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2004년 8월 대관령에서
2004년 8월 대관령에서 ⓒ 김환희
회사에 출근을 하여 제일 먼저 하는 일, 컴퓨터를 켜고 밤새 수신되어진 이메일을 확인하는 것이다. 사실 대부분의 이메일이 스팸 메일인지 알면서도 혹시나 하는 기대감으로 메일을 확인해 본다. 가끔은 잊고 있었던 친구로부터 편지를 받고 나면 왠지 기분이 좋아지기도 한다.

하루에 10통 이상이나 되는 이메일 중에 2통 정도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이메일은 읽혀지지도 않은 채 휴지통으로 버려지게 마련이다. 그런데 가끔은 이메일이 깜박 잊고 그냥 지나칠 뻔한 행사를 상기시켜 줄 때가 있다. 그런데 오늘 아침. 이메일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그것을 경험하게 되었다.

"두 분의 결혼 16주년을 축하합니다."

모 보험회사에서부터 날아 온 축하메시지를 받는 순간, 부지불식중에 나의 시선은 책상 위에 놓인 달력 쪽으로 향했다. 달력 위 7월 14일에는 빨간 펜으로 '○○와 ○○이가 백년가약을 맺은 날'이라는 문구가 하트 모양과 함께 적혀 있었다. 매년 아내로부터 결혼기념일도 모르는 무심한 남편이라고 호되게 핀잔을 들었던 나는 올해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결혼기념일만큼은 꼭 기억하겠노라고 다짐을 해두었다. 그래서 신년 초, 회사 책상 위 탁상 달력에 제일 먼저 적어놓은 행사가 바로 결혼기념일이었다.

그리고 문득 아침의 일이 떠올려졌다. 정신없이 아이들 챙기기에 분주하기만 한 아내, 잠에 쫓겨 넥타이조차 제대로 매지 못하고 출근한 나, 그리고 학교 갈 준비물을 챙기기에 바쁜 두 아이들, 우리 가족에게 있어서 하루의 시작은 일사불란하기만 하다. 미루어 짐작하건대, 아내가 오늘이 무슨 날인지를 모르고 있음이 분명했다.

매번 중요한 행사가 있을 때마다 아내는 하루 전에 나에게 알려주는 여유까지 보이기도 했었다. 결혼하여 지금까지 한번도 내 자신이 먼저 행사를 아내에게 말해 준 적이 없었다. 만약 오늘이 무슨 날인지를 아내가 알고 있었다면 분명히 아내는 먼저 다음과 같이 말을 했을는지도 모른다.

"여보! 오늘이 무슨 날인지 알죠? 기대하겠어요."

지금까지는 비록 아내가 먼저 말해주어서 알게 된 결혼기념일이었지만, 나름대로 작지만 추억이 될 만한 선물을 준비하여 아내의 환심을 사기도 했다. 내심 올해는 아내로부터 점수를 딸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무엇보다도 집에 가서 아내에게 큰 소리 좀 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니 왠지 기분이 좋아졌다. 우선 아내의 기선을 제압하기 위해 처음으로 멋쩍은 내용의 문자 메시지를 보내기로 하였다.

"여보, 우리의 결혼기념일을 축하하오. 당신을 만나서 행복하오."

문자메시지를 보내고 난 뒤, 잠시 후에 아내로부터 답장이 왔다.

"결혼기념일을 기억 못해서 미안해요. 저도 당신을 만나서 행복해요."

결혼 16년만에 아내로부터 '결혼기념일'을 잊어 미안하다는 말을 처음으로 듣는 순간이었다. 아내의 문자메시지를 읽고 난 뒤, 왠지 기분이 더 좋아지기 시작했다.

퇴근길, 제과점에 들러 주머니에 있는 돈 모두를 털어 샴페인 한 병과 케이크 하나를 사서 집에 도착하니, 아내는 부재중이었고 막내 녀석만 자기 방에서 숙제를 하면서 집을 지키고 있었다. 더욱이 나를 더 화나게 만든 것은 싱크대에 수북이 쌓여 있는 그릇들이었다. 내심 그래도 오늘이 '결혼기념일'인데 아내가 기념파티라도 준비했으리라고 생각했던 내 기대가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오히려 집안 분위기는 썰렁하기까지 했다.

