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등산로 입구의 장승.
등산로 입구의 장승. ⓒ 한성희
태백산을 오르지도 않을 거면서 이 길을 따라나선 것은 훌쩍 떠나는 홀가분함과 오가는 자동차 여행을 즐기기 위해서다. 그래도 태백산의 정기와 싱그러움을 감상하는 게 쉽게 생기는 기회는 아니어서 시간만 되면 태백산을 즐겨찾는 친구들을 따라나선다.

항상 그랬듯이 태백시에서 운영하는 콘도형 민박촌에 여장을 풀고 산에 오르지 않는 대신 슬슬 주위의 절과 갈 만한 곳을 찾아 보았다. 만덕사에 들러 산신당에서 넙죽 절 한 번 하고, 속으로 이런 저런 한풀이성 하소연을 하고 나오니 태백산의 정기가 "쩡" 소리가 나며 가슴을 치고 꾸짖는 듯하다. 원래 절은 본당에서는 대충 절하고 가장 정성을 들이는 곳이 산신당이라고 한다. 빌면 제일 효과가 있다나? 불교에서 토속신앙이 자리잡은 것이 바로 산신각이다.

마음을 비우러 와서는 왜 세속의 욕망을 떨치지 못하고 있나 하는 자성이 든다. 욕심을 비우라고 태백산 신령 할아버지가 충고하는 듯싶다. 짙푸르다 못해 눈이 청명해지는 무성한 침엽수림이 청청하게 다가온다. 그래, 인생에서 힘든 것과 번민은 흘러가는 대로 맡겨 두자. 자연에 하소연하고 싶어서 태백산까지 왔는데 잠시나마 세상의 번뇌는 잊는 것이 좋지 않겠나.

태백산 도립공원의 단군 성전
태백산 도립공원의 단군 성전 ⓒ 한성희
등산로 입구의 당골 광장이라는 이름과 정상의 천제단이라는 명칭에서 짐작되듯이 태백산은 민속 신앙과 관계가 깊다. 그래서 많은 무속인과 기수련하는 이들이 이곳을 찾는다. 등산객들도 정상에 올라 절을 하곤 한다. 자기 위안이든 신앙이건간에 고개를 숙이고 자신의 오만함을 되돌아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아 보인다.

태백산은 시조 단군과 관계된 전설과 함께 민족의 정기가 서린 산이라 하여 신산(神山)으로 추앙 받는다. 울창한 침엽수림으로 둘러싸인 단군 성전에 오르니 태백산 도립공원관리사무소의 안내문과 함께 크지 않은 한옥 목조 건물의 배흘림 기둥이 눈에 들어온다. 솜씨 좋은 대목수가 지었다는 것을 건축에 문외한인 내가 봐도 금방 알아차릴 만큼 정성이 엿보인다. 특히 기둥을 받친 지붕 처마의 목조 조각이 특이해 눈길을 끈다.

단군성전 처마 밑 목조 조각 장식.
단군성전 처마 밑 목조 조각 장식. ⓒ 한성희
성전 안을 슬쩍 들여다 보니 무궁화 꽃이 양 옆에 장식된 단군 초상 앞에 제단이 있고, 무릎 꿇고 앉아서 기도를 하는 사람들 몇몇 있다. 행여 방해가 될까봐 조용히 물러나서 오른쪽 쪽문으로 나섰다. 작은 계곡 너머 당골 광장으로 가는 오솔길이 뻗어 있고, 맑디 맑은 계곡 물이 흐르는 위에 단군교라는 석조 다리가 길게 곡선으로 휘어져 놓여 있다.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놓인 다리를 건너자 서너 걸음 바로 옆에서 물이 흐른다. 맑은 물의 유혹을 참지 못해 손을 내밀어 담근다. 머리가 시원해지면서 1분도 안돼 뼈가 저릴 듯이 차가워 더 이상 담글 수 없다.

