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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어렸을 때 탐독했던 <아라비안 나이트>의 '신밧드의 모험' 이야기가 불현듯 떠오른다. 그 중에서도 '신밧드의 요술 램프' 이야기…. 또 '알라딘과 요술 램프' 이야기….
소년 신밧드가 어느 날 우연히 보물 창고에서 얻은 램프에는 놀랍게도 초능력의 거인이 들어 있었다. 신밧드의 명령 한마디에 그 거인은 즉각 램프 밖으로 나왔고, 신밧드가 원하는 것이면 무엇이든 다 들어 주었다. 신밧드는 요술 램프를 소유함으로써 그 거인의 주인이 되었고, 그 초능력의 거인은 주인의 명령에는 무엇이든 절대 복종하는 충직한 노예였다.
처음에는 모든 것이 신기하고 재미있기만 했다. 요술 램프를 소유한 신밧드가 부러웠고, 나도 만약 요술 램프를 갖게 된다면 램프 속 초능력의 거인에게 무슨 명령을 하고 무엇을 얻을까 괜한 공상에 사로잡히기도 했다.
신밧드의 요술 램프를 다 읽고 나서 아버지와 얘기를 나눈 적이 있다. 그 기억이 아련하면서도 또렷하다. 어렸을 적에 등잔불 밑에서도 아버지와 책에 관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는 점에서, 그 기억은 나를 행복하게 만든다.
아버지는 말했다. 신밧드의 요술 램프는 오히려 신밧드를 욕망과 물질의 노예로 만들었다고 했다. 램프 속 초능력의 거인이 신밧드의 노예인 것 같지만, 실은 신밧드가 그 거인의 노예가 되었다고 했다. 모든 것을 자신의 힘으로 하지 않고 남에게 또는 무엇에 의존하여 해결하려 한다면, 그는 그 순간부터 과한 욕심도 갖게 되고, 그것의 노예가 되는 거라고 했다.
아버지는 요술 램프는 결코 정의로운 것이 아니라는 말도 했다. 악인도 그것을 가질 수 있다고 했다. 그것을 서로 가지려고 쟁탈전을 벌이는 것부터 그것은 정의로운 것이 아님을 의미한다고 했다. 악인이 그것을 소유할 때는 엄청난 불의가 세상을 지배하고 재앙이 생겨날 수도 있음을 암시하는 거라는 말도 아버지는 했다.
(2)
1948년 생인 나는 어언 56년의 세월을 살고 있다. 내가 태어나던 해에 이른바 '국가보안법'이라는 것이 생겨났다. 그러므로 나와 국가보안법은 동갑인 셈이다.
유한한 삶을 살고 있는 나는 국보법이라는 것도 유한한 것임을 일찍이 알았다. 해방 공간의 특수한 상황 속에서 억지로 생겨난 한시적인 법이라는 것도, 또 그 법의 자세한 내용도 두루 알게 되었다. 아울러 파란 만장한 세월을 보고 겪고 고뇌하며 살아오면서 그 법의 광범위하고 야만적인 위력도 확인할 수 있었다.
나와 동갑이라는 인연(?) 때문에 나는 괜한 호기심도 하나 갖게 되었다. 그 한시법의 명운(命運)이 언제까지 이어질지 적이 궁금했다. 나보다 먼저 죽을 것인가, 오래 살 것인가? 나보다 먼저 죽든 나중에 죽든 또는 같이 죽든 대체 나이를 얼마나 기록하게 될까?
어느덧 50대 후반을 살고 있는 나는 때때로 내 나이에서 무안함을 느끼곤 한다. 이제는 늙는 일밖에는 남지 않았다는 비관적인 생각도 들곤 한다. 그런 가운데서도, 늙더라도 추하게 늙지는 말아야 한다는 생각도 소중하게 보듬곤 한다. 비록 몸은 늙더라도 마음은 젊어야 하고, 늘 역사 발전의 장엄한 법칙 속에서 새롭게 미래를 열어 가는 마음으로 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와 같은 해에 한시법이라는 단서를 안고 태어난 국보법도 어언 56년의 나이를 안게 되었다. 역시 무안한 나이임에는 틀림없다. 56년 동안 그가 해온 일들과 온갖 해악들을 생각하면 부끄러울 수밖에 없는 존재다. 56년의 세월 속에서도 추레하고 남루한 몰골로 마냥 똑같은 자리, 똑같은 구실을 고집하는 망나니나 다름없다.
(3)
그 동안 국보법은 요술 램프였다. 저 아라비안 나이트 시대로부터 20세기 한반도 땅에 덜컥 떨어진 램프였다. 한편 그 램프는 이 땅에 오랜 세월 이어져 내려온 신주단지이기도 했다. 그 신주단지 속에는 초능력의 귀신들이 가득 차 있었다. 그들은 아무 때고 주인이 부르기만 하면 즉각 나와서 일을 했다. 무슨 일이든 다 할 수 있었고, 주인이 굳이 명령을 하지 않아도 미리 알아서 실행하는 신통력도 지니고 있었다.
