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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 수교 12주년을 맞는 24일, 외교통상부는 최근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과 관련해 중국측과 5개항의 구두양해에 합의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9시간 30분에 걸친 릴레이 회담을 통해 합의한 구두양해는 모호함의 연속이었다. 합의된 내용을 하나하나 짚어 보면서 그 모호함을 지적해 보려고 한다.
중국, 고구려사 문제가 양국간 중대현안이 된데 유념
최근 중국은 자국 외교부 홈페이지의 한국 소개내용 중 1948년 대한민국 정부수립 전의 내용을 전부 삭제했고, 박준우 외교통상부 아시아태평양 국장이 베이징을 항의 방문했다. 이때 중국은 "고구려사에 대한 한국민의 관심이 이토록 높다는데 놀랐다"는 말을 했다.
중국은 정말 한국인의 관심이 당연히 높을 수 밖에 없음을 짐작하지 못했을까. 아니면, 중국이 하는 일에 가타부타 목소리를 높이는 한국인의 태도가 못마땅함을 표현한 ‘대국(大國)’의 오만일까. ‘고구려사 문제가 양국간 중대현안이 된데 유념’한다는 중국 정부의 이날표현도 같은 맥락에서 모호하다. 도대체 유념했으니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이란 말인가.
역사문제로 한중 우호협력 손상방지-동반자 관계 발전에 노력
중국은 고구려사 왜곡 문제가 불거졌을 때부터 지금까지 줄곧 ‘중앙정부가 개입할 사안이 아니다’, ‘역사문제는 학술적으로 풀어나가자’라는 두가지 주장을 되풀이 해왔다. 이날 구두양해가 그나마 의미있다는 평가를 받는다면 바로 이 두 번째 항목 때문이라 할 수 있겠다. 중국의 표현대로 ‘한국 국민의 높은 관심’을 의식한 한국정부의 항의를 어느 정도 수용했다는 흔적이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흔히 들을 수 있는 외교적 수사일 뿐이라는 걱정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는다.
고구려사 문제의 공정한 해결 도모-정치 문제화 방지
앞의 두 번째 항목이 외교적 수사일지도 모른다는 걱정은 이 항목 때문이다. ‘고구려사 문제의 공정한 해결’이라 함은 학술적 접근을 의미할 것이고, 정치 문제화 방지 역시 중국이 계속 주장해 오던 입장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중국이 말하는 ‘학술적 접근'은 그러나 중국이 동북공정을 시작하며 밝힌 취지문을 볼 때 그 허구성이 극명히 드러난다.
동북공정을 추진하고 있는 중국 사회과학원 변강사지연구중심은 취지문에서 ‘동북변강지역의 안정을 더욱 강화하기 위해 시작한다’며, ‘동북공정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제일 먼저 강화해야 할 것은 정치의식’이라고 분명히 못을 박았던 것이다. 요컨대, 고구려사 문제를 먼저 정치적으로 접근한 것은 중국이라는 말이다.
더 중요한 것은 동북공정에는 고구려사 문제를 현재 중국이 대만, 일본, 러시아 등과 벌이고 있는 영토분쟁과 같은 성격으로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 동북공정의 배경에 대해 여러 가지 분석이 나왔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설득력이 있는 것이 ‘남북 통일 후 예상되는 중국내 조선족들의 동요와 만주지역(중국에서는 동북지방으로 부름)에 대한 분쟁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함이라는 분석이다.
한국의 관심에 이해 표명-필요한 조치로 문제가 복잡해지는 것을 방지
중국은 고구려사에 대한 한국의 관심을 이해하고 있고, 양국은 긴밀하게 협조해야할 관계이니 문제가 복잡해지는 것을 방지하겠다는 것이다. 고구려사 문제가 복잡해진다는 것은 어떤 상황인지, 그 상황을 막기 위해 어떻게 하겠다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다.
물론, 이 문제에 대해 공식적으로 처음 만나 합의한 것인데 어떻게 구체적인 내용까지 언급될 수 있겠느냐는 의견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중국은 한국이 가장 먼저 조치해 줄 것을 요구한 중국 외교부 홈페이지의 고구려 관련 부분 원상복구는 거부했다. 그렇다면 중국이 말한 필요한 조치라는 것이 과연 무엇이고 도대체 언제하겠다는 것일까.