물이 얼마나 맑고 투명한지 사진 서너 컷을 찍었는데 사진에 물이 거의 보이지 않고 바위만 나타날 정도였다. 태백산에서 흐르는 맑은 물은 맛이 좋긴 하지만 달지는 않다. 달지도 않은데 맛이 좋다면 의아하겠지만 절이고 성전이고 가는 곳마다 물 한 잔씩 들이켰을 정도로 맛이 뛰어나다. 청정하면서도 웅장한 남성의 기운이 서린 물맛이라고나 할까?

경기와 강원도 곳곳에서 호우가 내린다는 뉴스를 들었고 떠나올 때 고속도로 곳곳에서 비를 만났다. 하지만 아침에 맞은 태백산은 몇 방울 뿌릴 뿐 비가 많이 오지 않았다. 덕분에 푸르고 위엄 어린 태백산의 정취를 오후에 떠날 때까지 흠뻑 맛 볼 수 있었다.

폭우가 연주하는 광란의 빗방울 댄스 파티

태백산을 벗어나기 직전 옥수수와 감자전을 파는 포장마차에서 잠시 쉬었다. 눈을 돌릴 때마다 사방에서 바위를 타고 내리는 시린 맑은 물과 잘생긴 강원도 소나무들이 빼어나고 수려한 자태를 뽐낸다.

아시내 계곡
아시내 계곡 ⓒ 한성희
하얀 바위를 타고 내리며 흐르는 계곡 물을 뽑아 올린 호스에서 나오는 물에 담근 캔 음료들은 냉장고에 넣지 않아도 매우 차갑다. '아시내'라는 예쁜 이름의 계곡 물이다. 인적이 거의 없는 저런 계곡에서 발을 담그고 누워 있다면 저절로 신선이 된 기분일 텐데.

더위에 지쳐 있던 엊그제까지의 여름, 이 계곡을 몰랐다는 것이 갑자기 억울하게 느껴진다. 설령 알았다고 해도 실제로 오기는 힘들었을 텐데 괜히 억울해지는 건 그만큼 계곡이 조용하고 차고 맑았기 때문이다.

오후 일찍 떠난 길이라 틈틈이 쉬어가면서 시간 나는 대로 영월 명소를 들러보기로 했다. 그런데 태백산을 벗어나자마자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주위가 갑자기 어두워지더니 동강의 물이 삽시간이 불어나면서 흙탕물로 변한다. 강원도 길은 풍광이 아름답긴 해도 구불구불한 산길이라 비가 이처럼 쏟아지면 운전이 힘들다. 운전대를 잡은 친구의 손이 긴장한다.

영월을 벗어나기 전에 비가 그쳐야 선돌(영월군 영월읍 방절리)을 들를 텐데, 비가 많이 오면 지나치고 그치면 들러 보기로 했다. 그런데 보고 가라는 뜻인지 선돌바위 광장에 이르니 비가 완전히 그쳤다.

선돌 바위는 큰 바위를 향해 다가가려고 애절한 몸짓을 하는 여인네처럼 보인다.
선돌 바위는 큰 바위를 향해 다가가려고 애절한 몸짓을 하는 여인네처럼 보인다. ⓒ 한성희
두 개로 쪼개진 선돌의 기암 절경이 밑의 동강을 배경으로 펼쳐진다. 좀 전에 내린 비 때문에 벌겋게 불어난 채 흘러가는 강물 때문에 애달픈 장수의 전설을 간직한 선돌바위가 더욱 슬퍼 보인다. 장수의 전설을 간직하고 있다고 하나 내 눈에는 마치 남자인 큰 바위를 향해 두 손을 내밀고 다가가려고 애쓰는 여인의 애처로운 모습 같아 보인다.

"저것 봐. 마치 큰 바위의 애인에게 가고 싶어 몸을 내미는 여자처럼 보이지 않아?"
"그런가? 듣고 보니 그렇게도 뵈긴 하네."

다시 비가 한두 방울씩 뿌리기 시작한다. 얼마 되지 않는 거리의 광장으로 돌아왔을 때는 본격적으로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넓고 조용하면서 여느 관광지처럼 북적대지 않는 것이 맘에 들었다. 겹겹이 둘러싸고 있는 산의 모습과 싸아한 숲 향기가 사방에서 밀려 들어 시원한 것이 맘에 들어 아예 이곳에 자리를 잡았다.