갖가지로 자신의 형태를 바꾸는 귀신들은 특히 빨간색을 좋아했다. 신주단지 속에는 늘 빨간색 기가 가득 들어 있었다. 누구에게나, 또 무엇에나 완벽하게 빨간색을 칠할 수 있고 빨간 기를 꽂을 수 있었다. 또 그들은 귀걸이와 코걸이를 많이 갖고 있었다. 물론 귀걸이와 코걸이의 구분은 없었다. 그들이 누군가의 귀에 걸면 귀걸이가 되었고 코에 걸면 코걸이가 되었다.
그러다 보니 그 신주단지의 주인들은 어느새 그 귀신들의 노예가 되어 버렸다. 신주단지가 없으면 살 수 없게 되었다. 그 신주단지를 노상 가슴에 끌어안고 애지중지했다. 이미 권력을 쫓아 권력의 노예가 되었고, 돈을 쫓아 돈의 노예가 되었고, 온갖 부정부패의 노예가 된 그들은 신주단지로 말미암아 더더욱 이데올로기, 미신의 노예가 되어 버렸다.
그러나 저 아라비안 나이트 시대로부터 20세기 한반도 땅에 뚝 떨어진 요술 램프, 그 램프와 잘 결합했던 이 땅의 오랜 신주단지는 어느새 요술 능력을 잃고 말았다. 그 역시 21세기로 넘어가는 세월에 떠밀리다보니 저절로 뚜껑이 열리는 꼴이 되고 말았다. 뚜껑이 열려서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니 신주단지 속의 귀신들은 그만 위력을 잃게 되고 말았다.
사람들은 그 신주단지 속 귀신들의 장난질을 알만큼 알게 되었다. 그 귀신들의 장난질로 50여 년 동안 우리가 과연 무엇을 얻었고 무엇을 잃었는지도 구분할 수 있게 되었다. 그 신주단지가 이 나라를 지켜주는 것은 결코 아니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 신주단지가 없어도 우리가 능히 이 나라를 지켜낼 수 있다는 자신감과 의지도 갖게 되었다.
또 지금 시대와는 어울리지 않는 신주단지를 땅속에 깊이 묻어버려야만 이 나라가 좀더 정의로운 민주 사회로 나아갈 수 있고, 민족이 하나되는 미래도 확실하게 열어갈 수 있다는 신념을 갖게 되었다.
(4)
이미 뚜껑이 열려서 요술 능력을 잃어버린 신주단지를 그러나 여전히 애지중지하며 가슴에서 한사코 놓지 않으려는 사람들이 있다. 대부분 영화로웠던 옛날의 향수에 젖어있는 사람들이다. 신주단지 안에 가득 들어 있었던 붉은 깃대를 잘 흔들어서 이렇게 저렇게 이득을 취하며 배를 불리고 권력을 누렸던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들 역시 그 신주단지가 이제는 신통한 요술 램프가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것이 이 나라를 천년만년 지켜주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도 눈치를 채고 있다. 그것이 없어도 이 나라가 끄떡없이 유지되고 더 좋은 미래로 나아갈 수 있다는 변화의 법칙 같은 것도 어렴풋하게나마 느끼고 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그 신주단지를 놓으려고 하지 않는다. 그것을 버리면 금방 이 나라가 적화통일이 되고 말 거라고 호들갑을 떤다. 자신들의 그 주장이 쓸데없는 기우이고 아집이며 억지라는 것을 느끼면서도 그 골동품에 나라의 운명이 걸린 듯이 난리를 친다.
그들은 친일과 독재와 불의와 부패 속에서 가능했던 자신들의 영화로웠던 지난날의 향수를 포기할 수 없는 것이다. 자신들의 권력과 영화가 역사 발전의 법칙 속에서 평가 절하되는 상황을 용인할 수 없는 것이다. 자신들의 그런 오랜 아집과 '국가원로'라는 명칭까지 차용하고자 하는 오늘의 노욕(老慾)이 덧없는 것임을 느끼면 느낄수록 그들은 쓸데없는 위기의식에 집착하게 되는 것이다.
그들이 옛날 독재시대 신주단지 속의 깃대를 꺼내어 흔들 듯이 여전히 '애국'이라는 말을 마구 흩뿌리며 자신들을 분장하는 것은, 유형무형의 변화를 일으키고 있는 이 노무현 정부 시대가 혐오스럽기 때문이다. 대통령 노무현을 인정하기 싫기 때문이다. 어떻게든지 물고 뜯고 훼방하여 시대의 변화, 장엄한 변화의 물결을 조금이라도 비틀고 싶기 때문이다.
그들에게도 희망은 있다. 자질과 능력이 검증되지 않고 정치적 성장 과정도 거의 없는 여성이 독재자 박정희의 딸이라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 손쉽게 야당의 대표가 되는 오늘의 현실에 기초하고 있는 희망이다. 아버지의 장기 독재 권력에 무제한 이용되고 확장되었던 국보법을 목숨 걸고 사수하겠다는 딸의 그 결연한 의지 속에는 역사를 농락하는 듯한 '희극'이 존재한다. 그 희극에 희망을 걸고 그들은 변화의 물결 앞에 노구들을 이끌고 결연히 맞서고 있는 것이다.
무릇 역사의 강물은 직선으로만 흐르지 않는다는 것을 그들은 경험적으로 알기에…. 바로 여기에 이미 옛날에 뚜껑이 열려버린 신주단지, 그 국보법 안에 역사의 희극들이 존재하는 것이다. 물론 희극은 일정 부분 비극성을 지니는 것이기도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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