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1일 서울중앙지방법원 민사 합의부 560호 법정에서 주로 로마자로만 상호를 표시하고 있는 국민은행(KB)과 KT가 옥외광고물법을 위반했다는 취지의 법원 판단이 나왔다.
2002년 11월 28일 한글학회(회장 허웅), 국어문화운동본부(회장 남영신), 우리말살리는겨레모임 이대로 공동대표 등 10명은 "국민은행과 한국통신이 간판을 각각 'KB'와 'KT'로 쓴 행위는 옥외광고물 등 관리법을 위반한 불법 행위로 국어를 사랑하고 아끼는 사람들에게 큰 불편과 정신적 타격을 입혔다"며 두 회사를 상대로 서울지법에 2억2000만원의 손해배상 청구소송(2002 가합 76795)을 냈다.
그동안 한글학회 등 한글운동 단체들은 국민은행과 KT가 영어로 된 씨아이(CI)만 강조하고 있음은 물론 'Think Star', 'Let's KT' 등의 영어 슬로건을 주 광고로 하고 있어 분노를 금할 수 없다며 이를 고쳐줄 것을 두 기업에 요구했으나 받아들이지 않자 이와 같이 소송을 낸 것.
이 날 재판을 맡은 김만오 재판장은 "원고들의 주장에 재판부도 공감한다. 그러나 두 회사가 공기업이었지만 지금은 민영화되었기 때문에 개인 기업이 씨아이(CI)를 영문으로 정한 행위로 개인에게 피해보상을 할 수는 없다. 하지만 두 회사가 옥외광고물 관리법을 위반했다는 건 사실이다"며 손해배상 소송을 기각했으나 영문 간판은 법을 어긴 것이라고 인정했다.
재판부에 따르면 현재 이 조항과 관련한 처벌 조항이 없어 이 같은 위반 사실에 대해 국가나 지방자치단체가 벌금이나 과태료를 부과할 수는 없다.
'옥외광고물등관리법시행령' 제13조 (광고물등의 일반적 표시방법) 1항에는 '광고물의 문자는 한글맞춤법ㆍ국어의 로마자표기법ㆍ외래어표기법 등에 맞추어 한글로 표시함을 원칙으로 하되, 외국문자로 표시할 경우에는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한글과 병기하여야 한다'고만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동안 두 기업은 세계화에 맞는 CI를 로마자로 만들어 선포식을 하고 사용해 왔다. 이 CI의 대표적인 모습이 바로 옥외광고물에서 드러난다.
그런데 두 기업은 CI를 새로 만들면서 자국어인 한글이 아닌 로마자만 사용하여 한글단체들의 분노를 사왔다. 물론 두 기업이 세계를 대상으로 사업을 하지만 두 기업의 중심 사업영역이 국내일 수밖에 없기에 무리한 게 아니냐는 지적을 받아왔다.
이 판결에 대해 이 소송에 앞장 선 남영신 국어문화운동본부 회장은 "예상은 했지만 섭섭하다. 우리가 돈을 바란 것이 아니라 시정하기를 원했을 뿐인데 그들이 듣지 않았다. 그나마 이번에 재판부가 영문 간판은 위법임을 밝혀 다행이다. 이 재판부 결정을 토대로 법을 어긴 외국어 간판을 바로잡기 위해 더욱 힘쓸 것이다"고 밝혔다.
또 다른 소송당사자인 '우리말살리는겨레모임' 이대로 공동대표도 "법을 어기고 또 우리말을 더럽히는 행위를 하고서도 반성하거나 시정할 생각은 하지 않고, 우리의 주장을 세계화시대에 국수주의 행동으로 보는 기업에 분노한다. 그렇지만 이번 재판에서 거리의 영문 간판은 법을 어긴 것임이 분명히 밝혀졌다. 그리고 정부와 지방자치단체가 그 임무를 게을리 했음도 확인되었다. 정부와 지방자치단체는 이제라도 법을 어긴 간판을 바로잡는 건 말할 것도 없고, 우리말을 살리고 지키고 빛내는 데 더욱 노력해주길 바란다"고 요구했다.
이번 기회에 정부와 지자체도 강제력이 없는 유명무실한 법을 재정비해 알면서도 버젓이 법을 위반하는 행위가 재발하지 않도록 노력하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