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찍이 어머니가 나를 바다에 데려간 것은
소금기 많은 푸른 물을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바다가 뿌리 뽑혀 밀려 나간 후
꿈틀거리는 검은 뻘 밭 때문이었다
뻘 밭에 위험을 무릅쓰고 퍼덕거리는 것들
숨 쉬고 사는 것들의 힘을 보여주고 싶었던 거다
먹이를 건지기 위해서는
사람들은 왜 무릎을 꺾는 것일까
깊게 허리를 굽혀야만 할까
생명이 사는 곳은 왜 저토록 쓸쓸한 맨살일까
일찍이 어머니가 나를 바다에 데려간 것은
저 무위(無爲)한 해조음을 들려주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물 위에 집을 짓는 새들과
각혈하듯 노을을 내뿜는 포구를 배경으로
성자처럼 뻘 밭에 고개를 숙이고
먹이를 건지는
슬프고 경건한 손을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16쪽 '율포의 기억' 모두
올해 레바논에 본부를 둔 <나지나만문학상> 공동수상자로 선정된 시인 문정희(57)가 새 시집 <양귀비꽃 머리에 꽂고>(민음사)를 펴냈다.
이번 시집은 모두 4부에 '새우와의 만남', '문', '흙', '물을 만드는 여자', '다시 알몸에게', '홀로 우는 밤', '술 마시는 사람', 딸아 미안하다', '솔개를 기다리며', '벌레를 꿈꾸며', '그의 마지막 침대', '세상의 모래들에게' 등 71편의 시가 "깊고 쓸쓸한 뒷 모습들 / 쓸어내 버리고 / 눈부신 새 물길"(당신의 손에 빗자루가 있다면)을 내고 있다.
"'몸'과 정면으로 만났다. / 존재의 시원인 몸, 비로소 언어로 귀환했다. / 시는 미완을 전제로 한 예술, / 오늘 나는 양귀비꽃 머리에 꽂고, 자연이요, 역사인 알몸을 노래한다. 가령 오늘 나의 시는 깊이 호흡을 토하는 순간, 피어나는 생각의 자궁, 꽃이기를 바라며 그 자체로 싱싱한 화살이기를…… 언어처럼. -'시인의 말' 몇 토막
시인 문정희는 시인의 말에서 "시는 몸이며, 몸의 길이며, 생명"인데, 이번에 "양귀비꽃 머리에 꽂고" 그 몸과 정면으로 맞닥뜨렸다고 말한다. 이어 "시는 미완을 전제로 한 예술"이며 "우리의 몸처럼 치명적인 아름다움과 욕망과 독을 지닌 한 송이 꽃"이라고 거침없이 내뱉는다.
근데 왜 시인은 시를 '마음'이 아닌 '몸'이라고 생각하며 치명적인 독을 지닌 한 송이 꽃에 비유했을까. 시인이 이 세상을 살면서 "만난 사람들은 모두 장님"이었고, 그들은 모두 "흰 지팡이로 지상을 아무리 두드려봐도 / 안개비 자욱한 긴 골목"(맹인잔치)의 끝을 도무지 찾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이 아침 고장 난 시계 속에 눈을 뜬다 / 고장 난 시계가 이를 닦고 / 고장 난 시계가 밥을 먹고 / 고장 난 시계가 나이"(시계와 시계 사이)를 먹고 있기 때문일까. 그래서 "해마다 어김 없이 늘어가는 나이"를 도저히 감당하지 못해 "너무 쉬운 더하기는 그만 두고 / 나무처럼 속에다"(나무 학교) 나이테를 새기기로 했기 때문일까.
다가서지 마라
눈과 코는 벌써 돌아가고
마지막 흔적만 남은 석불 한 분
지금 막 완성을 꾀하고 있다
부처를 버리고
다시 돌이 되고 있다
어느 인연의 시간이
눈과 코를 새긴 후
여기는 천 년 인각사 뜨락
부처의 감옥은 깊고 성스러웠다
다시 한 송이 돌로 돌아가는
자연 앞에
시간은 아무 데도 없다
부질없이 두 손 모으지 마라
완성이라는 말도
다만 저 멀리 비켜서라
-28쪽, '돌아가는 길' 모두
회갑을 코 앞에 둔 시인은 인각사 뜨락에 서서 오랜 세월의 풍파에 시달려 돌에 새겨진 부처의 형상이 희미해져 가는 모습을 바라본다. 어느 석공의 손재주에 의해 부처로 새겨져 새 생명을 얻었지만 마침내 "부처를 버리고 / 다시 돌"로 돌아가고 있는 그 아름답고도 성스러운 순간을.
| | | 시인 문정희는 누구인가? | | | 올해 '나지나만 문학상' 공동 수상 | | | |
| | ▲ 시인 문정희 | ⓒ민음사 | | "나의 몸이여, 양귀비꽃이여 // 빌딩과 사람들이 가뭇없이 사라진 도시, / 그 텅 빈 공간을 바라보다가 나는 문득 코피를 흘리기 시작했다. / 한 마리의 뱀이 스치듯 그렇게 시작된 코피는 며칠을 멈추지 않았다. / 뜨거운 생명의 아름다움과 섬뜩한 공포로 나는 전율했다." -'시인의 말' 몇 토막
시인 문정희는 1947년 전남 보성에서 태어나 1969년 <월간문학>에 시 '불면' '하늘'이 당선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꽃숨> <새떼><찔레><남자를 위하여><오라, 거짓 사랑아> 등 10여 권이 있으며, 시선집으로 한국대표시인 100인 선집 <어린 사랑에게>, 시극 <구운몽><도미>가 있다.