숙제를 다 하고 난 뒤, 막내 녀석이 말없이 다가와 나를 떠밀며 안방에서 나오지 말라며 신신당부를 하는 것이었다. 나는 기분이 꿀꿀해서 낮잠이나 자야겠다는 요량으로 침대에 벌렁 누워 잠을 청했다.

아들의 결혼기념일 선물

잠을 얼마나 잤을까? 밖에서 '쨍그랑'하는 소리에 잠이 깨었다. 깜짝 놀라 밖으로 나가보니 막내 녀석이 땀을 뻘뻘 흘리면서 깨어진 접시를 주워 담고 있었다.

"어떻게 된 일이니? 다치지는 않았니?"

막내 놈은 울먹이는 목소리로 대답을 했다.

"아∼빠, 죄송해요. 갑자기 접시가 미끄러져서…."
"누가 설거지하라고 그랬니? 엄마가 시켰니?"

막내 녀석은 내가 한마디의 꾸중이라도 하면 금방이라도 울 듯, 겁먹은 표정을 지으면서 내 눈치를 살폈다.

"사실은∼요. 오늘이 엄마, 아빠 결혼기념일이어서 선물 살 돈도 없고 해서 고민을 하다가 설거지라도 하려고 그랬는데…, 그만…."

아들의 말을 듣고 난 뒤, 나는 한참동안 막내 녀석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우리 부부가 생각하지도 못했던 일을 아들은 행동으로 옮긴 것이었다. 아들과 함께 깨어진 접시 조각들을 치우면서 곁눈질로 아들의 표정을 살폈다. 우연히 나와 눈이 마주친 아들놈은 나를 보자 머리를 만지작거리며 피식하고 웃음을 던졌다. 그 모습이 어찌나 앙증스러운지 나도 모르게 그놈을 와락 안아 주었다. 얼떨결에 당한 나의 포옹에 아들은 영문도 모르는 채, 아무런 반응을 나타내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 덩치 큰 놈을 힘을 다해 안아주며 말을 했다.

"이놈, 언제 이렇게 컸어. 무거워서 들지도 못하겠네."

우리 부부의 '결혼기념일'이라며 선물로 설거지를 해 줄 생각을 한 막내 녀석이 오늘처럼 이뻐 보인 적은 없었다. 나는 고무장갑을 끼고 남아 있는 그릇들을 씻었다. 옆에서 아들 또한 마음이 놓였는지 최신 유행가를 부르면서 씻어놓은 그릇들을 헹구었다. 그리고 한편으로 나만 알고 있으리라 생각했던 결혼기념일을 이 녀석이 어떻게 알고 있는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나는 엉덩이로 옆에서 설거지를 거들고 있는 아들놈을 툭 치면서 말을 건넸다.

"그런데, 오늘이 '결혼기념일'이라는 사실을 어떻게 알았니? 엄마가 얘기해 줬니?"

아들은 내 말에 대답할 생각은 하지 않고 연실 웃기만 하였다. 아마도 자기 나름대로 멋있는 말을 만들어내려고 궁리를 하는 것 같았다.

"왜 대답은 않고 웃기만 하니?"

그제야 생각이 났는지 헛기침을 하면서 말을 했다.

"음. 으∼음, 자식으로서 당연히 알아야 되는 것 아닙니까?"

나는 어이가 없어 처음에는 그 말에 무슨 말을 해야할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어∼허, 이 놈 보게. 못하는 말이 없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요즘 아이들이 부모 알기를 우습게 아는데 비해 그래도 이 녀석은 부모에게 관심이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후한 점수를 주고 싶었다.

설거지를 마칠 무렵, 밖에서 초인종 소리가 났다. 아내가 볼일을 보고 돌아온 모양이었다. 아내의 양손에 쥐어진 장바구니에는 파티를 준비하려고 하는 듯 형형색색의 물건들이 비추어지기도 하였고 삐져나오기도 하였다. 내심 화가 난 표정으로 아내에게 싫은 내색을 지으려고 하는 순간이었다.

"여보, 제가 좀 늦었죠? 시장하시죠? 잠깐만 기다리세요."

