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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향연
결혼을 하면 남편의 성을 따르는 서구의 관습을 이미 100년 전에 거부한 여자가 있다면 당신은 믿겠는가? 평생을 모험과 도전 속에 살았던 프랑스 출신의 위대한(?) 여행가 알렉산드라 다비드넬(1868~1969)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최근 소설가 엄우흠에 의해 번역-출간된 <백일 년 동안의 여행>(향연)은 시대를 앞서갔던 페미니스트이자 급진적인 무정부주의자이며, 흡입력 있는 오페라 여가수이자 티벳불교의 성지 라싸에 최초로 발을 디딘 유럽 여성인 다비드넬의 생애를 꼼꼼하게 추적한다.

지금으로부터 83년 전인 1921년 2월. 티벳 승려의 복장으로 정체를 숨긴 다비드넬은 53세라는 적지 않은 나이에 악천후와 고산병, 산도적 등의 위협을 극복하고 라싸에 도착한다. 그날 그녀가 산등성이에서 본 늦겨울 햇살은 얼마나 눈부셨을까? 책을 읽다보면 "무덤조차 나를 붙잡지 못할 것이다"라는 그녀가 목소리가 아직도 생생하다.

<감색 운동화 한 컬레>와 <푸른 광장에서 놀다> 등의 소설을 통해 확인한 엄우흠 문장의 결벽성은 이번 번역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그 문장이 책의 품격을 한 단계 높여주고 있음은 물론이다.

친일과 월북의 덫에 걸린 가인(佳人)
- 정수웅의 <최승희>


ⓒ 눈빛
대리석을 깎아 세운 듯한 턱과 동그랗게 치뜬 매력적인 눈망울, 거기에 2004년 오늘의 시각으로 봐도 빼어난 패션감각까지. 일제시대 최고의 무용수로 추앙받으며 미국과 유럽 등지에 '조선(한국)'을 알린 최승희(1911~?)의 드라마틱한 생애가 한 권의 사진집으로 묶였다.

'세기의 무희 최승희'를 제작한 다큐멘터리 감독 정수웅의 근간 <최승희-격동의 시대를 살다간 어느 무용가의 생애와 예술>(눈빛)은 자신을 매혹시킨 한 무용수의 발자취를 좇아 일본과 중국은 물론 유럽과 러시아 등을 헤맨 저자의 노력이 없었다면 탄생될 수 없었을 터. 책에 담긴 사진 하나하나는 물론이거니와 일본 등지에서 만난 최승희 제자와의 인터뷰 모두가 귀한 사료다.

'친일'과 '월북'이라는 두 개의 덫에 동시에 걸려있었던 탓에 남한사회에서 그 이름을 입에 올리는 것조차 한동안 금기시됐던 이 매혹적인 여성무용수의 생애는 "지나친 아름다움은 불행을 부른다"는 미인박명(美人薄命) 혹은, 가인박복(佳人薄福)이란 사자성어를 절로 떠올리게 한다.

누구라서 삶이 쓸쓸하지 않을 것인가
- 박범신 소설 <빈 방>


ⓒ 이룸
프랑스의 표상주의 시인 아르튀르 랭보(1854~1891). 그는 채 스무 살도 안 된 어린 나이에 이런 문장을 쓴다. "상처 없는 영혼이 어디 있으랴." 소설가 박범신은 최근 출간된 소설 <빈 방>(이룸)을 통해 위에 언급한 랭보의 시적 문장을 소설적으로 변용한다. 곧 이순(耳順)에 이를 중견작가까지 동의하는 걸 보면 랭보가 옳긴 옳았나보다.

연결고리를 가지는 6개의 각각 단편은 한때 경기도 한적한 곳에 작업실을 가졌던 박범신 자신의 이야기인 동시에 세상사의 허탈과 절망, 더불어 덧없음까지를 깨달은 50대 지식인 사내들의 진솔한 자기고백으로 읽힌다. 그 고백의 키워드는 '쓸쓸함'이다. 책장을 덮는 30대 기자까지 쓸쓸해질 정도다.

벗은 몸의 남자를 훔쳐보는 노파와 단란주점에서 웃음을 팔기도 하는 골프 경기보조원, 남성전용 이발소의 어두컴컴한 밀실에서 만난 늙은 창녀와 자기 작업실 골방에서 아이를 낳은 10대 소녀까지, <빈 방>에 등장하는 인물 모두에 대해 박범신은 가없는 연민을 보낸다. 이는 그들이 겪는 쓸쓸함과 자신의 쓸쓸함이 실상은 같은 종류의 것이란 걸 알아차린 탓이리라.

