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논에 있던 피를 친구는 계륵이라고 했습니다. 먹기도 그렇고 버리기도 뭐한 닭갈비.
논에 있던 피를 친구는 계륵이라고 했습니다. 먹기도 그렇고 버리기도 뭐한 닭갈비. ⓒ 김규환
농사는 아무나 짓는 게 아니다. 부지런해야 한다. 하루 중 몇 번이고 사랑을 퍼부으면 ‘주인 발자국 소리를 듣고 자란다’고 했다. 특히나 논농사는 물꼬를 봐야 하고 병이나 해충이 생기는가를 수시로 확인해야 한다.

무더운 여름철엔 멀쩡하던 벼가 어느 날 벼멸구와 이화명충나방, 문고병에 도열병, 흰빛잎마름병까지 괴롭힌다. 예전엔 그 때마다 질소비료를 줄이고 논을 바짝 말리는 방법으로 사전 예방을 했다.

예방농법이라 이름 붙여 볼까. 농사에서도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보고 벼를 흔들어 보아서 뭔가 후두둑 날아다니면 이미 때는 늦어버린 것이다. 여기에 농약을 친들 어깨만 아플 뿐 별 효과가 없다.

가루로 된 제초제가 나오기 전까지는 김매는 게 일이었다. 도사리, 가래, 부들, 골풀, 모시, 마름, 대패지심을 손으로 뽑아줬다. 어깨를 구부정하게 하고, 아랫도리는 긴 옷을 입고 팔에 토시를 해야 한다. 고무신도 신을 일이 없었다. 노출된 부분은 커가는 벼의 날렵한 부분에 베이기도 했다.

지심이라는 놈, 김이 어디 이뿐이던가. 모내기 할 때 함께 심겨져 벼와 한 몸이 되어있거나 논바닥에 애초에 자리 잡고 있던 피라는 못된 놈이 성가시다. 어릴 땐 잘 구분도 되지 않았다. 며칠 동안 콩밭을 매고 돌아와 보면 우후죽순(雨後竹筍)처럼 으쓱으쓱 자라 있다.

벼는 뿌리가 갈색이다. 줄기 가운데 부분이 노르스름하다. 무지갯빛이 도는 하얀 줄이 있는 피와 달리 벼는 별 구분선이 없다. 피가 2~3주 일찍 피어 이삭을 쑤욱 드러내면 지나가는 이마다 “저저저….” 하거나 “어허, 농사 쫑치겠구먼….” “박샌, 올 농사는 작파했는가 보네”하며 혀를 끌끌 차거나, 무슨 좋지 않은 일을 당한 건지 이웃사촌으로서 그 집에 한 번 들러 확인을 하였다.

질소가 많게되면 벼를 주저앉히는 도열병은 잎도열병, 목도열병, 이삭도열병이 창궐합니다. 가루약을 치는 날은 죽을 각오를 해야했습니다.
질소가 많게되면 벼를 주저앉히는 도열병은 잎도열병, 목도열병, 이삭도열병이 창궐합니다. 가루약을 치는 날은 죽을 각오를 해야했습니다. ⓒ 신안군청
이렇게 고약한 피 하나 뽑으려면 똥구멍이 빠져라 힘을 쏟는다. 젖 먹던 힘까지 내야 한다. 벼 대신 주인장 노릇을 하는 피 한 포기는 내 작은 손에는 두 줌이 가득했고 어른들 큰 손에도 한 움큼 찼다.

그걸 뽑으려면 한꺼번에 욕심을 냈다가는 벼 뿌리까지 다치니 피를 서너 번에 나눠 야금야금 먹어 들어가듯 공략한다. 툭툭 잡아채기도 하고 둘둘 돌려가며 뽕을 빼고는 마지막 흰 뿌리까지 완전히 제거하면 다행이다.

쉽게 봤다가 더 끈덕지게 찰거머리처럼 찰싹 달라붙어 있는 놈을 만나면 힘겨운 싸움을 벌이는데 자칫 뒤로 툭 나가떨어지기도 한다. 엉덩방아를 찧고 나면 주변 벼가 꼬깃꼬깃 구겨지는데 몇 포기 다쳤다고 어른들께 핀잔을 듣는다.

