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신양과 김정은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SBS 드라마 <파리의 연인>이 폭발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 재벌 2세 남자와 평범한 여자의 연애담. 현실에서의 실현가능성이 제로(0)에 가까운 줄거리지만, 드라마를 통한 보통사람들의 대리만족을 마냥 힐난할 수만은 없는 일. 낭만과 정열의 대명사처럼 사용되는 '파리'를 차용한 제목부터가 시청자들을 '꿈꾸게' 한다.
하지만, 파리 역시 오만군상이 횡행하는 도시인 만치 눈부신 낭만과 분홍빛 사랑만이 시작되는 곳은 아닐 터. <뱀장어 스튜>로 제26회 이상문학상을 수상한 권지예가 최근 출간한 <권지예의 빠리, 빠리, 빠리>(이가서)는 희망과 절망, 기쁨과 우울, 환희와 환멸이 교차했던 작가의 파리체험 8년이 고스란히 녹아있는 산문집. '파리의 연인'과는 또 다른 파리 이야기다.
깔끔하고 새침한 외모와는 달리 털털한 성격의 권지예. 그는 자신의 첫 번째 산문집을 통해 30대의 대부분을 보냈던 파리에서의 눈물과 웃음을 꾸밈없는 문체로 독자들에게 들려준다.
둘째 아이를 낳으러 간 프랑스 병원에서의 에피소드, 서툰 불어 탓에 아파트 소독을 하러 들어온 금발의 미남청년을 얼떨결에 유혹(?)하게 됐던 일화, 푸른 눈의 예쁜 동생을 낳아달라며 엄마(권지예)에게 옆집 프랑스 남자와 자라고 강요하는 아들 이야기 등은 작가의 진솔하고 거침없는 성격을 짐작케 하는 재미있는 글들.
괜한 폼과 제스처만으로 점철된 외국 체류기 혹은, 체험기가 난무하는 세태에서 권지예의 담백함과 솔직함을 고스란히 맛보는 것만으로도 <빠리, 빠리, 빠리>는 그 값어치가 만만찮아 보인다.
의표를 찌르는 이야기들과의 만남
- <2004 올해의 추리소설>
문학적 완성도와는 별개로 추리소설은 일단 재밌다. 기괴한 사건의 일어나고 그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형사 또는 탐정. 그리고 유추 가능한 결말을 뛰어넘는 의외의 반전으로 완성되는 장르가 바로 추리소설. 지겹고 따분한 여름에 딱 어울리는 추리소설 9편이 한 권의 책으로 묶였다. <2004 올해의 추리소설>(화남).
책의 서막을 장식하는 권경희의 '모두가 죽이고 싶었던 남자'와 김상현의 '슈퍼모델'은 특히 독자들의 관심을 끌만하다. 권모와 술수로 출세가도를 달리던 한 남자가 자신의 신분을 끝없이 올려주었던 무기인 바로 그 '권모와 술수'에 의해 스스로 목숨을 끊게 된다는 이야기(모두가 죽이고 싶었던 남자)와 복마전처럼 얽힌 연예계의 먹이사슬과 공론화 되지 못한 채 소문으로만 떠도는 연예인매춘 문제를 속도감 있는 문장으로 풀어낸 작품(슈퍼모델)이 잠시나마 무더위를 잊게 한다.
그렇다고 수록작들이 마냥 '재미'에만 집착하는 것은 아니다. 심각한 사회문제인 원조교제와 부패한 정치권에 대한 비판, 출세제일주의에 대한 경계 등의 메시지가 곳곳에 숨어있고, 행간에 잠복한 이러한 '의미'를 찾아내는 것도 독서의 감칠맛을 더한다.
"불볕 더위와 열대야에 잠 못 이루는 추리소설 팬들에게 주는 선물"이라는 기획의도를 밝힌 화남의 방남수 대표는 "피서철 막히는 차안에서 읽기에도 그저 그만"이라며 환히 웃었다.
시인이란 사물의 '뿌리'를 보는 존재
- 김석환 시집 <어느 클라리넷 주자의 오후>
신이 인간을 창조한 존재라면 시인은 언어를 창조하는 사람이다. 세상 모든 사물은 시인 앞에서 그 본질을 드러내고 벌거벗는다.
모든 것의 핵심을 꿰뚫어보는 시인의 눈. 그 혜안(慧眼) 앞에 지상의 모든 말(言)들이 새로이 창조되는 아름다운 풍경. 바로 그 풍경화 한 폭이 새롭게 그려졌다. <서울 민들레>와 <참나무의 영가>를 상재한 바 있는 김석환의 신작시집 <어느 클라리넷 주자의 오후>(문학과경계사).
클라리넷이 장미나무 뿌리로 만들어진 악기라는 사실을 알게 해주는 표제시에서 김석환은 세상과 인간을 향해 준엄하게 묻는다. "우리의 아픔과 절망, 그 뿌리는 대체 어디에 있냐"고.