한국의 고구려사 홀대가 '동북 공정'을 불렀다
- 방학봉의 <중국을 뒤흔든 우리 선조 이야기>


ⓒ 일송북
고조선사와 발해사를 비롯, 고구려의 역사까지 중국 역사의 일부로 편입하려는 '동북 공정'이 최근 세간의 화두가 되고 있다. 이를 추진하는 중국의 태도에 대한 비판부터, "지금부터라도 도외시했던 한국 상고사 연구를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자성의 목소리까지 다양한 말들이 들려오고 있는 상황.

<중국을 뒤흔든 우리 선조 이야기>(일송북)의 출간은 이런 상황 속에서 출판계가 어떻게 발빠르게 대처할 것인지에 대한 해답으로 보인다. 책에는 중국으로 건너가 최고의 권좌에 올랐거나, 불교의 최고위급 지도자가 되었거나, 중국 대륙의 상당 부분을 점령한 우리 선조의 이야기를 들려줌으로써 "고구려는 중국의 지방정부에 불과했다"는 중국의 억지를 뒤엎는다.

저자인 방학봉은 1930년 길림성 화룡현에서 태어난 조선족으로 연변대학 역사학부에서 수학했으며, 현재까지 동 학교에 재직하고 있다. '발해사연구소' 대표 등을 지낸 그는 이미 <발해사 연구> <동북 민족 관계사> 등의 저서를 통해 중국과는 변별되는 한민족 역사의 정통성을 주창해온 바 있다.

당나라 황제를 꿈꾸었던 이정기와 실크로드의 개척자가 된 고선지, 측천무후로 하여금 "그는 존경받아 마땅한 사람"이란 평가를 내리게 한 번역가 원측 등 중국대륙을 압도한 우리 선조의 이야기는 쇼비니즘에 치우친 민족 우월성이 아닌 역사에 근거한 자부심을 갖게 하기에 충분하다. 중국에서 활약한 고구려와 백제, 신라의 인물을 다룬 1권에 이어 고려와 조선의 인물을 다룬 2권이 곧 출간될 예정이다.

'서정'이 곧 굴복은 아니다
- 백무산 시집 <길 밖의 길>


ⓒ 갈무리
'서정시를 쓸 수 없는 시대'를 살았던 김남주(1994년 타계)는 어떤 작품에서 이런 푸념을 들려준다. "나는 왜 만발한 진달래가 아름답다고, 그 진달래를 배경으로 사뿐사뿐 걸어가는 처녀의 자태가 즐겁다고 노래할 수 없는 것이냐." 박노해와 함께 세칭 '80년대 노동시의 양대 거두'로 지칭되는 백무산 역시 마찬가지였다. '암흑의 시대'로 불리는 80년대. 그에게는 '세상 풍경의 아름다움'을 노래할 여력이 없었다.

"세상은 바뀌었고 박노해도 바뀌었다"는 세간의 목소리가 들려온 지는 이미 오래. 그렇다면 백무산은 어떠한가? <만국의 노동자여>와 <동트는 미포만의 새벽을 딛고>에서 보여지던 결기와 자본과의 비타협은 아직도 여전한가?

지난해 여름 실천문학사에서 출간한 <초심>과 최근 발간된 <길 밖의 길>(갈무리)은 위의 물음에 대한 백무산의 시적 화답이 아닐까싶다. <길 밖의 길>은 지난 시절 백무산의 시집과 달리 '서정'의 대폭적인 차용이 눈에 띄게 드러난다. 그러나, 그 '서정'에는 '서슬 푸른 칼'이 숨겨져 있다. 구체적 사례를 일일이 적시할 필요도 없을 정도다. 80년대의 파토스와 '강철 노동자' 백무산을 기억하는 독자들에겐 좋은 선물이다.

어떤 기사가 좋은 기사인가?
- 유일상의 <취재보도입문>


ⓒ 지식산업사
인터넷의 발달로 인한 매체환경의 급변은 '누구나 기사를 쓸 수 있는 시대'로 우리를 데려왔다. 그러나, '누구나 기사를 쓸 수 있다'는 말이 '누구나 좋은 기사를 쓸 수 있다'는 것으로 오해돼서는 안 될 일. 타고난 천재가 아닌 이상 좋은 소설을 쓸려면 소설작법을 공부해야하듯, 좋은 기사를 쓰기 위해서는 기본적인 기사작성법을 체득하고 익혀야한다.