학술교류의 조속한 개최를 통한 해결
학술교류란 중국의 말대로 정치성을 배제한 순수한 학술적 접근이 보장될 때, 문제해결의 실마리를 잡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앞서 언급했듯이 중국은 동북공정을 정치적인 목적에서 시작했다. 그리고, 중앙정부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2002년 2월 28일부터 지금까지 추진해 왔다. 이런 상황에서 과연 순수한 학술적 교류가 가능할까. 어떻게 학문의 순수함을 지킬 수 있을까.
고구려사에 대한 중국의 집요한(?) 관심이 1980년대 후반부터 시작됐다고 하니, 오늘의 논란을 예상하고 미리 발빠르게 대응하지 못한 우리 외교를 탓하기에는 너무 늦은 감이 있다. 대통령의 말대로 학술적으로 풀어야 함도 맞고, 한국과 중국은 물론 세계 여러 나라에 고구려사가 한국사의 일부임을 학술적으로 알려나가야 함도 맞다. 하지만, 그에 앞서 중국의 명확한 입장을 들어야 할 것이다.
누가 '왜곡'이라 말했나
이날 국내의 각종 언론 매체들이 뽑은 제목에는‘왜곡’이란 표현이 빠지지 않았다. 혹시나 다른 표현이 없나 싶어 이곳저곳 뒤졌지만 분명히 ‘왜곡’이라는 표현을 썼다. 그렇다면 중국이 지금까지 고구려사를 왜곡했음을 시인한 것일까라는 의문이 들었다. 그러나 합의된 5개 항은 전혀 아니었다.
우리 외교통상부의 아전인수격 해석으로 왜곡이란 표현을 썼는지 중국이 정확히 그렇게 말했는지는 엄연히 다르다. 말꼬리를 잡고 늘어지는 게 아니라 중국이 '왜곡'이라는 표현을 썼느냐 아니냐가 이날 협상의 핵심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중국이 분명히 '왜곡'이라고 표현했다면 그동안 중국은 고구려사가 한국사의 일부임을 알았지만 정치적인 목적에서 논란을 일으켰다는 말이 되니 이날 합의된 내용은 하나마나한 것이 되지 않겠는가. 중국이 왜곡임을 분명히 밝혔는데 상호 동반발전을 위해 무엇을 해결하고, 무엇에 관해 학술교류를 한단 말인가.
중국은 그냥 홈페이지를 원상복구시키고 한국에 사과하면 된다. 그러나 과연 중국이 중앙정부의 지원 아래 의지를 갖고, 막대한 예산을 들여 추진한 동북공정을 쉽게 ‘없었던 일’로 돌릴 수 있을까.
그렇지 않고, ‘왜곡’이란 표현이 한국의 해석과정에서 나온 것이라면 앞으로 지루한 외교전은 감수해야 할 것 같다. 올해 초부터 불거지기 시작한 한국 외교의 여러 가지 문제점들로 미루어 보아 상당히 힘든 싸움이 될 것 같다. 그리고 내년 가을학기에 사용될 중국의 초중고 역사교과서 개정과정에서 고구려사 왜곡 내용을 싣지 않겠다는 중국의 약속도 그리 기뻐할 것만은 아닌 듯하다.
어휘와 문장 수준은 어렵지 않지만, 절대 해석하기 쉽지 않은 것이 외교적 수사다. 한 외교통상부 관계자는 얼마전 어느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한국측의 항의가 너무 약한 것 아니냐는 국민이 많다’는 사회자의 질문에 ‘외교에 쓰이는 말은 일상언어와 다르다. 약하게 생각될지는 몰라도 외교적으로는 아주 강경한 표현이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이날 중국과 합의된 5개항의 구두양해도 그래서인지 너무 모호해 걱정이 앞선다. 더구나 구두양해는 아무런 법적 구속력을 갖지 못한다고 한다. 구체적인 내용도 없고, 법적인 구속력도 없는 이날의 구두양해, 과연 어떻게 해석하는 것이 맞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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