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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옷을 차근차근 벗겨 나갔다. 피에 절은 옷을 벗기기란 정말 어려운 일이다. 더구나 처녀가 외간 남자의 옷을 벗긴다는 일은 더 더욱 어려운 일이다. 상의를 모두 벗기고 찢은 속치마로 천천히 피를 닦아 나갔다. 상처는 의외로 깊었다. 이런 상처를 가지고 두시진 이상 산길을 오른다는 것은 자살행위다.
송하령은 탄식을 내뿜었다. 미련한 사람이다. 앞뒤가 꽉 막히지 않고서 이런 행동을 하지 못한다. 모두가 그녀 탓이라 생각하니 가슴이 저며왔다. 그녀는 핏자국을 모두 씻어낸 다음 품 속에서 금창약을 꺼내 상처에 바르기 시작했다.
그녀는 그의 하의마저 모두 벗기고 똑같이 처치했다. 찬물로 전신을 연신 닦아 내는데도 열은 내리지 않는다. 내상도 심각하다는 증거다.
그녀는 몇 번을 동굴과 샘을 왕복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그의 벗겨놓은 옷까지도 샘물에 빨았다.
흔적이 남는다고 해도 어쩔 수 없었다. 그녀는 자청처럼 흔적을 없애는 법을 모르기 때문이었다. 흘러가는 물에는 얼마 안가 흔적이 사라진다. 샘 근처에 남은 흔적이 문제였으므로 그녀는 주위의 흙을 이용해 덮고 난 후 나뭇가지로 살짝 쓸었다.
추적의 전문가는 아마 이런 흔적이라도 놓치지 않을 것이다. 그녀는 다시 동굴로 들어와 그의 상태를 진맥했다. 잠깐 맛본 의술로는 그의 상태를 정확히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심각한 상태이고 내상이 생각보다 심하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심한 상처가 있는 곳은 속치마를 더 찢어 꼼꼼하게 동여 매었다. 그리고 그녀는 아직 젖어있는 옷을 입히기 시작했다. 그에게 옷을 모두 입히고 난 다음에 그녀는 그를 조용히 지켜 보았다.
호흡은 불규칙했고, 열 때문인지 온몸이 벌겋게 달아 올랐다.
“하---아---!”
그녀는 다시 탄식했다. 자청을 지켜보는 그녀의 눈은 쉴새없는 갈등을 일으키고 있었다. 지금 현재의 상태는 주화입마(走火入魔)에 빠지지는 않았더라도 기력이 완전하게 소진된 상태다.
그가 지금까지 버틴 것은 강인한 정신력 때문이었다. 지금 그대로 놔둔다면 그는 일신의 내공을 모두 잃을 수도 있고, 최악의 경우 이런 상태로 깨어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녀는 결정을 해야 했다. 그것은 그녀를 비롯한 그의 친족과 그녀가 아는 몇몇 사람들의 생명을 위험에 빠뜨릴 수도 있었다. 그녀는 자청을 모른다. 십여일 동안 그녀의 시선은 그에게 가 있었지만 그에 대해 아는 것이라곤 본명인지 아닌지 알 수도 없는 자청이란 이름 뿐이다.
그리고 그녀를 위해 자신의 진면목을 보이며 혈투를 벌였다는 것.(그는 나를 위해 이 지경이 되었어) 신분을 모르는 사람에게 자신을 내보일 수 있는 일이었다. 그녀가 망설이는 것은 그녀의 목숨이 아니라 그녀 주위의 생명까지 담보로 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그를 알던 모르던 그녀는 이미 그를 믿고 있었다. 그녀의 손은 어느새 품 속에서 조그만 목합을 꺼내게 하고 있었다(소림(少林)의 대환단(大丸丹)을 능가한다는 귀진환(鬼珍丸)이지만 복용 후에 알아볼 사람은 많지 않을거야. 다만 이 사람이 자신이 복용한 것이 귀진환이라고 알게 된다면…).
자기자신을 합리화 시키기는 했지만 문제가 된다. 송하령이 지금까지 숨기고 있던 또 다른 신분이 드러날 수가 있다. 그것으로 인하여 그녀는 물론 그녀 주위의 소중한 사람들이 위험해질 수 있는 것이다.(그래도 할 수 없어) 그녀는 목갑 안에서 밀랍에 쌓인 단약을 꺼내 조심스럽게 밀랍을 벗겨냈다.
금가루를 입힌 조그만 금환(金丸)이 모습을 드러내자 자신의 입으로 가져갔다. 향긋한 향기가 동굴 안을 가득 채웠다. 향기만으로도 능히 그 효능을 짐작케하는 기사회생의 영약임을 알 수 있게 하였다.