긴 하루 뙤약볕 아래서 김을 매는 일은 가족끼리 했지만 바닥에 물마저 없었다면 도망치고 싶은 마음이 새록새록 들었던 정말 하기 싫은 작업이다. 벼가 고랑사이에 있는 잡초를 이길 때까지 최소 3번은 해줘야 하니 농한기라고 편할 게 없었던 지난날 여름이었다.

게다가 계륵(鷄肋)과도 같은 피라는 작자는 왕성한 힘으로 벼가 익을 때까지 괴롭히니 환장할 노릇이었다. 그마저 바닥에 밟아 넣거나 버릴 수 없었다. 김매는 날이면 소꼴로 대신했으니 신석기시대 조, 피, 수수를 먹은 이래 이 잡초의 쓰임새는 여전했다.

어머니는 “음음음” 속 노래를 부르고 아버지는 담배 몇 대로 무료함을 달랠 수 있었지만 초등학생이었던 우리에겐 “학교 종이 땡땡땡”이나 “둥글게 둥글게~”를 한없이 부들 수도 없었다. 어서 일이 끝나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흰빛잎마름병
흰빛잎마름병 ⓒ 김규환
“야들아, 챙겨라” 하시면 피 따위 잡초를 깍지로 모아 지게에 올리고 집으로 달린다. 집으로 가 소죽을 쑤면서도 나는 피 이삭을 잊지 않았다. ‘그려, 저게 시들기 전에 써 먹어봐야 헐 것인디….’ ‘쩌그 이샌 논에 피가 많이도 피었응께 걱정헐 것 없어.’

다음날 어머니는 긍내기 콩밭으로 가셨고 아버지는 가을에 내릴 나무를 하고 계셨다. 우린 꼴이나 한나절에 한 바지게씩 베어 놓으면 되는 한가한 날이다. 숫돌에 왜낫을 날이 시퍼렇게 서도록 갈아서 지게를 지고 들로 나갔다.

개골창 주변엔 고마리와 갈대가 높이를 달리해 쑥쑥 자라 있다. 낫을 뉘워 보드라운 돼지풀 고마리 대를 “착착착” 쳐서 대충 몇 깍지 겨드랑이에 끌어당기니 금방 해야 할 몫이 다 되어 간다. 입추가 지난 때라 새로 피어난 버드나무 잎과 갈대를 몇 줌 베어 올리려고 툼벙 근처로 갔다.

그 때 개구리 한 마리가 둥둥 떠 있는 개구리밥을 흩어놓으며 가랑이를 쫘악 펴고 다이빙을 한다. 물방개가 깜짝 놀라 빙글빙글 돈다. 내가 좋아하는 참개구리 때문이다.

우리 산야에 발에 밟히듯 많았던 식용개구리는 두 가지인데 하나는 고등학교 때 입었던 교련복 색깔을 띤 것이었고, 또 하나는 예비군복 색깔을 띤 것이다. 내 맘엔 언제나 교련복을 입은 것 같은 모양의 토실토실 살이 오른 개구리가 있었다. 겨울철 개구리는 발그레한 낙엽 색깔이니 논외로 하자.

‘아따 조놈 새끼가 죽다시피 한 내 뇌세포를 건드리네. 그려 지달려라. 이 성아가 가마.’

피의 줄기는 벼와 흡사하지만 몇 가지 다른점이 있습니다. 잎줄기 양 옆이 붉은 빛을 띠고 가운데는 하얀 줄이 선명합니다. 뿌리는 하얗답니다.
피의 줄기는 벼와 흡사하지만 몇 가지 다른점이 있습니다. 잎줄기 양 옆이 붉은 빛을 띠고 가운데는 하얀 줄이 선명합니다. 뿌리는 하얗답니다. ⓒ 김규환
주위를 둘러보았다. 마침 고마리 대 사이로 쭈뼛 대롱을 타고 올라온 피가 하나 있다. 쑤욱 두 개를 뽑았다. 9할이 넘는 피 열매를 모두 훑어내고 새끼 손톱 끝부분만큼만 남겼다. 다시 두어 평쯤 되는 툼벙에 가 보았다. 둥둥 떠서 유유히 물 위를 떠다니는 개구리는 잔잔한 파동도 일으키지 않고 평온한 오후를 즐기고 있다.

