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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어느 공중파 방송사가 방송사고를 제대로 쳤다. 시청자들이 편안히 주말 드라마를 시청하고 있는 와중에 화면 아래로 엉뚱한 뉴스자막이 나간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 헌재 불출마"라는 3개월 전 뉴스와 "춘천교도소 화재" 등의 사실 확인이 안 된 내용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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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당 방송사는 사고 직후 사과방송을 내보냈고 다음날 많은 언론매체가 이 어이없는 방송사고를 강도 높게 질타했다. 그런데 그 사과와 비판의 내용을 보면 '노무현대통령 헌재 불출마 외 몇 건'식의 표현을 쓸 뿐 춘천교도소 화재에 대해서는 관련 가족들에 대한 사과는 물론 그에 대한 언급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교도소에서의 화재가 얼마나 끔찍한 재앙인지, 그 소식을 접했을 수감자 가족들이 얼마나 큰 충격을 받았을지 그리고 그에 대한 사회의 철저한 무관심에 얼마나 깊은 상처를 받았을지 한 번쯤 떠올려 보는 건 왜 그렇게 어려운 일이었을까.

법을 어겨서 사회와 격리된 사람들, 그들을 가족으로 또는 친구로 둔 사람들 그리고 그 외의 사람들 모두 ‘사람’이라는 이유로 인격을 존중받아야 할 권리가 있다. 지금은 벌써 기억에서 잊혀진 이 방송사고 해프닝은 다수의 틀에서 배제된 소수의 사람들이 우리 사회에서 어떻게 소외되는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언론의 보도태도를 문제 삼기 이전에 그들이 뉴스가치가 없다고 판단하게 만든 것은 결국 우리들이기 때문이다. 그 ‘우리들’. 다수의 울타리 안에서 평온하게 살아가는 듯 보이는 우리들은 과연 행복한가?

'우리'는 국가안보와 형평성이라는 이유로 양심적 병역거부에 반대한다. 또 이성애라는 인간 본성을 거스르는 동성애자들을 혐오한다. 상식이라는 가로와 정상이라는 세로로 촘촘하게 짜인 체로 걸러지지 않는 '非다수'의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왕따의 재물로 바쳐진다. 커밍아웃은 그 왕따의 길을 제 발로 걸어가겠다는 뜻에 다름 아니다.

역설적이게도 이처럼 잘 정비된 다수중심의 사회에서 다수인 '우리'는 불행하다. 우리는 다수인 동시에 얼마든지 소수일 수 있기 때문이다. 춘천교도소의 재소자들과 그들의 가족들 중 상당수는 아마도 양심적 병역문제와 동성애문제에 있어 ‘우리’ 편의 생각을 공유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재소자들은 범죄자라는 낙인 때문에 우리들의 시야에서 이미 멀어져 있고 그들의 가족들 또한 춘천교도소 화재 오보가 세상에 나오는 순간 본의 아니게 또 다른 왕따로 분류된다.

이는 결국 우리도 잠재적 왕따임을 말해주는 것은 아닐까. 개개인이 처한 삶의 조건에 따라 다수와 소수의 영역을 수없이 넘나들 수 있는 것이 우리의 삶이라면 지나친 말일까. 우리 모두가 다수독재의 공간에서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고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사실 이러한 일상은 당연한 역사적 귀결인지도 모른다. "모난 돌이 정 맞는다"라는 유교적 가치관을 바로 뒤이었던 것이 "단결이 곧 생존"이라는 근현대사의 시대논리였기 때문이다.

21세기의 우리가 “무난(無難)과 평범”의 이데올로기에 아직까지 사로잡혀 있는 것을 보면 지난 세기의 관성은 여전한 듯하다. 이것은 개인의 불행을 넘어 사회의 불행이다.

자유롭게 분출되는 다양성이 사회를 더욱 창조적으로 이끌고 그것이 만들어 낸 문화적 동력이 사회적 번영으로 이어지는 것이 요즘 소위 ‘잘 나간다’는 세상들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우리, 부디 잘 살기 위해서라도 ‘우리’를 좀 버렸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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