한한 초록의 생명력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