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0여년 전의 통일신라는 골품제라는 신분 제도로 인해 사회적 정체를 겪고 있었다. 신라 땅에서 출세와 신분 상승을 기대할 수 없었던 이들은 바깥으로 눈을 돌렸다. 지금이야 상대적으로 경제 수준이 나은 한국을 향해 ‘코리안드림’을 실현하려 몰려 들지만 당시 사람들은 ‘차이나드림’을 실현하기 위해 세계의 중심인 당나라로 향했다. 젊은 장보고도 정년(鄭年)이란 친구와 함께 당나라로 건너가 군인으로 성공한다. 그는 30대의 나이에 무녕군(武寧軍)이란 군대에서 지금으로 치면 연대장급 정도 되는 소장(小將)의 지위에까지 오른다.
신라인으로, 그것도 한미한 평민 신분으로 크게 출세한 셈이었지만 그는 그곳을 박차고 나온다. 세계는 너무도 역동적으로 움직이고 있었고 그의 가슴도 함께 일렁였다. 눈앞에는 미래의 파노라마가 펼쳐지고 세상은 한손에 움켜쥘 듯 너무도 또렷했다.
당나라는 아라비아, 페르시아, 신라, 일본의 상인들과 교역하고 있었다. 바다는 모든 것을 실어 나르는 유일한 고속도로였다. 완도 바닷가에서 나고 자란 그에게 바닷길은 그저 몸을 담그기만 해도 뜻대로 움직일 것만 같은 존재였다. 당시의 신라는 국운이 기울어 백성의 삶은 고달프기만 했다. 나라가 보살피지 않으니 기근이 들면 식량을 구걸하기 위해 중국 땅으로 몰려가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게다가 바다에 출몰하는 해적들은 신라인들을 손쉽게 잡아다 노예로 팔아 먹었다.
그는 외국의 군대에서 출세하는 것으로 만족할 수 없었다. 눈은 독수리처럼 먼 곳을 볼 수 있었고 가슴은 동포들에 대한 사랑으로 뜨거웠던 그는 828년(흥덕왕 3년) 신라로 돌아와 “중국 어디를 가 보나 신라의 백성들을 노비로 삼고 있습니다. 청해에 진을 설치하여 해적들이 사람을 잡아서 서쪽으로 데려가지 못하게 하십시오”라고 왕에게 건의한다.
그는 왕의 허락을 얻어 군사 1만으로 청해진을 설치한 다음 해적들을 소탕하고, 각 곳의 군소 해상 세력을 그의 통제 하에 둔다. 그리고 당과 일본에 진출해 있던 신라인들과 손잡고 삼국무역을 추진하며 해상왕국을 건설해 간다.
장보고는 청해진을 삼국무역의 중심으로 삼아 막대한 부를 축적하고 동지나해의 해상권을 장악하며 국제적 영향력을 획득한다. 일본의 승려 엔닌(圓仁)은 <입당구법순례기>(入唐求法巡禮記)라는 저서에서 당나라에서 돌아오는 뱃길을 잘 보살펴 달라고 탄원하였음을 적고 있는데, 당시의 해상교통로에서 장보고가 차지한 국제적 위세를 증명해 주는 대목이다.
경제, 군사적으로 강대해진 그는 중앙 정치에도 관여하게 되는데 838년 왕위 쟁탈전에 패해 도망 온 김우징을 도와 이듬해 그를 신무왕에 즉위시킨다. 그러나 신무왕이 6개월 만에 죽고 태자인 문성왕이 즉위하여 장보고의 딸을 왕비로 삼으려 하자, 경주의 귀족들은 그의 세력 확장에 두려움을 느껴 반대한다. 이런 대립 과정에서 중앙 정부는 한때 부하였던 염장(閻長)을 보내 그를 암살하고 만다. 이후 청해진은 5년간 더 지속되었으나 851년(문성왕 13년) 염장이 이끈 정부군에 의해 완전히 무너지고 그의 군대와 주민들은 모두 벽골군(지금의 전북 김제)으로 강제 이주되는 운명을 맞는다.
당나라의 시인 두목(杜牧)이 자신의 문집(文集)에서 그의 이야기를 전하고, 일본에서는 예로부터 신라명신으로 추앙받아 왔지만, 정작 우리의 기록에서는 그를 찾아 보기 힘들다. 그것은 동아시아의 해상왕이었던 그의 마지막 길이 신라 정부에 대항한 반역자로 끝맺음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1200여년이 지난 지금, 장보고와 청해진은 역사 속에서 걸어 나와 재평가 되고 있다. 전남 완도를 가면 그 옛날 융성했던 해상왕국의 자취들을 만날 수 있는데, 청해진의 본영(本營)으로 추정되는 장도(將島, 일명 장군섬)는 썰물 때면 걸어 들어 갈 수 있다.
장도에 서서 먼 바다를 바라보면, 과연 동아시아의 바다를 호령했던 해상왕국의 지리, 군사적 요충이었음을 확인하고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그리고 장보고를 모신 당집과 섬 둘레에 흙을 한켜한켜 쌓아 올려 조성한 판축토성, 지금도 뚜렷한 흔적이 남아 있는 길이 331m의 목책열을 보면 1200년 전의 장도의 모습을 짐작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