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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 이기원
주름진 손으로 강낭콩을 까고 계신 할머니 앞에는 갖가지 농산물이 놓여 있습니다. 비닐 봉지에 넉넉하게 담겨 손님을 기다리는 감자가 있습니다. 상추도 있고 당근도 있습니다. 마늘도 있고 고추도 있습니다.

대형 마트의 현란한 조명 아래 전시된 때깔 고운 모습은 아니지만 금방이라도 농촌 들녘의 쇠똥 냄새, 두엄 냄새 묻어날 것 같은 정겨움이 있습니다. 그건 바로 묵묵히 농촌을 지키며 살아오신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모습 그대로입니다.

할머니 곁에는 살구도 있습니다. 노릇노릇한 모습을 보니 입안 가득 군침이 고입니다. 새콤달콤한 살구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려니 문득 신경림 시인의 시가 생각이 나는군요.

처음 이 시를 읽으면서 억센 사내의 몸에서 나는 땀 냄새를 신 살구 내음으로 비유했던 시인의 눈부신 표현에 감탄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 뒤로는 살구만 보면 이 시가 떠오릅니다.

이 억센 주먹을 어디에 쓰랴 더딘 봄날 푸진 햇살만
등줄기에 따스운데 잠 덜 깬 연이는 나를 피해 수줍게 웃네
이 억센 다릴 어디에 쓰랴 그의 몸에선 비린 물내음
그의 몸에선 신 살구내음 취할 듯 진한 살구꽃 내음
이 억센 주먹을 어디에 쓰랴 부엉이가 울고 여울이 울고
여울 속에서 이무기가 울고 새벽 하늘 성근 별 헛헛한 가슴
돌아가리라 돌아가리라 두팔 들어 어깨를 끼고
돌아가리라 돌아가리라 동지들 곁으로 돌아가리라 (신경림, 남한강 중에서)


이날 새벽시장에 가장 많은 것은 푸성귀였습니다. 억센 사내의 팔뚝만한 무, 노란 고갱이를 가진 배추, 속이 꽉 찬 양배추 등이 많았습니다. 허연 배를 드러내며 누워 있는 오이도 많았고, 새하얀 뿌리를 자랑하는 파도 수북하게 쌓여 있습니다.

ⓒ 이기원
새벽장터에서 푸성귀를 수북히 쌓아 놓고 손님을 기다리는 할아버지, 할머니들 가슴에는 갖가지 사연이 많습니다. 차떼기에 실패한 배추를 밭에서 그냥 썩힐 수밖에 없었던 사연, 나이가 꽉 찬 아들 녀석 짝 지워줄 걱정, 내일부터 쏟아진다는 장마 걱정까지. 힘들고 어렵게 살아오신 세월만큼이나 그분들 앞에 놓인 현실의 무게도 만만치 않아 보입니다.

그럴 수밖에 없겠지요. 농촌을 힘겹게 떠받치고 사시는 분들이 거의 다 노인이고 힘 깨나 쓰는 억센 젊은이들은 농촌을 떠나버리는 시대니까요. 비린 물 내음, 신 살구 내음 물씬 풍기는 젊은이들이 찾을 만한 농촌은 현실 속에는 없을 겁니다.

ⓒ 이기원
새벽시장에 오면 할머니들이 덤으로 얹어주는 인정이 아내의 마음을 잡아끄는 것 같습니다. 젊은 아낙네를 보기 힘든 시골 분들께서 딸처럼 며느리처럼 생각해서 덤을 조금씩 주는 것이지요. 장바구니 가득 채워 계산대 앞에 줄지어 서서 카드로 결제하고 나오는 대형 할인 매장에서는 결코 맛볼 수 없는 즐거움입니다.

이리 기웃, 저리 기웃 우리 네 식구 일용할 양식을 마련한 아내는 이제 그만 가자고 재촉하며 무거운 짐을 내게 넘깁니다. 새벽시장에서 얻어가는 건 푸성귀뿐만이 아닙니다. 도시에서 맛보기 힘든 옛 고향의 정겨움과 그리움을 덤으로 채워 가지고 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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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서 있는 모든 곳이 역사의 현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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