올해 영역 시집 <Windflower>가 미국에서 출판되었으며, 스페인어, 일어, 히브리어 등 8개 국어로 번역, 소개되었다. 수필집으로는 <사색의 그리운 풀밭> <사랑과 우수의 사이> <사랑이 열리는 나무> 등이 있다.
<현대문학상> <소월시문학상> <정지용문학상>을 수상했으며, 2004년 레바논에 본부를 둔 '나지나만 문학상' 공동수상자로 선정되었다. / 이종찬 기자 | | | | |
그래, 그 순간에 시간이나 완성이란 말이 무슨 소용이 있으며, 두 손을 모으고 고개 숙인다고 해서 무슨 의미를 되새길 수 있겠는가. 어쩌면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 아둥바둥 살다가 마침내 생명을 다하여 다시 자연의 일부로 돌아가는 것도 저 돌부처가 돌로 돌아가고 있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시인은 읊는다. 저 돌부처가 세월의 풍파에 시달리다가 마침내 제 본래의 모습로 돌아가듯이 "우리가 서로 사랑해야 하는 이유는 / 세상의 강물을 나눠 마시고 / 세상의 채소를 나누어 먹고 / 똑 같은 해와 달 아래 / 똑 같은 주름을 만들고 사는 것"이라고. 그리하여 "바람에 나뒹굴다가 / 서로 누군지도 모르는 / 나뭇잎이나 쇠똥구리 같은 것으로 흩어지는 것"(사랑해야 하는 이유)이라고.
지상에서 더 이상 갈 곳이 없어
뜨거운 술에 붉은 독약 타서 마시고
천 길 절벽 위로 뛰어내리는 사랑
가장 눈부신 꽃은
가장 눈부신 소멸의 다른 이름이라
-70쪽, '동백' 모두
그렇다. 시인이 시를 '몸'이라고 생각하고, 치명적인 독을 지닌 한 송이 꽃에 비유하는 이유는 바로 소멸의 미학에 있다. 삶이란 어쩌면 가장 눈부신 소멸을 위해 아름다운 욕망을 마음껏 드러내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 아름다운 욕망은 마침내 "뜨거운 술에 붉은 독약 타서 마시고 / 천 길 절벽 위로 뛰어 내리는 사랑", 그리하여 그때 피어나는 "가장 눈부신 꽃"일지도 모른다.
문정희 시인은 하늘에 떠 있는 한 송이 구름을 바라보면서도 "동구 밖 가죽나무에 목을 매고 / 스스로 사라져간 사내"를 떠올린다. 그리고 그 부드러운 구름은 그때 " 이 골목 저 골목으로 내몰던 다리 절뚝이던 그 사내"(허공 무덤)의 무덤, 죽어서도 허공에 이리저리 떠도는 그 사내가 묻힌 무덤이라고 생각한다.
시를 바라보는 시선도 마찬가지다. 시인은 "그의 독방에는 / 그가 풀어놓은 말들이 저희끼리 / 서로 연애를 하여 / 결국 까만 알을 낳는다"며 "시는 언어의 딸이 아니라 / 침묵의 딸인지도 모른다"(나의 장미)고 강조한다. 그래. 그래서 시인은 시를 '동백'처럼 치명적인 독을 지닌 한 송이 꽃이라고 말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의 신 속에 신이 있다
이 먼 길을 내가 걸어오다니
어디에도 아는 길은 없었다
그냥 신을 신고 걸어왔을 뿐
처음 걷기를 배운 날부터
지상과 나 사이에는 신이 있어
한 발자국 한 발자국 뒤뚱거리며
여기까지 왔을 뿐
새들은 얼마나 가벼운 신을 신었을까
바람이나 강물은 또 무슨 신을 신었을까
-106쪽, '먼 길' 몇 토막
시인 문정희의 새 시집 <양귀비꽃 머리에 꽂고>는 사람이 한평생 산다는 것은 더 찬란하고 아름다운 소멸을 준비하는 과정이라는 것을 깊이 있게 꼬집어낸다. 시인은 비록 향기는 나지 않지만 아름답기 그지 없는 양귀비꽃을 머리에 꽂고 치명적인 독을 안고 있는 이 세상의 알몸을 부드럽게 쓰다듬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