그녀는 잠시 얼굴을 붉히며 자신의 입술을 자청의 입으로 가져갔다.
혼절해 모른다고는 하나 처녀의 몸으로 할 수 있는 행동은 아니었다.
그녀는 혀로 그의 입을 벌리고 자신의 침으로 녹인 귀진환을 조금씩 넣어 주었다.
기도가 막히지 않게 조심하면서 천돌혈(天突穴)을 조금씩 자극하니 그의 목으로 넘어가는 듯 했다. 마지막까지 조심스럽게 일(?)을 마친 그녀는 자청을 바라 보았다.
약효가 퍼져 작용을 하려면 두시진 정도가 있어야 한다. 이제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단지 무엇인가를 향해 기원하는 일 밖에는…. 그녀는 조용히 눈을 감고 간절히 빌었다.
하늘이여! 이 사람을 살려 주소서…. 그녀는 이미 이 사내를 사랑하게 되었음을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왜 이리 되었는지는 몰랐다.
굳이 이유를 붙이자면 그의 기질이 그녀의 큰오빠를 닮았기 때문이다.
표사들 속에서 그를 처음 본 순간부터 그녀는 살아있다는 것이 거추장스럽다고 생각하는 상처 입은 영혼들만이 가질 수 있는 아픔을 공유할 수 있었다.
문무(文武)를 겸비하고 어려서부터 지혜가 뛰어나 장래가 촉망되던 큰오빠. 할아버지 송렴(宋濂)을 능가할 대학자요, 관료(官僚)가 되리라고 가문의 기대를 모았던 사람이었다.
십육세에 향시(鄕試)에 합격하고 거인(擧人)이 된 그는 그 다음해에 경사(京師)에서 시행하는 회시(會試)에 능히 합격하리라던 예상을 벗어나 낙방의 고배를 마셨다.
예부(禮部)에서 시행하는 회시에 합격하면 진사(進士)가 되고, 황제 앞에서 시험을 보는 전시(殿試)에 응시할 수 있다. 떨어진 이유를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연속해서 두 번에 걸쳐 더 떨어진 이후에 그는 붓을 꺾었다.
이유는 한 가지였다. 송가의 적손이었던 송신(宋愼) 때문이었다. 홍무 13년에 일만오천명이 연루되어 죽어 나갔다는 호유용(胡惟庸)의 모반사건에 가담했다고도 하며, 또는 황실을 모욕하는 중대한 죄를 지었다고 알려져 있는 송신으로 인하여 송렴의 장손 집안이 몰살당하였고, 송렴 자신도 귀양을 가게 되었던 그 사건 때문이었다.
송렴의 청렴과 대명에 대한 그간의 공헌이 없었다면 지금쯤 송가는 구족(九族)이 멸하여져 강남송가는 아예 없어졌을 것이었다. 대명 초기부터 영락제와 와서도 명황실의 제사(祭祀)나 조회(朝會), 조유(詔諭) 등의 의식에서 쓰이는 문장이 송렴의 문장이었으니만큼 명 태조도 대명 건국의 기틀을 잡는데 지대한 공헌을 한 송렴은 물론 그 일가족까지 멸족시키지는 못한 것이었다.
그 이후 큰오빠는 미쳐가는 듯 했다. 그리고 이년 만에 기행(奇行)과 괴벽(怪癖)을 버린 그의 모습은 세상을 조롱하는 듯한 냉소와 음울함 뿐이었다. 몰락한 가문의 후손이란 점이 그의 날개를 무참히 꺾어버린 것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나이 차이가 십년이나 더 되는 큰오빠를 항상 안타깝게 바라 보았다. 유일하게 큰오빠가 다정스런 모습을 보이는 것은 송하령 자신 뿐이었다. 그리고 그 큰오빠로 인하여 그녀는 자신이 할 일이 무엇인지 누구보다 잘 알게 되었다.
그 일을 위해 그녀는 또 다른 신분을 가지게 되었고, 귀진환은 바로 그녀의 사부가 준 몇가지 물건 중 가장 귀중한 것이었다. 또한 그녀가 철들기 전 윗대 어른들이 약속했던 그녀의 정혼(定婚)이 삼년전 상대방 가문의 일방적인 통보로 파혼(破婚)이 되었을 때도 그녀는 오히려 잘 되었다고 생각했다.
대학유(大學儒)인 송렴의 가문이 이대로 몰락하면 안 되었다. 그녀는 그래서 집안 누구도 하지 못하는 일을 하고자 했다. 이번 일도 그녀는 반드시 해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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