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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연방수상청사 전경
독일 연방수상청사 전경 ⓒ 강구섭

1. 수도는 베를린, 정부·연방의회 소재지는 본

2차세계대전 이후 새롭게 건국된 독일연방공화국(서독)은 베를린을 서독의 수도로 결정했으나 전승국의 정책에 따라 서독일 지역의 도시를 정부·연방의회 소재지로 선택해야 했다.

이로 인해 서유럽에 인접해 있던 본은 서독의 임시 수도로 새로운 민주주의의 역사를 시작, 이후 50여 년간 서독의 수도의 역할을 감당했다.

그러나 분단 독일사회의 인식에는 여전히 언젠가는 베를린으로 다시 가야한다는 생각이 내재되어 있었고 베를린은 독일인의 통일에 대한 의지의 상징으로 자리잡았다.

이는 1949년 11월 자유선거를 통해 선출된 서독의 의회가 만장일치로 "자유·직접·비밀·공정 선거가 베를린과 소련 점령지역에서 실시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되는 대로 주요 정부조직을 베를린으로 이전한다"고 명시된 것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1989년, 구동독이 무너지면서 서독은 50년만에 자신의 생각을 실현할 수 있는 기회를 맞이했고 동유럽의 민주화, 개방의 물결과 맞물려 베를린은 다시 통일독일의 수도로 자리잡을 수 있었다.

2. 독일통일, 정부·연방 의회 소재지를 놓고 벌어진 논쟁 그리고 베를린 결정

그러나 1990년 10월 동서독간에 체결된 통일조약에는 수도를 베를린으로 한다는 것만 명시, 연방의회와 정부의 소재지를 어디로 할 것인가는 열어 놓았다.

이로 인해 이듬해 연방의회가 투표를 통해 베를린으로 정부와 의회를 이전할 것을 결정하기까지 베를린으로 이전할 것을 주장하는 세력과 본에 남을 것을 주장하는 세력간에 치열한 논쟁이 이루어졌다.

베를린 이전을 주장하는 이들은 통일조약에 새로운 수도로 베를린을 명시한 것은 구동독 주민에 대한 약속이며 이는 정치적 신뢰와 직결되는 문제임을 강조했다.

또한 중요한 정부기관의 이전이 통일독일의 심리적, 내적 통일에 긍정적 기여를 가져올 뿐 아니라 이는 곧 동독지역의 경제재건을 보증하는 표시가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더 나아가 개방, 민주화 과정을 거치고 있는 동유럽과의 관계 개선을 위해서도 베를린으로의 이전은 매우 적극적이고 중요한 조치라는 것을 거듭 강조했다.

본을 고수하던 세력들은 2차세계대전 이후 본을 중심으로 뿌리를 내린 독일의 민주주의 역사와 여전히 중요한 서유럽에의 통합 등을 내세우며 본에 남을 것을 주장했다.

이들은 또한 독일의 역사적 원죄로 인해 베를린으로의 이전이 주변국에 새로운 국가주의의 신호로 이해될 수 있고 이는 그들에게 불안과 걱정을 야기시킬 수 있다는 논리를 폈다.

연방의회, 정부의 소재지를 놓고 벌어진 논쟁은 정당, 정치적 이념을 초월해 광범위하게 이루어졌는데, 대개 독일 서부, 남부 지역을 기반으로 한 세력들은 본을, 독일 북부과 동부 지역을 기반으로 한 세력들은 베를린을 지지했다. 또 구세대는 베를린을, 젊은 세대는 본을 주장했다.

의회·정부 소재지를 놓고 벌어진 논쟁은 1991년 6월 20일 연방의회의 투표를 통해 종지부를 찍었다.

양측의 치열한 설전이 벌어진 후 이어진 투표에서 338대 320이라는 근소한 차이로 정부와 의회의 베를린 이전이 결정되었으며 이는 연방의회 역사에서 기념비적인 일로 기록되고 있다.

3. 연방수도 베를린, 연방도시 본

연방정부와 의회의 베를린 이전이 결정됨에 따라 연방정부는 그로 인해 본이 입게 될 피해를 줄이고 베를린, 본의 균형적 발전을 위해 관리 성격이 강한 정부부처를 계속 본에 남겨두기로 하는 등 본의 피해를 줄이기 위한 여러가지 정책을 추진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거쳐 1994년 3월 베를린·본 법이 제정되었고 양 도시는 정치적 기능을 분할해 베를린은 연방수도, 본은 연방도시의 위상을 갖게 되었다.

