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이런 미술관 관람 규칙 제1조를 깨뜨리고 '예, 당신은 미술작품을 만질 수 있습니다!'라고 주장하면서 시각장애인들에게 문을 활짝 열어놓은 전시회가 열려서 화제가 되고 있다.
지난 8월 7일부터 2주 동안 뉴질랜드의 오클랜드 파쿠랑아(Pakuraga)에 있는 ‘테 투이-더 마크(te tui-the mark)’ 미술관에서 개최된 사진전 <보는 것 이상으로(More than Looking)>가 바로 그 화제의 전시회.
겉에서 힐끗 보기에는 뉴질랜드의 도시와 농촌의 풍경을 찍은 사진 11장을 대형 크기로 인화해서 전시하고 있는 평범한 사진 전시회처럼 보이지만, 가까이 다가가서 보면 그게 아니라는 것을 금방 알아차릴 수 있다.
전시중인 사진작품들 위에 유리판을 덧댄 후, 그 유리판 위에 사진 속 피사체 윤곽선을 따라 유리 가루를 녹여 등고선처럼 '돋을 새김'을 넣어서 시각장애인들도 손으로 직접 만지면서 사진을 감상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이 전시회의 개막식에 특별히 초청 받은 시각장애인 여성 줄리 우즈-댈러웨이는 이 전시회를 감상한 후에 그 소감을 다음과 같이 <뉴질랜드 헤럴드> 지에 밝혔다.
“지금까지 한번도 미술관에 가 본 적이 없었는데, 만지지 말라고 하는 대신에 만져 보라고 주문하는 미술관에 오게 되니 너무 좋아요.”
또한 ‘시각장애인을 위한 호마이 국립학교(Homai Natioanl School for the Blind and Vision Impaired)’에 다니는 학생들을 직접 인솔해서 전시장을 찾은 린드세이 데이비 교감도 이 전시회의 아이디어를 적극 환영했다.
“시각장애인들이 쉽게 상상하기 어려운 것들, 이를테면 수평선이나 나무 우듬지와 같은 것들을 이해할 수 있는 아이디어를 가져다주는 전시회로군요. 학생들에게는 새로운 경험이 될 것입니다.”
오클랜드의 젊은 사진작가 글렌 히난(28)이 뉴질랜드에서 한 번도 시도된 적이 없는 이러한 새로운 전시회를 개최하게 된 배경에는 그의 개인적인 가족사가 자리 잡고 있다.
그가 사랑했던 할머니께서 생애의 후반부에 시력을 상실해 큰 불편을 겪는 것을 옆에서 지켜본 경험이 시각장애인도 감상할 수 있는 이번 전시회를 개최하게 된 가장 큰 동기가 된 것이다.
“나는 그저 또 하나의 평범한 사진전을 여는 것은 원하지 않았다. 그 대신에 나는 미술계로부터 소외되어 있는 많은 사람들까지도 와서 미술작품을 경험할 수 있는 그런 상호작용적인 전시회를 개최하는 것을 목표로 세웠다. 나는 현 미술계에서는 한 번도 추구된 적이 없는 방식으로, 몇몇 다이내믹한 매체들이 서로 결합하기를 원했다.”
전시 안내판에 소개된 그의 말처럼 이 사진전에는 매체들의 새로운 결합도 돋보이는데, 그것은 사진과 시의 만남이다. 18개월 전 이번 전시회를 기획하면서 그는 뉴질랜드의 주요 시인들을 찾아다니면서 이번 전시회에 선보일 11장의 사진을 그들에게 보여주고 그 사진이 담고 있는 풍경을 묘사하는 시로 써달라고 부탁했다.
시인들은 기꺼이 그의 부탁을 들어주었는데, 그 중 케리 훌메, 루쓰 댈러스, 마이클 레곳과 같은 시인들은 실제로 시력이 점차 상실되어 곤란을 겪고 있던 터여서, 그들의 시에는 자신들의 경험도 함께 녹아든 진심이 담겨 있다.
글렌 히난은 그렇게 얻은 시들을 맹인재단의 도움을 얻어 점자로도 번역해서 사진 작품 옆에 함께 전시했다. 시각장애인들의 손끝이 아무리 예민하다고 해도 카메라로 포착한 풍경의 세부를 단순히 손끝으로 더듬는 것만으로는 느끼고 이해하는데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진 작품 옆에 점자로도 인쇄하여 부착한 시들은, 이들이 상상력을 통하여 더욱 넓고 깊게 작품을 감상할 수 있게 하는 보조 수단으로서 매우 효과적인 매체라 하겠다.
글렌 히난은 오클랜드에서의 이번 전시회를 마치고 나면, 이 작품들을 가지고 뉴질랜드 전역을 도는 순회 전시회를 계획하고 있다. 또한 그는 사진과 시와 점자가 함께 인쇄되어 맹인들과 시각장애인들도 볼 수 있는 책의 출판도 계획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