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서울에서는 청계천 복원사업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21세기 문화 환경도시 서울건설'이라는 의의로 진행하고 있는 이 사업은 시행초기부터 적지 않은 논란이 있었지만 청계천은 머지 않아 새로운 모습으로 태어날 전망이다.
그렇다면 예전의 청계천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박태원의 <천변풍경>에서는 1930년대 청계천을 다시 볼 수 있었다. 신작이 아닌 이미 낡은 소설을 다시 꺼내 읽은 것은 아마도 예전의 청계천 모습을 보고 싶었던 작은 바람이었던 것 같다.
이 작품은 1936년 8월부터 10월, 1937년 1월부터 9월까지 두 차례로 걸쳐 <조광>이라는 잡지에 연재되었던 장편소설이다. 박태원의 <천변풍경>은 어느 해 2월 초부터 다음 해 정월까지 사계절에 걸쳐 청계천 주변의 풍속을 치밀하게 묘사하고 있다. 이 작품은 특정한 주인공도, 중심적인 플롯도 마련되어 있지 않은 장편소설이다.
사실 소설에서 주인공과 플롯은 당연히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이 작품은 이러한 상식에 일침을 가한다. 이렇다 할 플롯이 없는 이 소설의 맨 마지막 장을 닫는 순간 밀려든 감동은 아직도 가슴을 뛰게 한다.
이 작품은 30년대 도시의 모습, 정확히 말해 청계천 주변 중하류층 도시 생활의 풍속과 습관을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다른 작품에서 드러나는, 혹은 쉽게 도출해 낼 수 있는 현실 극복 의지를 이 작품에서 찾아내기란 힘들다.
이것이 이 작품의 큰 특질 중의 하나로 생각되는데, 박태원은 '보여주기'에만 충실하다. 그렇다면, 이 작품에서 보여주기란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쉽게 이 작품에서 보여주기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말하기 전에, 이 작품은 영화에 가까운 소설이다. '영화에 가까운'이란 표현이 적절치 않다면 영화적인 소설이라 말해도 좋다. 이 작품은 다양한 지점에서 찍은 짧은 숏들로 구성되어 있고, 그 숏들이 일정한 순서에 의해 결합된 작품으로 보인다.
이러한 방식을 흔히들 빠른 속도의 '몽타주', 혹은 미국식 몽타주라 부르는데 이 작품은 이러한 점이 단연 돋보인다. 또, 영화와 소설의 차이점에 일침을 가하는 작품이라 생각된다. 필자는 한동안, 혹은 지금까지도 소설이 우수한가, 영화가 우수한가라는 헛된 질문에 빠져있(었)다.
그런데 이 작품에서는 영화에 가까우면서도 영화와는 다른, 그러면서도 일반적인 소설과는 또 다른 맛을 보여주고 있다. 때론 지루한 만연체를, 때론 간결한 묘사를 보여준다.
또, 청계천 주변의 세계를 어떻게 보여주느냐라는 물음의 중심에 영화 제작의 카메라, 아니 박태원의 시각이 있는 듯하다. 자유자재로 움직이며, 마치 한 편의 파노라마 영화를 보여주는 듯한 이 작품에는 실제 영화적 기법이 차용되어 있는 듯하다.
이 작품이 일정한 플롯 없이 작품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은 소시민들의 일상성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우리의 삶이 어떠한 규칙이나 순환구조를 띄지 않으면서도, 부딪히고 때론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는 것이라 할 때 이 작품은 이러한 삶의 일상성을 잘 묘사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그저 불규칙한 삶의 모습이 아니라 보다 큰 틀에서 새로운 계절이며, 같은 계절로 돌아오는 시간의 반복성을 통해 청계천변의 변함없는 삶을 묘사해 내고 있다.
2004년의 서울은 청계천 복원사업이 한창 진행 중이다. 설계도에 나와 있는 청계천 복원도와 1930년대의 박태준의 소설 속의 청계천이 얼마나 닮아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당시의 삶과 지금의 우리 삶에는 차이가 크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가장 큰 차이가 당시의 여성들과 지금의 여성들의 삶이라 할 수 있는데, 이 작품에는 여성들이 모진 수모를 당하고 있는 모습이 생생히 드러나 있다. 아마도 일제치하라는 특수한 역사적 상황과 봉건의 시대에서 현대로 옮아가는 근대라는 특수한 시간적 상황에서 수모를 당했던 여성들의 문제를 잘 드러내고 있다.
아마도 제목에 드러난 천변, 청계천변의 지리적 상황 또한 이러한 봉건시대와 현대의 중간지대를 의미하며, 그러한 중간지대에 박태원의 소설이 서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본다.
| | 소설가 박태원은 누구인가? | | | 한국전쟁 당시 월북한 작가 중 한 명 | | | | 1909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경성제일고보를 거쳐, 도쿄 호세이대학에서 수학하였다.
1926년 <누님>이라는 시로 문단에 들어섰으나, 본격적인 작품 활동은 그의 소설 등단작인 <수염>을 발표하면서 부터이다.
1933년 구인회에 가담한 이후 반계몽, 반계급주의문학의 입장에 서서 세태풍속을 착실하게 묘사한 <소설가 구보씨의 1일> <천변풍경> 등을 발표함으로써 작가로서의 위치를 굳혔다.
1930년대 잠시 친일행각을 했던 것으로 알려져있고, 해방 후 민족문학의 모색이란 시대적 요청에 맞게 역사소설과 전기문학에 힘썼다.
한국전쟁 중 동료작가의 권유로 월북했고, 월북직후 북한 국립고전예술극장의 전속작가, 평양전문대학의 교수를 역임했다. 북한 최고의 역사소설로 불리는 3부작 <갑오농민전쟁> 등의 역사소설을 집필했으며, 1984년 7월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 박성필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