이 법에 따라 연방대통령청, 연방수상청, 연방정부 공보청를 비롯한 9개 부처의 이전이 명시되었고 6개의 부처가 본에 계속 남게 되었다.

또한 각 부처의 본청이 소재한 도시에서 부처의 1차적 핵심업무를, 다른 도시에서 2차 업무를 수행하는 방식을 통해 본에서 정부인력이 대량으로 빠져나가는 상황을 방지했다.

1994년 제정된 본 베를린·법에 의한 부처 소재지 분할 현황
1994년 제정된 본 베를린·법에 의한 부처 소재지 분할 현황 ⓒ 강구섭
또한 베를린과 프랑크푸르트에 위치하고 있던 각 16개, 6개의 정부 산하기관이 본으로 이동하고, 19개의 기관을 베를린에서 신연방(구동독지역)으로 이전하는 등, 전체적으로 총 60여 개 이상의 기관, 27000여 명의 인력에 대한 이동이 이루어졌다.

수도이전 관련 인력 이동 현황, 연방정부 홍보청 발행자료(1997년)
수도이전 관련 인력 이동 현황, 연방정부 홍보청 발행자료(1997년) ⓒ 강구섭

4. 함께 성장하는 본과 베를린

연방의회, 정부를 비롯한 주요기관이 베를린으로 이전하는 것과 함께 중요하게 고려했던 것은 주지한 대로 기관의 이전으로 인해 본이 입을 손실을 최소화 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정부부처 이외에 통신회사, 체신청 등의 정부관련기관, 50여 개의 연구기관, 12개 이상의 국제기구 등이 추가로 본으로 이전되었다. 또한 베를린·본 법에 따라 새로운 도시개발을 위해 2004년까지 약 14억 유로의 재정지원이 본에 이루어졌다.

독일통일 전까지 서독의 정치중심지였던 본은 지금까지 축적된 정치적 역량과 정부의 지원을 바탕으로 학문, 문화, 국제, 미래의 경제도시로 새로운 위상을 정립하는데 성공했다.

연방의회 의사당 전경
연방의회 의사당 전경 ⓒ 강구섭
베를린·본 법의 시효가 올해 만료됨에 따라 더 이상의 추가 지원은 이루어지지 않지만 본은 여전히 수도기능의 일부과 국제 도시로서의 기능을 충실히 실행하고 있는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

한편 1992년 6월 연방정부는 베를린 이전을 위한 종합계획을 발표한 후 이듬해 10월, 2000년까지 연방정부 부처의 베를린 이전을 결정했다.

이에 따라 1999년 말부터 각 부처의 이전이 진행되었으며 2001년 5월 최종적으로 연방수상청이 베를린으로 이전, 업무를 시작함에 따라 베를린은 본격적인 수도의 면모를 갖추기 시작했다.

이외에 120여 개국 3000여 명의 외교인력을 비롯, 언론매체, 각 정당의 중앙기관, 노동조합 등이 베를린으로 이전함에 따른 새로운 건설붐으로 베를린은 유럽에서 가장 거대한 건설현장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2004년 현재 베를린에는 11개의 부처가 1차 업무를, 6개의 부처가 2차 업무를 담당하고 있으며 역으로 본에는 6개의 정부부처가 1차 업무를, 11개의 정부부처가 2차 업무를 담당하고 있다.

이러한 업무 분담에 따라 본과 베를린에는 각 1만1500여 명, 8300여 명의 부처 인력이 근무하고 있다.

5. 역할 분담에 대한 평가

본·베를린 법이 통과된 지 10년째가 되는 올해 현재 본과 베를린의 수도기능 분담에 대해 양 도시 모두 비슷하게 만족스런 평가를 내리고 있지만 단점을 지적하는 목소리도 조금씩 들린다.

수도기능의 분담과 함께 부처의 1, 2차 업무가 각기 다른 도시에서 이루어짐에 따른 시간적, 경제적 비용의 문제와 함께 업무의 비효율성의 문제가 차츰 부각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관련 수년 전부터 정치권 일각은 본에 있는 정부기관을 베를린으로 모두 이전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이따금씩 흘러나왔지만 별로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다.

천문학적 액수의 비용 문제도 그렇지만 본, 베를린 사이의 균형이 중요한 문제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연방 회계청의 보고에 따르면 수도기능 분할로 매년 천만 유로 가량이 지출되고 있지만 본에 있는 모든 기관의 이전을 위해서는 50억 유로 가량의 비용이 들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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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독일에서 공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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