낫을 내려놓고 피를 물에 담갔다. 이제 서로 인내력을 시험하는 장고에 들어간다. ‘그래, 니가 안 물고 배기는가 보자’ 한참이 지났다. 개구리는 ‘나 잡아봐라’ 하며 왕눈깔을 보여줬다 숨었다를 반복한다.

나긋나긋한 피 낚시를 들어올려 주니 잔잔한 동심원이 그려진다. 더 멀리 넣어보기로 했다. 낚싯대를 드리우듯 툭 던지자마자 손에 뭔가 끌어당기는 힘이 느껴진다.

“야~ 물었다! 물었어.”

크게 소리를 지를 수도 없었다. 속으로 쾌재를 부르고는 잽싸게 한 번을 챘다. 나눠서 두 번을 더 당겨주니 질질 끌려오는 내 추억 속의 개구리. 그 놈이 내 미끼에 걸려든 건 순전히 붉으죽죽 하면서 휘리릭 휘어지는 혓바닥 때문이었다.

더군다나 내 새끼손가락보다 작은 피 이삭 덩어리를 물자 찰싹 달라붙을 수밖에 없는 구조도 한 몫 단단히 했다. 코 있는 낚시 바늘은 아니어도 피 덩어리는 양쪽에서 개구리 입 부위 단단한 근육에 턱 걸리고 만 것이다.

먹이가 들어오자 일시에 닫은 턱이 문제였다. 쏜 살 같이 날아간 화살이 과녁에 박힐 때는 날카로운 부분이 박혔다가도 결코 빠지지 않는 건 반대편 양 날개가 버티고 있음이다. 순순히 끌려올 수밖에 없었다.

피를 1차 드리우고 기다렸습니다.
피를 1차 드리우고 기다렸습니다. ⓒ 김규환
미끈한 개구리를 한 손으로 잡고 소금쟁이 모양을 한 긴 풀 대롱을 뽑아 똥구멍에 쑤셔 박고 바람을 불어 넣어줬다. 별 힘을 못 쓰게 조치를 하고 풀에 끼워 두니 꼼지락꼼지락 움직인다.

풀썩 주저앉아 한 마리를 더 잡으니 시간은 어느새 한 시간을 풀쩍 넘겼다. 좌악 깔린 개구리밥과 물잠자리, 물방개, 소금쟁이가 내 주위를 맴돌며 심심치 않게 했다. 아마 배가 고프지 않았더라면 한 없이 그 자리에 쪼그리고 앉아 있었을 지도 모를 일이다.

개구리와 나, 개구쟁이 나와 개그장이 개구리의 만남은 내 처지에선 늘 즐거웠다. 지금 생각해보면 내 한량 정신은 아마 그 때 이미 갖춰진 건지도 모른다. 풀 한포기가 그립고 지나가는 미물이 동무였던 그 시절은 아름답기만 하다.

다시 나긋나긋하게 피를 물 위에 띄웁니다. 그럼 덥석 물겠지요.
다시 나긋나긋하게 피를 물 위에 띄웁니다. 그럼 덥석 물겠지요. ⓒ 김규환

중부와 남부 산악지대는 벌써 벼가 누렇게 익어가지만 지금 남부 평야지대는 한창 벼꽃이 필 때입니다.
중부와 남부 산악지대는 벌써 벼가 누렇게 익어가지만 지금 남부 평야지대는 한창 벼꽃이 필 때입니다. ⓒ 김규환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김규환은 서울생활을 접고 빨치산의 고장-화순에서 '백아산의 메아리'를 들으며 살고 있습니다. 6, 70년대 고향 이야기와 삶의 뿌리를 캐는 글을 쓰다가 2006년 귀향하고 말았지요. 200가지 산나물을 깊은 산속에 자연 그대로 심어 산나물 천지 <산채원>을 만들고 있답니다.도시 이웃과 나누려 합니다. cafe.daum.net/sanchaewon 클릭!

이 기자의 최신기사역시, 가을엔 추어탕이지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