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찾은 누르하치의 고향 신빈
제5일 2004. 5. 29. 토. 맑음.
새벽 4시, 빗소리에 잠이 깼다. 오늘은 백서농장(白西農庄)을 답사하는 날이다. 백서농장은 오지 중의 오지라서 김동삼 선생의 손자 김중생씨도 고개를 흔들었다. 그래서 필자도 5년 전 답사 때 가 보지 못했던 곳이다. 이국성씨도 여태 가보지 못했다면서 그곳을 잘 아는 이는 중국 조선민족사학회 부이사장인 조문기 교수의 안내를 받아야 된다고 했다.
먼저 그가 근무하는 신빈만족연구소로 가서 그의 안내로 백서농장을 찾아야 하는 빡빡한 일정이었다. 그래서 아침도 거른 채 출발키로 하였다.
오전 6시, 이틀간 머문 매화구 빈관에서 짐을 모두 챙겨서 로비로 나갔다. 오늘 밤은 다음 여정상 가능한 백두산 가까운 도시에서 숙박키로 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조금 전과는 달리 날씨가 아주 쾌청했다. 비가 내린 끝에 솟은 태양은 더 눈부셨다. 낯익은 공안 차가 주차장에 대기하고 있었다. 보기만 해도 몹시 짜증이 났다.
오전 6시 10분, 매화구 빈관을 출발했다. 그런데 공안 차가 뒤따르지 않았다. 몇 번을 뒤돌아봐도 보이지 않았다. 굴레에서 벗어난 기분으로 마음이 가벼웠다.
오전 7시 30분, 청원을 지났다. 5년 전 답사 때에 지났던 도시로 눈에 익다. 그때 이 곳을 지날 때 도시를 감싸고 흐르는 시내가 어찌나 검게 오염되었는지, 도시 이름을 ‘청원(淸原)’이 아닌 ‘탁원(濁原)’으로 고쳐야 한다고 꼬집었는데, 그 새 시내가 몰라보게 맑아졌다. 중국인들도 점차 공해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 같아서 반가웠다.
오전 9시 30분, 누르하치의 고향인 신빈(新賓)에 닿았다. 5년 전 하룻밤 묵었던 흥경빈관도, 그 옆의 누르하치 석상도 그대로였다. 조문기 교수가 근무하는 신빈만족연구소도 바로 누르하치 석상 곁에 있었다.
조반을 든 후 그의 사무실에서 이국성씨의 통역으로 대담을 했다. 그가 지도에 백서농장을 표시해 주면서 한참 설명을 하는데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우리는 그에게 동행해 줄 수 없느냐고 청했더니 그는 잠깐 기다려보라고 하고는, 전화로 그날 오후 약속을 취소한 뒤 흔쾌히 앞장서 주었다.
오지 중의 오지, 백서농장
오전 11시, 곧장 신빈을 출발했다. 애초에는 왕청문을 들러 양세봉 장군의 유적지도 둘러보고자 했으나, 백서농장이 워낙 멀어서 왕청문 답사는 생략해 버렸다. 신빈에서 백서농장을 가자면 청원으로 가는 길이 우회도로라서 거기서 곧장 유하로 가는 지름길을 택했다.
그런데 그게 큰 잘못이었다. 한 30분 잘 달리더니, 그 다음은 비포장도로인데다가 간밤에 비까지 내려서 온통 진흙길로 곤죽이었다. 그때 바로 되돌렸어도 그렇게 고생하지는 않았을 것인데 온 길이 아까워서 계속 ‘Go'하다가 완전히 독박을 쓴 꼴이 되었다.
차바퀴가 진흙길에 빠져서 하는 수 없이 차에서 내려 걷기도 했다. 그동안 중국은 온통 개발 붐으로 길을 넓히거나 포장을 하였지만 워낙 땅덩어리가 넓은지라 이런 오지까지는 아직 혜택을 받지 못한 모양이었다.
어느 환경학자가 중국이 유럽처럼 문명화가 되면 지구의 공해문제는 훨씬 심각해질 것이라고 진단한 것을 본 적이 있다. 문명화만이 좋은 게 아니다. 그 문명에 따르는 공해가 인류 생존의 위협이 되기 때문이다.
오후 2시 20분, 차 천장에 머리를 몇 번 부딪친 끝에 유하현에 도착하여 늦은 점심을 먹은 후 곧장 백서농장으로 달렸다. 유하에서 고속도로로 통화 쪽으로 가다가 안인(安仁)이라는 표지판을 3km 지난 곳에서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거기서부터 다시 비포장도로였다.
