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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형!”

염무의 음성이 신음처럼 흐르며 쓰러지는 장절의 몸을 안아 일으켰다.

“대단한 승부사야...쿨럭!”

입가에 고인 핏덩이를 밷어내는 장절의 얼굴에는 기이하게도 메마른 웃음이 걸려있었다.

“살을 주고 뼈를 깎는다.... 젊은 친구가 빨리도 승부의 요체(要諦)를 깨닫고 있군.”

감탄이었다. 만약 자청이 장절의 공격을 피하려고 했다면 그는 반드시 죽거나 치명상을 입었을 것이다.

구섬분천은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피하고자 한다면 마치 그물처럼 옥죄어 발버둥칠수록 움직이기 조차 힘들게 만드는 것이다. 장절은 자신을 부축하고 있는 염무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미안하네....쿨럭!”

구섬분천을 펼치고 난 그의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 그것을 가르쳐준 사부의 말데로 그는 몇 달간은 족히 요양을 해야 움직일 수 있을 것이었다. 화기가 흐르던 그의 얼굴은 백지장처럼 탈색되어 있었고, 전신에는 무기력한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가세나....이제 우리가 언제쯤일까 하던 그 때가 온거야.”
“대형..아직 제가...”
“아니야....자네를 과소평가하는게 아니야....쿨럭.....승부는 이미 끝났어. 미련을 갖지 않는게 좋아.”
“.......?”
“자... 가세나....둘째의 시신이라도 수습해야 하지 않겠나.”

그는 염무의 부축을 받으며 일어나려 했다.

“대형...!”

염무는 아직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풍운삼절이 고작 스물 대여섯 보이는 청년에게 패했다는 사실이 믿기지를 않았다.

그런 염무를 바라보고 있는 장절의 시선엔 처연함이 묻어 나왔다.

“그래....인정하고 싶지 않겠지.”

장절은 갈갈이 찢겨진 전포를 걸치고 핏방울로 목욕을 한듯한 자청을 바라보았다.

“누군지 모르지만 대단한 인물을 키워냈군. 저 친구는 무예(武藝)를 배운 것이 아니라 무도(武道)를 깨달은 아이다. 우리가 알 수 없는 그 무언가에 매달려 온몸을 불사르며 몸과 마음으로 체득했겠지.”

하구연은 억지로 몸을 일으켜 세웠다.

“으흐흐...비록 패하기는 했지만 구섬분천 앞에서 무섭도록 평정심을 유지하며 한점 흔들림이 없는 눈빛을 유지하는 자가 있으리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하지만 저 아이는 눈빛조차도 변화가 없었어. 그 순간에 내가 패하리라는 것을 직감했지.”

염무는 하구연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이해했다. 아니 이해하려 노력했다.

지금 자신이 나서는 것은 만용이고, 형제의 의(義)에 어긋나는 것이기도 했다. 그렇다고 상대가 무서워 나서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하구연은 이쯤에서 모든 것을 접으려 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처음부터 이번 일은 피치 못해 억지로 한 일이었다. 그리고 일이 잘못된 경우 자신들은 무림에 얼굴을 들고 다니지 못할 파렴치한이 될 수도 있었다.

부탁한 자가 무슨 목적이 있는지 알 필요도 없었거니와 굳이 알려고도 하지 않았지만, 그들이 납치하려 했던 상대가 누군지는 최소한 알고 있었다.

무림인들이 건들기에는 정말 난감한 전직 고관대작의 손녀였으므로 그들은 하는 수 없이 복면을 했던 것이다.

염무는 하구연의 뜻을 알았다. 그리고 자신이라도 둘째형의 시신을 수습해야 했다.

그는 부축하고 있던 하구연의 몸을 풀고서 검절의 시신을 안아들었다.

하구연의 시선이 자청에게서 화의를 입고 있는 이십대의 여자에게 돌아갔다.

“서소저(徐小姐)...지금까지의 무례를 용서하시오. 추후 노부의 죄를 묻겠다면 목숨으로 갚겠소.”

지금까지 생포하고자 드잡이질을 하던 관계다. 서소저라 불리운 여인은 차가운 웃음을 흘렸다. 아름다운 미녀의 얼굴에 냉기가 풀풀 날렸다.

“천하의 풍운삼절께서 소녀를 노렸다니 오히려 영광이지요.”

어느정도 비웃음이 섞인 말투었다.

“휴....우....!”

하구연은 나직히 한숨을 토해 냈다.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랴. 그의 전신에서 자조와 회한이 묻어 나왔다.

“가세나...”

그는 분위기를 털어버리듯 휘청거리며 장내를 떠나기 시작했다. 염무는 아직도 아쉬움이 남은 듯 자청을 바라보고 있었다.

“한번쯤....나에게 기회가 온다면 자네를 찾아가겠네.”

염무는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자청에게 친구를 대하듯 나직히 말했다.

지금 염무의 말은 풍운삼절의 목숨 빚이나 패한 것에 대한 복수가 아니었다. 그저 무림인으로서의 승부를 원하고 있었다. 자청은 염무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았다. 자청은 천천히 고개를 끄떡였다.

“피하지 않으리다.”

그 말을 들은 염무 역시 고개를 끄떡이고는 하구연을 따라 걸음을 떼었다. 이것으로 약속은 성립된 것이다. 염무의 나이나 무에 대한 집착으로 보아 분명 한번쯤은 자청을 찾을 것이다.

어쩌면 목적을 가진 염무에게는 또 다른 계기를 만들어 줄 수도 있었다. 하구연은 뒤돌아 보지 않았다. 강호에 발을 들여 놓은지 어연 사십성상(四十星霜).

질곡(桎梏)은 있었지만 그리 후회할만한 일은 많지 않았다. 명성이란 한순간에 찾아와 금방 사라져버리는 것이다.

쌓아올리려면 오랜 시일과 엄청난 노력이 필요하지만 잃어 버리는 것은 한순간이다. 하구연은 패했다.

그에게 있어 이번의 패배는 변명의 여지가 없는 패배였고 그가 사십여년간 쌓아올린 명성은 이로서 사라질 것이다. 풍운삼절의 명성도 함께.

영락 육년(永樂 六年)
서늘한 기운이 찾아드는 시월 초순이었다.
(1장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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