관광객이 오가긴 하지만 가게가 없고 트럭을 개조해서 포장마차로 꾸민 두 곳에서 칡즙과 마즙, 옥수수 컵라면 등을 팔고 있었다. 마침 비로 인해 들리는 손님도 없으니 내친 김에 쉬어가자고 펼쳐 놓은 파라솔 아래 탁자에 비를 피해 앉았다.

칡즙을 마시고 나니 거북하던 속이 편해진다. 쏟아지는 빗물이 등을 때리고 파라솔을 타고 떨어지면서 옷을 적셨지만 광장에서 흥겹게 춤추며 연주하는 빗방울의 묘기에 넋을 잃었다. 태백산에 번뇌를 두고 왔으니 흥겹게 비가 때리는 이 연주곡을 들으며 어찌 소주를 마시지 않을 수 있으랴.

"동해 용(龍)이 오빠가 헤어지기 서럽다고 눈물을 흘리는 거잖아."
"그렇다면 여기서 멋진 이별 의식을 가져야지."
"당근. 용이 오빠의 눈물을 보고 그냥 가면 안되지. 그냥 가버리면 마음이 찢어지게 아플 거야."
"저어기 산 위에서 슬픈 모습으로 입을 벌리고 우는 용이 오빠의 눈물을 내 어찌 피하랴."

선문답 같은 소리를 주고 받으며 운전대를 잡을 친구를 남겨두고 옷을 적시는 빗속에서 아랑곳하지 않고 소주잔을 기울였다. 결국 칡즙 한 잔을 마시러 앉은 것이 번데기와 컵라면을 안주로 빗방울의 광란하는 듯한 댄스와 연주곡을 즐기며, 용의 눈물을 핑계 삼아 소주병을 비우며 눌러앉게 된 것이다.

선돌광장의 빗방울 댄스파티. 미인 여주인에게 앞에 보이는 찰옥수수를 샀다.
선돌광장의 빗방울 댄스파티. 미인 여주인에게 앞에 보이는 찰옥수수를 샀다. ⓒ 한성희
더 시킬 안주도 없는 빈약한 메뉴이긴 했지만 김치와 옥수수 등 미모의 여주인 서비스는 계속 나왔다. 비가 들이쳐도 꿈쩍 않고 앉아서 소주잔을 기울이며 선문답을 주고받는 것이 더 재미있었는지 비 설거지를 하면서도 웃음이 떠나지 않는다.

"언제 이 산 위에서 이렇게 비오는 날 옷을 적셔가면서 또 술을 마셔보겠어?"
"오늘 용의 눈물을 보는 운명이 우리를 여기에 묶은 거야."
"그것도 이 시간 이 순간이라는 절묘한 운명."

옆에서 운전을 하느라 술을 마시지 못하는 친구가 기가 차다는 듯 보고 있다가 일갈한다.

"시끄러! 아예 한 병 더 마시고 잠자라. 모처럼 생각 좀 하고 갈 테니 옆에서 니가 떠들면 생각이 흩어져."
"내가 술 마시면 잠 죽어도 안 자고 갑자기 머리가 확 좋아져서 다 까먹은 현학적인 학문 이론과 궤변이 줄줄 나온다는 걸 모르는구만. 뭐, 엉터리긴 해도 말이지."
"니 괴물 같은 그 소리 듣고 있으면 더 머리가 복잡해진다구."

마음이 풀린 탓도 있지만 떠날 때의 무거운 기분이 사라지고 시원하게 쏟아지는 비를 바라보노라니 말이 술술 나온다. 맑은 숲의 향기가 젖은 비를 타고 짙게 퍼져온다. 이렇게 공기 좋은 곳에선 여간해서 술이 취하지 않는다.

비가 그치면 이곳을 떠나겠지만 빗물이 등을 톡톡 건드리며 소리 없이 적셔오는 것도 정겨웠고, 광장에서 보여준 질주하는 율동은 눈을 떼지 못하게 했다. 아, 여름은 이렇게 가는구나.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