여기도 길이 험하고 차량 통행도 뜸했다. 백서농장이 있는 쏘베차(小北岔)는 건설하던 1914년 무렵도 백두산 서쪽의 작은 산맥에 있는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은 깊은 삼림지대라고 했던 바, 지금도 첩첩산중으로 오지중의 오지였다.
들머리에서 40여 분 달리자 따베차(大北岔) 마을 임장 초소가 나왔다. 따베차 마을에 차를 세우고 쏘베차를 묻자, 그곳은 그 마을 어귀에서 다시 왼쪽 좁은 산길로 들어가야 하는데 거기는 현재 중공군 특수부대가 주둔지하기에 민간인 출입금지 지역이라고 했다.
수륙만리 먼 길을 찾아온 우리로서는 만난을 무릅쓰고라도 백서농장 현장까지 가고 싶었지만 길 안내를 하는 조문기 교수도, 이국성씨도 더 이상 갈 수 없다고 발걸음을 떼지 않았다.
권순태 PD는 만난을 무릅쓰더라도 백서농장 유적지 현장을 카메라에 담고자 했다. 하지만 이국성씨가 “중공군의 군율은 무자비해서 이국인이 군부대를 얼씬거리면 간첩죄로 잡아서 처형도 불사한다”는 얘기를 늘어놓는 바람에 백서농장이 있는 계곡을 멀리서 카메라에 담고는 차를 되돌렸다. 젊은 PD는 끝내 열정을 삭이지 못해 아쉬운 탄식을 연발했다.
우리 독립군 부대 최초 군영(軍營)이었던 백서농장은 유하현 팔리초구 쏘베차에 있었다. 백서농장은 농장이 아니라 군영인 바, 비밀을 유지하기 위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1914년 가을부터 신흥학우단과 부민단 간부들은 신흥학교 졸업생들을 중심으로 하는 군영을 설치하기로 하였다. 이들 간부들은 쏘베차 지역 일대에 벌목을 시작하여 병영을 만든 후, 1917년부터 신흥학교 1회부터 4회까지 졸업생 일부와 신흥학교 각 분교와 노동 강습소에서 훈련된 385명을 입영시켰다.
“이곳은 사람의 발자취가 닫지 않은 원시 밀림 지대로써 곰, 멧돼지, 오소리 등 산짐승이 득실거리는 깊은 산골짜기였다. 이곳에 막사를 짓고 큰 뜻을 품은 동지들이 모여들어 새와 짐승을 벗 삼아 스스로 밭 갈고 나무하는 농사꾼이 되어 ‘도원결의(桃園結義)’의 굳은 맹세를 방불케 하였다”라고 원병상은 <신흥무관학교>에서 그 당시를 묘사하였다.
백서농장의 장주(庄主)는 일송 김동삼 선생으로 애초 설립 배경은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중·일간 전쟁이 일어날 것을 예상하고 이 기회를 틈타서 독립전쟁을 펼치려다가 그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자 장차 대일 무장투쟁에 대비하였다.
그러나 이곳은 교통이 불편하고 모든 물자가 부족해서 수백 명이 집단으로 사는데 영양실조와 각종 질병으로 극한적인 한계 상황에 시달리다가 1919년 3·1운동 후 한족회의 지시로 문을 닫았다. 여기에 배속된 이들은 곧 상해임시정부의 관할 아래에 있었던 서간도 지구 군사기관인 서로군정서로 확대 개편되었다.
쏘베차의 백서농장은 성공을 거두지 못하였지만, 이곳에서의 4년간에 걸친 고난은 이후 항일 유격전에 큰 교훈이 되었다. 열악한 산악지대에서 생활은 독립전사들의 심신을 더욱 강철같이 단련시켰다.
오후 4시 30분, 백서농장을 코앞에 두고 언저리 계곡만 카메라에 담은 후 아쉬운 마음으로 다음 행선지로 발길을 돌렸다. 만용을 부리다가 중공군에게 잡혀 생고생을 하는 날이면 만사는 여기서 끝날 테지. 하기는 욕심을 부려 현장까지 가봐야 깊은 계곡에 우거진 숲만 보고 돌아올 게다.
오후 7시, 통화에 도착했다. 집안에 거주하는 조선족 권중보(72) 선생이 신흥무관학교 자료를 가지고 오셨다. 조 교수 권 선생과 함께 조선족 밥집에서 저녁을 먹은 후 백두산이 가까운 백산으로 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