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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학교생활에 익숙하지 않은 초반에는 환하게 트인 공간이나 밖을 내다볼 수 있는 창가에 있는 자리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밖을 내다보는 자리에 앉아 있으면 공부에 집중하기보다는 밖의 풍경을 벗 삼아 넋을 잃고 감상에 빠지곤 했다.

끝없이 펼쳐져 있는 파란 하늘도, 초봄의 푸릇푸릇한 나무들도, 평화롭게만 보이는 주택가의 지붕들도, 아름답게 보이기보다는 이유 없이 슬펐다. 내 안에서 일어날 수 있는 모든 감상 덩어리를 쓸데없이 불러 일으켜서 과장된 감정의 늪에 빠져 들곤 했다.

모든 것이 성글고 어쩌다 부딪치는 한국 유학생들조차 반갑다기보다 낯설고 멀었다. 나는 지금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는 건가? 제대로 하고 있는 건가? 지금 하고 있는 공부가 내가 오랫동안 생각해왔던 바로 그 공부일까? 뒤늦게 이렇게 공부해서 무엇을 얻자는 것일까? 등등의 질문들은 수시로 나를 괴롭혔다.

젊은 친구들 만큼 순발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 체력이 뒷받침 되는 것도 아니었다. 잠자는 시간을 줄여가면서 책을 읽고 쓰는 것도 벅찼다. 밤샘하는 것이 무섭지 않던 시절도 있었지만 이젠 의욕만 앞세운다고 되는 것도 아니었다.

체력을 체크하면서 스스로의 공부 방법에 성실해지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유학을 결심하고 준비할 때만해도 나이에 대해서 크게 의식하지 않았었다. 그러나 완전한 학생 신분으로 돌아가면서 오히려 정체성이 흔들렸다. 그럴 즈음 내게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던 두 사람이 있었다.

그중의 한사람은 같은 과목을 수강해서 공부하던 K로 시작하는 분이었다. 이름이 분명하게 생각나지 않는다. 금발의 머리 대부분이 하얀 순백의 머리로 바뀌고 손자까지 있었는데도 열정적으로 수업에 참여하면서 열심히 공부하던 그 분의 모습은 내게 용기를 주었다.

프레젠테이션(presentation)을 할 때도 젊은 사람들이 자신을 부끄러워 할 정도로 최선을 다해서 준비해 발표하곤 했다. 성적 결과에도 민감했다. 공부하는 와중에 몇 달 간격으로 중국을 왔다 갔다 하면서 자원봉사활동을 하고 있었는데, 공부의 목적도 봉사활동을 하기 위한 준비라고 했다.

테솔 컨퍼런스(TESOL conference)에서 직접 발표수업을 준비하는 것을 물론, 볼티모어에서 열렸던 테솔 컨퍼런스(TESOL conference)에 참가하기 위해 자비를 들여 멀리까지 여행하는 것도 주저하지 않았다. 그럴 듯한 사회적인 명예나 승진이 약속되어 있어 하는 공부가 아니었다.

또 다른 한 사람은 로 스쿨(law school) 도서관에서 만났던 사람이다. 엄밀하게 말하면 만난 것이 아니라 오랜 기간 동안 경외하는 마음으로 지켜본 사람이었다.

학교 내에서 가장 싸게 커피를 마실 수 있는 방법이 로 스쿨 도서관 지하에 설치된 자판기 커피를 이용하는 것이었다. 어떻게 해서든지 싼 커피를 먹고자 들락거리다 보니 도서관이 어느새 친숙한 나의 아지트가 되어 버렸다.

중세풍의 고딕 형식으로 된 이 건물 4층에서 둥지를 틀고 공부하기 시작했다. 원래는 로 스쿨(law school)에 다니는 학생들만 이용하도록 되어있었다. 매일 드나들다시피 도서관을 이용하면서 눈에 띈 사람은 여러 명의 젊은 학생들 사이에서 나이가 지긋하게 들어 보이는 한 노신사였다.

적게 잡아도 60은 넘어 보였다. 늘 같은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고 넉넉해 보이는 표정으로 공부를 하곤 했다. 허연 구레나룻, 주름진 얼굴, 큰 로울러가 붙어 있는 책가방 (보통 여행용 가방으로 사용하는 것임), 보온병, 두꺼운 책들….

책 속에 몰입한 이 할아버지의 옆모습을 이따금씩 훔쳐보면서 스스로 위로와 용기를 받은 적이 있었다. 공부를 방해할세라 그 옆을 통과 할 때는 조심스럽게 지나가곤 했는데 어쩌다 눈이 마주치면 황소 같은 눈으로 환하게 웃어 주곤 했다.

나이에 구애받지 않고 얼마든지 새로운 영역에 도전하며, 일정한 자격과 능력이 생기면 얼마든지 기회를 잡을 수 있다는 점에서 그들과 우리의 사정이 상당히 다를 수 있다.

물론 이러한 것은 물질적 풍요로움과 정신적 여유가 가져온 모습일 수도 있다. 어쨌든 이들은 어떤 일을 시도할 때면 물리적인 나이부터 계산하고 그 무게가 정신의 나이까지 고령화하는 나의 습성을 조금이나마 반성하게 한 사람들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밀폐된 개인용 열람실(carrel)이 싫어졌다. 거칠 것 없이 확 트이고 커다란 책상이 밖으로 나 있는 창문을 향해 위치한 자리를 좋아하게 되었다. 작은 서고를 겸하고 있는 로 스쿨 4층 도서관은 오래도록 내가 선호하는 자리가 되었다.

특히 비가 오는 날이거나 흐린 날 창문 밖을 내다보는 것을 좋아했다. 로 스쿨 학생들이 주로 강의를 듣는 기역자로 꺾어진 건물, 삭막한 기숙사벽과 나선형 층계, 오래된 나무들, 캠퍼스 곳곳이 켜져 있는 흐린 불빛들, 아름답게 노을 지던 하늘, 시간대로 변해져 가면서 창에 깃들던 어두움은 더 이상 내게 슬픔만을 느끼게 하지는 않았다. 감사함과 삶의 벅찬 희열이 순간순간 뜨겁게 식도를 타고 올라오곤 했었다. 신에게 감사했고, 부모님께 감사했고, 주위의 모든 사람들께 감사했다.

가끔 권태롭다 싶으면 영화 <뷰티풀 마인드>에 나오는 러셀 크로우(Russell Crowe)가 분했던 남자 주인공을 흉내 내곤 했다. 책상을 창문으로 밀어내 그 거대한 창문이 산산조각으로 깨져 나가는 환상! 치열한 삶을 살았던 한 고독한 천재의 모습을 가끔씩 떠올렸던 그 자리를 나는 무척 사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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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교육현장에서 일하고 있음 좀 더 따뜻한 세상을 꿈꾸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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