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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5 장 재생(再生)
그의 부모는 무엇이 억울한지 두 눈을 감지 못하고 죽었다. 도움을 받아 뒷산에 묘를 만들면서도 그는 부모의 부릅뜬 두 눈을 잊지 못했다. 아홉 살 이후 그의 삶은 오직 부모의 두 눈을 편안히 감겨드려야 한다는 생각 뿐이었다.
× × ×
그는 혼절 후 하루하고도 반나절이 지나서 의식을 찾기 시작했다. 그가 처음 본 것은 충혈된 그녀의 두 눈이었다. 바싹 말라 껍질이 벗겨지는 그녀의 입술과 초췌해진 그녀의 얼굴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얼굴에 떠오르는 미소. 그녀는 아름다웠다. 지금 이 순간 그 무엇보다 그녀는 아름다웠다. 코끝에 느껴지는 그녀의 숨결마저도 감미롭게 느껴졌다.
“내가.....오래 되었소?”
자신이 혼절한 지 얼마나 되었느냐는 물음일게다. 그의 말에 그녀는 그의 얼굴 가까이 있다가 황급히 뒤로 물러나며 얼굴을 붉혔다.
“하루하고도 반나절 정도인 것 같아요.”
그녀는 속삭이듯 대답했다.
(오래 되었지요. 하령의 마음이 모두 타 재가 되어 버릴만큼 오래되었지요. 혹시 깨어나지는 못할까, 잘못된 것은 아닐까. 하령은 울고 또 울었지요)
그녀는 차마 속내를 말하지 못했다. 귀진환을 먹이면 두세시진 정도 후에는 의식을 차렸어야 한다. 헌데도 그는 의식이 돌아오지 않았다. 그녀는 자책과 함께 안절부절 했었다. 수없이 교차되는 불안한 마음과 안타까움이 그녀에게 하루가 열흘처럼 느껴지게 할 만큼 힘든 시간이 되었다.
그는 몸을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다행이오.”
무엇이 다행이라는 말일까? 자신이 죽지 않았다는 것이 다행이라는 말인지, 아니면 자신이 번 이틀이라는 기간을 넘지 않고 깨어나서 다행이라는 말인지 알 수는 없었다. 그러다가 문득 그는 자신의 몸에 일어난 변화를 알기 시작했다. 피에 절었던 옷은 대충 핏자국이 사라져 있었고, 그의 상처는 천으로 감겨있었다.
그리고 막혔던 유문혈과 거궐혈의 진기흐름이 자연스러워져 있었다. 자신이 아는 한 자신의 내상과 외상은 하루반나절에 치료될 것이 아니다. 최소한 한 두달은 조식을 계속하고 체력을 회복해야 겨우 회복될까말까 한 상황이었다.
“........”
침을 삼키자 향긋한 내음이 입안을 맴돌았다. 그는 사태를 깨닫고 있었다. 이곳에 송하령 외에는 아무도 없으니 그녀가 조치를 취했을 것이다. 그녀는 자신의 옷을 벗기고 금창약을 바르고 상처를 치료했을 것이다. 지혈을 위하여 천으로 상처부위를 감쌌을 것이다.
옷을 빨고 입혔을 것이고, 그녀는 소중한 그 무엇인가를 자신에게 먹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이 혼절해 있던 하루 반나절 동안 잠시도 쉬지도 못하고 자신을 돌보았을 것이다. 마음고생도 많이 했을 것이다.
그래서 저렇듯 입술이 메마르고 두 눈자위는 쾡하니 들어갔을 것이다. 이러한 일들을 입으로 묻는다는 것은 바보나 할 일이다.
“고맙소!”
자청은 무엇인가 말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기껏 하는 소리가 그것 뿐이었다. 그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자신이 말주변이 없는 것에 대해 한탄했다. 이런 때에 좀더 마음을 담아 고맙다는 표현을 하지 못하는 자신이 답답했다.
하지만 어떤 때에는 화려한 미사어구보다 단순하고 간단한 말이 적당한 때가 있다. 단지 그 말뿐인데도 송하령의 얼굴은 더욱 붉게 물들어 갔다.
(그는 다 알았을거야. 옷을 벗긴 것도. 약을 먹인 것도.)
여자란 참 이상한 것이 그 일을 할 때에는 생각지 않았다가 갑자기 어느 순간엔 중요한 것이 아니라 아주 사소한 일을 더 소중하게 생각하는 버릇이 있다. 아무리 똑똑한 여자라도 여자의 천성을 벗어나지 못한다.
“자청공자..! 몸 상태가 어떤지 살펴보시는게...”
그녀는 자신만의 생각을 떨쳐버리듯 말했다.
“송소저. 자청이란 이름은 어릴적 부모님이 나를 부르시던 이름이오.”
아호(雅號)란 말이다.
“아버님께서 어머님의 함자 중 청자를 따고는 어머님의 아들이라 해서 불렀다고 하오.”
“처음 들을 때부터 본명은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법명(法名)이나 도호(道號)같은 느낌이 들었어요.”