현장기자를 체험한 바 있는 언론학자인 유일상(한국언론법학회 부회장)의 근저 <취재보도입문>(지식산업사)은 '좋은 기자'를 꿈꾸는 후배들에게 들려주는 노선배의 따끔한 충고이자, 넉넉한 격려다.

유일상은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취재란 무엇이고, 기자란 무엇인가'라는 원론적인 물음에 대한 대답부터 세세한 기사작성법까지를 친절하게 일러주고 있다. 말 그대로 '기자'와 '취재'에 관한 A부터 Z까지를 어드바이스하고 있는 것이다.

저자는 서문을 통해 "당시(1970년대 초중반) 숨막히는 사회상황에 결박된 채, 적극적인 저항정신과 실천력이 부족한 나는 그 시절에 언론이 되는 것이 곧 민중을 배반하고 권력의 펜대나 나팔수가 되어 빌어먹는 짓을 하게 되는 것이라고 지레 판단하여 기자의 길을 오래 걷지 못했다"는 아픈 고백을 들려준다. 당시보다는 훨씬 자유로운 취재환경을 가진 후배기자들이 과연 어떤 기사를 써야할지 고민되게 하는 대목이다.

그 외 주목할만한 신간들

방현석 시나리오 <슬로우 불릿>(화남)
베트남전. 파병된 한국의 병사들에게 전쟁은 무엇이었고, 그 전쟁이 그들에게 남긴 상처는 얼마나 큰 것이었나? 그리고, 흐른 세월. 우리는 왜 이라크로 군대를 보내서는 안 되는 것인가?

전수찬 소설 <어느덧 일 주일>(문학동네)
고독한 사람들은 어떻게 세상을 견디는지, 그 '견딤'을 함께 해줄 누군가가 당신에겐 있는지를 묻고 있다. 제9회 문학동네작가상 수상작.

수잔 오의 <발레와 현대무용>(시공아트)
철학자 가스통 바슐라르에 의해 "인간의 육체가 보여줄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예술'로 극찬받은 발레. 그 발레가 지겹다는 사람들에게 추천한다.

칼 마르크스의 <자본론 범죄>(생각의나무)
<자본론>의 칼 마르크스와는 동명이인(同名異人)인 저자가 내놓은 쇼킹한 소설. 그럴리 없겠지만 <자본론>의 마르크스가 21세기에 부활한다면?

조명숙의 <우리동네 좀머씨>(당그래)
시인인 남편과 시처럼 살고있는 '부산 아지매'가 들려주는 사람 사는 따뜻한 이야기.

채심연이 엮은 <봄날 친구를 그리며>(한길사)
호방담대(豪放膽大)와 평사낙안(平沙落雁)의 선비시대를 떠올리게 할 당시 모음집.

김남주 시선집 <꽃 속에 피가 흐른다>(창비)
긴 설명이 필요 없는 시인. 혁명과 투쟁 속에 소진한 그의 삶이 엿보이는 시들은 다시 읽어도 편편이 절창이다. 말로만 '개혁'을 외치는 정치소인배들이 시간을 만들어서라도 읽었으면 한다.

페터 벤데가 엮은 <혁명의 역사>(시아출판사·권세훈 역)
억눌리고 수탈 당하는 자들은 어떻게 그들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었을까. 영국과 프랑스, 쿠바와 중국의 혁명사를 읽음으로써 여전히 핍박받는 오늘의 우리를 본다.

조란 지브코비치의 <책 죽이기>(문이당·유향란 역)
책을 매춘부로 비유할 수밖에 없는 우리 시대는 얼마나 불행한가. '대체 인간에게 소중한 것은 무엇인가'를 다시금 생각하게 해준다.

박영근의 <오늘, 나는 시의 숲길을 걷는다>(실천문학사)
중견시인 박영근의 친절한 안내로 백석과 이용악에서부터 박철과 최영미에 이르기까지 한국 시(詩)의 역사를 함께 산책하는 기쁨. / 홍성식 기자

최승희 평전 - 한류 제1호 무용가 최승희의 삶과 꿈

강준식 지음, 눈빛(2012)


백일 년 동안의 여행 - 삶과 죽음의 자유를 꿈꾼 여인 알렉산드라 다비드넬

바버라 포스터 외 지음, 엄우흠 옮김, 향연(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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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꽃> <한국문학을 인터뷰하다> <내겐 너무 이쁜 그녀> <처음 흔들렸다> <안철수냐 문재인이냐>(공저) <서라벌 꽃비 내리던 날> <신라 여자> <아름다운 서약 풍류도와 화랑> <천년왕국 신라 서라벌의 보물들>등의 저자. 경북매일 특집기획부장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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