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 김민수

꽃마다 만나면 그 느낌이 다릅니다. 같은 꽃을 만나도 서있는 자리에 따라서 또 다른 삶의 소리를 들려줍니다. 똑같은 꽃이라도 바위나 해안에 피어있는 것이면 또 달라 보입니다.

어떤 꽃은 만나기도 전부터 이런저런 단상들이 떠오르기도 하고, 어떤 꽃은 렌즈에 멋있게 담기기까지 했어도 도통 그에 대한 글을 쓸 수 없을 때도 있습니다. '육지 것'에 대한 경계인지 야고는 쉽게 자신에 대해서 글을 쓰게 하지 않았습니다.

지난 해 감자를 심을 때 감자종자를 담은 컨테이너를 들고 낑낑거리고 감자밭으로 걸어가다 돌부리에 걸려서 '철퍼덕!' 넘어졌습니다. 얼마나 아픈지 엎어져서 정신이 없는데 억새 사이에 보라색 꽃이 보였습니다. 정신이 확 들더군요. '저게 도감으로만 보던 야고라는 꽃이구나!'

그렇게 야고와 눈맞춤을 한 이후 이른 봄 고사리를 꺾을 때에 검은 빛깔로 바짝 마른 야고의 흔적들을 보았고, 올 가을에도 역시 감자를 심으러 간 길에서 야고를 만났습니다. 일년생의 기생식물이면서도 어김없이 또 피어나는 야고가 고맙습니다. 억새풀에게는 미안한 이야기지만….

ⓒ 김민수

어찌 생각하면 기생식물은 얄밉게 여겨질 수도 있습니다. 기주식물들의 노력을 취해야만 자라는 식물, 그것이 지나쳐서 때로는 기주식물을 죽이기도 하니 그렇게 탐탁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야고는 제주에만 있음으로 인해 특별한 대접을 받기도 하지만 다소곳이 고개를 땅으로 향하고 있는 모양새에서 억새의 노력을 취하는 것에 대해 고개를 숙여 고맙다고 말하는 듯해서 밉지 않습니다.

사실 우리들은 누군가의 도움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습니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그 누군가의 노력을 빼앗기도 하며 살아갑니다. 물론 인식을 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것이 마치 능력인 것처럼 믿고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감사는 못할지언정 오히려 군림을 하려합니다.

기생식물인 야고는 억새의 입장에서 보면 그리 반가운 손님이 아닐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 무성한 억새풀 속에서 보랏빛의 꽃을 피우는 야고를 보면 오히려 억새가 야고의 몫까지 따스한 햇살이 주는 영양분을 비축해 두었다가 나눠주는 것 같기도 합니다.

죽죽 뻗은 줄기가 너무 밋밋해서 야고로 치장을 한 것은 아닌지, 자기가 가지지 못한 색깔을 야고가 가졌으니 억새가 붙잡아 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손님이 아니라 이미 야고는 억새의 친구인지도 모를 일입니다.

ⓒ 김민수
다른 기생식물들이 그렇듯이 야고는 아주 '단순하게(simple)' 생겼습니다. 갈색의 줄기가 길게 올라와 꽃받침 같지도 않은 비늘에 싸여 보라색 꽃을 피우는데 꽃잎도 조금씩만 갈라져 통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단순함'은 제가 붙잡고 살아가는 삶의 화두 중의 한 가지입니다.

개인적으로 다섯 가지 화두를 붙잡고 살아갑니다. 어찌 보면 현대사회에서 뒤처지기 십상일 것 같은데 오히려 그렇게 살아가다 보니 어떤 지름길 같은 것이 희미하게나마 보입니다.

그 다섯 가지는 '달팽이처럼 느릿느릿, 큰 것과 대비되는 작은 것, 얼짱이 아닌 못 생긴 것, 복잡하지 않는 단순한 것과 낮은 것'입니다.

야고는 단순하게 생겼다고 했습니다.

진리는 쉽고 단순합니다. 복잡하지도 않고 포장되어 있지도 않습니다. 배우지 못한 사람들도, 어린 아이들도 '아, 그것이구나!'하는 감동을 줄 수 있는 것이 '진리'입니다. 그러한 진리야말로 우리를 모든 억압으로부터 자유롭게 하는 것입니다. 야고의 꽃말을 지으라면 '단순한 아름다움 또는 단순한 진리'라는 심오한 꽃말을 붙여주고 싶습니다.

ⓒ 김민수

가을 바람에 억새는 외로워 이파리를 떨고
외로움은
그 깊은 억새의 뿌리까지 전해졌나 보다
억새의 뿌리에 잠자고 있던 그가
억새에게 물었다

"왜, 외롭니?"
"가을이니까."
"그럼 나에게 너를 나눠줄 수 있니?"
"나눠준다는 것이 무엇인데?"
"사랑이야, 네가 가진 것을 나에게 준다는 것을 의미하지."
"그러면 외롭지 않을까?"
"그러나 네가 죽을지도 몰라."
"무엇을 주면 되는 거야?"
"그냥 그렇게 나를 받아들이기만 하면 되는 거야."

<자작시-야고>


ⓒ 김민수

어쩌면 식물세계에서의 기생식물은 기주식물이 가지지 못한 또 다른 아름다움의 표현일 수도 있습니다. 억새가 보랏빛을 간직할 수 없으나 억새가 간직한 것만으로 피어나는 야고가 보랏빛 꽃을 피우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니 어쩌면 기생하지만 동시에 공존하고, 더불어 아름다움을 만들어 가는 것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삶에서도 그 누군가를 위해 봉사함으로 인해 자신이 할 수 없는 일을 그 사람이 해 낼 수 있다면, 그것으로 또한 우리가 기뻐할 수 있다면 거기에서 더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 수 있는 시작이 있는 것은 아닐까요?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자연을 소재로 사진담고 글쓰는 일을 좋아한다. 최근작 <들꽃, 나도 너처럼 피어나고 싶다>가 있으며, 사는 이야기에 관심이 많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