어느 구멍을 열면/장미꽃 향기를 피울 수 있나/어느 구멍을 닿으면/장미나무 뿌리에 닿을 수 있나/창 밖 공원 한구석에/낮에도 꺼지지 않은 보안등/정신분열증 환자 고흐의 자화상처럼/일그러져 있다...
-- 위의 책 표제시 중 일부.
김석환의 시집에서 기쁨보다는 슬픔, 희망보다는 절망에 집착할 수밖에 없는 시인의 운명을 읽어낸 문학평론가 이은봉은 "소외된 것들과 버려진 것들이 어우러져 아름다운 풍경으로 재창조되고 있다"는 말로 동료작가의 출간을 축하했다.
'바다의 마음'으로 세상사를 들여다보다
- 김만수 시집 <종이눈썹>
저 멀리 포항에서 자신이 가르치는 아이들과 함께 넉넉한 '바다의 마음'으로 살고 있는 교사시인 김만수가 독자들에게 새로운 노래를 선보였다. 살아온 날들에 대한 지극한 자기반성과 세상사를 넉넉히 끌어안는 시어로 빛나는 <종이눈썹>(새로운눈)을 만나는 기쁨이 각별하다.
전작 <소리내기>와 <오래 휘어진 기억> 등을 통해 이미 적지 않은 문학적 지지자들을 가진 김만수. 이번 시집 말미에서는 '시인이 쓰고 고른 내 삶의 열 장면'이란 산문을 통해 자신의 삶과 문학, 학창시절과 군대생활, 선후배 작가들과의 인연까지 덤으로 털어놓고 있다. 시인의 발자취를 더듬는 재미가 쏠쏠하다.
모두 3부로 구성된 시집에서 기자가 주목한 대목은 1부의 시편들. 거기 수록된 '살구나무와 두 할머니' '첫 그릇' '하산(下山)' 등은 쓸쓸하지만 결코 쓸쓸함만으로 끝낼 수 없는 인간사의 이치를 조용히 읊어내는 절창들이다. '묵호 일박'은 그 중에서도 빼어난 작품. 일부를 옮겨본다.
평생을 종대로 서서 힐금거리며/더운 무쇠솥 밥 기다리다 다시/일렬로 서서 차표를 끊고 돈을 찾고/애기집 무너진 여자를 샀다/지분 냄새와 열꽃이 섞여들어/그 밤 북행열차를 타지 못했다.../복사되지 않는 시절들/일렬로 빠져나가 버린 물길 위로/막막한 이명을 후벼파는 바다새들/세상에 갚아야 할/내 오래 밀린 이자를 물고/뿌윰한 유리창 속으로/풍덩풍덩 뛰어드는/묵호 일박.
| | 한줄, 그 이상의 의미로 읽는 신간들 | | | | 장 마르칼의 <아더 왕 이야기>(뮈토스)
역사와 전설의 경계에서 세상을 보다. 아더 왕은 어떻게 태어나 어떤 삶을 살았나? 전설 혹은, 신화가 지나간 옛이야기만은 아닐 터.
이수광의 <중국을 뒤흔든 우리 선조 이야기 2>(일송북)
"고구려는 중국의 지방정부에 불과했다"는 중국언론의 보도가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주장'에 불과한지를 알게 해주는 책. 인물을 통해 한-중 2천년사를 다시 읽는다.
박정애 소설집 <죽죽선녀를 만나다>(문학사상사)
걸쭉한 영남 구어체와 오달진 문장으로 자신만의 세계를 축조하기 시작한 만만찮은 신예작가와 마주하는 기쁨이 크다.
J. M. 쿳시의 <소년 시절>(책세상)
2003년 노벨문학상 수상작가가 고백하는 개인사. 성장한다는 것은 고통스럽지만 또한 빛나는 일임에 분명한 것.
마루야마 겐지 장편 <무지개여, 모독의 무지개여>(문학동네)
저 멀리 북알프스 산자락에서 보내온 마루야마 겐지의 선물. "권력과 권위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까지 영혼을 밀어 올리는 사람이 예술가"라는 그의 말이 신선하다.
버지니어 울프의 <파도>(솔)
이제는 고전의 반열에 오른 작품을 만나는 즐거움. 국내 초역이라 그 가치를 더한다.
조하선의 <내 영혼을 위한 시네마>(샨티)
불교와 기독교, 신지학과 주역, 심리학 등 정신세계의 관점에서 읽어낸 독특한 영화해설서. 기존과 다른 시각으로 영화를 보자.
조유전의 <한국사 미스터리>(황금부엉이)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역사의 이면. 과거를 읽는다는 것은 현재를 인식하고, 미래를 확신하기 위한 가장 유효적절한 수단이 아닐지.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