“내 이름은 담천의(曇天義)요. 천의라고 불러주시오.”
아마 부모가 죽은 이후로 타인에게 그가 그의 본명을 알려 준 것은 송하령이 처음이었을 것이다.
“나이는 스물다섯이오.”
왜 자신의 신세를 송하령에게 말하고 있는지 몰랐다. 다만 말해 주어야 할 것 같았다.
“부모님은.....?”
“아홉살 때 돌아가셨소. 무능한 아들로 인해 두눈을 편히 감지 못하셨지만...”
“죄송해요.”
“아니오. 여동생이 하나 있소. 지금 어디 있는지 모르지만....”
자학하는 모습이었다. 부모와 관련된 불공지대천(불공지대천의 원수)이 있는 것일까? 그녀는 더 이상 물어 볼 수가 없었다. 이만큼 알려준 것만으로도 만족하고 있었다. 하지만 궁금한 것이 꼭 하나 있었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담천의를 바라보며 물었다.
“헌데 만물표국에서는 왜 일개표사로 계셨던 건가요?”
그는 한순간 대답을 하지 못했다. 한마디로 설명할 일이 아니었고, 그간의 사정을 말한다고 해서 이해해야 할 이유도 없는 극히 자기 감정적인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그저....갈곳이 없어서....아니...”
딱히 뭐라고 할 수가 없었다.
“괜한 걸 물었군요.”
여자는 호기심이 많다. 특히 쓸데없는 것에 호기심을 보인다.
“별로 중요한 것은 아니오.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말씀드리겠소. 우선은 소저도 쉬는게 좋을 것 같소.”
그의 말을 듣는 순간 그녀는 정말 피곤하다고 느꼈다. 지금까지는 몰랐지만 그녀의 체력도 한계를 보이고 있었다.
“우리에게 아직 서너시진은 시간이 있을 것 같소. 오늘밤 자시경에 출발해 관도쪽으로 내려가면 새벽 정도면 도착할 것이오. 지나가는 마차가 있다면 얻어 타고 정주로 갑시다.”
“최종 목적지는 정주가 아니예요.”
이제는 그녀가 솔직히 말할 차례다. 표국에 표물을 맡기면서 목적지는 분명 정주라 했었다.
“본래의 표물이 마차에 실린 만냥은 아니구요. 물론 그 만냥도 필요하긴 해요. 소림사에 시주할 돈이니까요.”
“그럼 소림으로...?”
“그래요. 목적지는 소림이에요. 다만 정주까지 도착하면 우리를 도와줄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어요.”
숭산(崇山)의 소림사.
안휘성 금릉 쪽에서 소림사를 간다면 정주를 거쳐 낙양에서 가는 것이 가장 좋다. 관도와 소롯길의 차이는 거리에 비례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일과 사실 아무런 연관도 없는 담천의도 이제 궁금증이 더해지고 있다.
강남 세도가가 이렇듯 어렵게 소림을 찾아갈 이유가 있는지 도저히 생각할 수가 없다. 그에게도 꼭 물어볼 내용이 있었다.
“소저들을 쫒고 있는 자들은 누구요?”
그녀는 고개를 살레살레 흔들었다.
“사실은 저희도 몰라요. 추측할 수 있는건 집안 어르신들께서 저희보고 목숨을 걸고 소림에 전하라고 하신 물건을 노리는 것 같아요.”
“......?”
궁금증만 더해간다. 하지만 더 이상 묻는다는 것은 남의 비밀을 캐는 것과 같아 그만 두었다. 송하령은 그 마음을 알겠다는 듯 말을 이었다.
“저희도 전하고자 하는 물건의 내용을 몰라요. 왜 전해야 하는지도 모르구요.”
“중요한 걸거요. 어쩌면 그 내용을 차라리 소저가 모르는 것이 나을지도 모르오.”
“서대인께서 그 말씀을 하시더군요.”
서대인이라면 서가화의 부친인 서인(徐仁)일 것이다. 중앙관부까지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그가 왜 자신의 딸과 송가의 딸에게 이렇듯 중대한 일을 맡겼을까? 무공이 뛰어난 무림인들도 많이 알고 있을 것이고, 도움을 청할 무림방파도 많을텐데.....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더 이상 생각한다 해도 그 이유를 추측해 내기 어려울 것이다. 이런 경우에는 단념하는 것이 가장 현명한 일이다. 어쩌면 소림사에 도착하면 알 수 있을지 모른다.
“충분히 쉬시오. 나도 준비하겠소.”
그는 말과 함께 처음 왔을 때 마른 풀을 구하여 자리를 봐 주었던 곳으로 눈짓을 해 송하령을 눕게 하였다. 그리곤 그는 윗옷을 벗어 그녀를 덮어 주고는 입구 쪽에 앉아 운기를 시작했다.
(빨리 회복해야 한다. 최소한 과거의 칠 팔할까지 끌어 올리지 못하면 힘들게 된다.)
부닥친다.
어떤 일이던 부닥쳐 헤쳐 나간다.
사내가 사내로서의 할 일을 피한다면 그건 사내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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