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세상의 속도에 어지럼증을 느낄 때가 있다. 익숙하고 정든 것들은 점차 사라지고 새로운 것들이 쉴 새 없이 그 공백을 메운다. 최신형 디지털 기기의 다양한 기능들을 만날 때는 새롭다는 느낌보다는 서운하다는 느낌이 앞선다.
그런 변화들에 묻어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 소통하는 방식도 변하고 있다. 갈수록 얕고 단조로워지는 관계들이 늘 안타깝다. 그래서 더 혹독했던 여름이다.
일에 치여 휴가도 가지 못했다. 가을이 오기 전에 꼭 선암사에 다녀와야지 생각했다. 딱히 이유랄 건 없지만 사진 속에서만 보던 오래된 돌다리, 승선교를 직접 보고 싶었다. 초록색 숲 속에 걸려 있는 승선교의 모습이 오래 전부터 마음 속에 있었다. 왠지 세상 다 변해도 그 다리는 오래도록 그대로일 것 같아서 그랬는지….
선암사는 순천 시내에서 북서쪽으로 내가 생각했던 곳보다 좀더 외곽에 자리하고 있었다. 고속버스터미널에 내려 한참을 기다렸다가 1번 시내버스를 타고 선암사로 향했다.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 차창 밖으로 흘러가는 풍경이 참 고스란하다. 이름에 순할 '順'자와 하늘 '天'자를 쓰는 동네는 어떤 곳일까 궁금했는데, 잘 어울리는 이름인 것 같다.
승주읍을 지나 작은 계곡을 끼고 잠시 달리자 선암사가 있는 조계산 입구에 닿았다. 여느 관광지들처럼 정신 없지도 않고 소박한 모습이 얌전했다. 너른 주차장을 지나고, 매표소를 지나 숲 속으로 들어서자 삼림욕장에 들어선 기분이 들었다. 폭신한 느낌을 주는 흙길, 계곡의 물소리, 건강한 나무들 속에서 금세 마음이 느긋해졌다.
그렇게 거닐 듯 오르니 고풍스런 돌다리, 승선교가 나타났다. 계곡 양쪽의 흙길을 잇고 있는 돌다리는 아래쪽에 하나, 일주문 바로 앞쪽에 하나, 모두 두 개가 있었다. 두 개인지는 몰랐는데, 아래쪽 것은 좀 작고 오래 되었고, 위쪽의 것은 규모가 제법 있었다. 큰 승선교는 태풍 '매미' 때문에 무너져 다시 쌓았다고 한다. 아직 세월의 흔적은 없어도 단아한 자연미가 느껴졌다.
사람의 손이 닿았지만 인공물을 전혀 사용하지 않고 화강암만으로 쌓아 만든 아치형 다리가 참 고왔다. 시간의 무게 때문인지 아래쪽 다리에 더 정이 갔다. 신라시대부터 지금까지 저 다리가 기억하고 있는 시간은 무엇일지, 잠시 아득해졌다. 작은 승선교와 큰 승선교 사이 왼쪽 길가에는 무너진 승선교의 화강암 덩이 몇 개를 전시해 놓았는데, 그 사이로 노란색 상사화가 몇 송이 피어 있었다.
일주문을 지나면서 길이 더 고즈넉해졌다. 오래된 나무들도 많고, 깊은 숲 속의 느낌이 마음을 풀어놓게 했다. 선암사 가까운 곳에 작은 연못도 하나 있었는데, 알 모양의 연못 안에 작은 섬을 만든 독특한 양식이라고 한다. 이름이 삼인당이다.
삼인(三印)은 제행무상, 제법무아, 열반적정의 삼법인을 뜻하는 이름으로, '모든 것은 변하여 머무른 것이 없고 나라고 할 만한 것도 없으므로 이를 알면 열반에 들어간다'라는 뜻이라고 한다. 그걸 읽으면서 마음 깊은 곳이 쿡 찔렸다. 변해가는 게 많아서 마음이 어지러운데, 모든 것은 변하여 머무른 것이 없다니. 이제 그만 받아들이라, 고 조용히 꾸짖는 것 같았다.
선암사는 여느 사찰들보다 아담했다. 낮은 담들이 많았고, 분홍빛 상사화들이 곳곳에 피어 있었다. 작고 오래된 여러 채의 건물들은 오밀조밀하게 자리잡고 있었는데, 그 뒤로 안개에 휩싸인 조계산이 가파르게 버티고 서 있었다. 경내 한 편이 공사 중이어서 좀 부산스러웠지만 담장 하나, 문짝 하나, 곳곳에서 시간이 느껴졌다.
시야가 확 트이지도 않았고, 널찍 널찍하지 않아서 그런가 기분 좋은 고립감도 느껴졌다. 머물 수 있는 만큼 오래 머물고, 최대한 천천히 걸으며 돌아 내려왔다. 언젠가 내가 아는 것과 인정하는 것과 마음으로 깨닫는 것이 같아질 날이 오겠지 생각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