아내는 들고 있던 장바구니를 식탁 위에 내려놓으면서 애교를 떨며 말을 했다. 아내의 애교 섞인 말에 결국 난 한마디의 말도 못하고 말았다.

"그런데 설거지는…?"

내가 대답을 하기 전에 막내 녀석이 먼저 끼어들었다.

"엄마! 아빠하고 내가 설거지 다했어. 그리고 오늘 내가 한 설거지는 엄마, 아빠의 결혼기념 선물이야."

아내는 아들의 말이 믿어지지가 않는 듯 나에게 재차 물어 보았다.

"설마, 정말이에요? 여보."

나는 퉁명스럽게 아내의 말에 대답을 하였다.

"그럼 우리 아들이 거짓말이라도 한단 말이오."
"그게 아니라 평소에 하지 않던 짓을 해서……."

나는 아들이 한 행동을 더 추켜세우며 말을 했다.

"내 지금까지 이런 선물 받아 본 적이 없소. 이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가 없소."

옆에서 우리 부부가 주고받는 말을 빠짐없이 듣고 있던 아들놈이 팔 장을 낀 채로 양어깨를 으쓱거리며 말을 했다.

"에이, 거짓말. 저번에는 누나가 사 준 선물이 최고라고 해놓고서는……."

아내가 모르게 아들을 보며 슬쩍 윙크를 하였다. 아들은 이제야 내 말뜻을 이해했는지 입을 막고 키득거리기 시작하였다.

'아빠! 힘내세요'

아내는 파티를 준비라도 할 듯 시계를 바라보면서 분주하게 손을 움직였다. 식탁 한가운데 케이크를 놓고 과자류와 야채와 과일로 만든 샐러드 등으로 그 주위를 장식하였다. 잠시 후 조촐하지만 그럴 듯한 식탁이 차려졌다. 그리고 벽에 걸린 시계를 보면서 아내는 말을 했다.

"이제 우리 딸만 오면 되겠네."

밤 10시. 중학교 1학년인 딸이 오늘이 결혼기념일이라는 사실을 어떻게 알았는지 카네이션 두 송이를 들고 학원에서 돌아왔다. 딸은 가방을 멘 채로 우리 부부의 가슴에 카네이션을 달아주었다.

"엄마, 아빠! 결혼기념일 축하해요. 그리고 아빠! 힘내세요."

딸의 축하의 메시지가 끝나자, 아내는 케이크 위의 양초에 불을 밝히고 난 후, 거실의 불을 껐다. 아침에 그렇게 분주했던 것과는 정반대의 상황이 연출되어지고 있었다. 희미한 불빛 사이로 우리 가족 4명의 행복한 얼굴이 비추어졌다. 어느 순간, 내 마음 한편에는 '행복'이라는 두 글자가 새겨지고 있었다. 우리 부부는 아이들의 구령에 맞추어 촛불을 껐다. 그리고 나는 행복의 샴페인을 터뜨렸다.

그날 밤, 나는 이 모든 것이 아내의 생각에서 나온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요즘 회사 일로 힘들어하는 나를 위해 며칠 전에 아내는 결혼기념일을 앞두고 아이들에게 나를 기쁘게 해줄 수 있는 일 한가지씩을 생각해 보고 실천으로 옮겨보라는 과제를 내 주었다고 했다.

그 과제명도 그럴 듯했다. '아빠! 힘내세요.' 그리고 결혼기념일까지 모든 것을 비밀로 하라고 했다는 것이었다. 이제야 딸이 등교를 버스로 하겠다고 고집을 부린 이유, 아내가 결혼기념일을 알면서도 모른 체 한 이유, 그리고 막내 녀석이 내 질문에 미소만 지은 이유 등이 모두 나를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순간 내가 힘이 들 때, 가족은 희망과 용기를 북돋워주는 존재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내일 아침에도 우리 가족은 오늘과 똑같은 전쟁을 치르게 될 지도 모른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한 가정의 행복은 개인에 의해서가 아니라 가족 구성원 개개인의 노력에 의해서 만들어진다는 사실이다. 오늘 '결혼기념일'을 통해 나는 가족의 소중함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