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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대권 대표
황대권 대표 ⓒ 참소리
'야만의 시대'를 상징하는 국가보안법의 존폐문제로 정치권이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다. 이에 <오마이뉴스>는 각계각층의 인사들로부터 국보법 폐지에 대한 기고문을 받고 있다. 베스트셀러 <야생초 편지>의 저자이기도 한 황대권 생태공동체운동센터 대표의 글을 싣는다. 그는 지난 85년 대표적 조작사건 중의 하나인 '구미 유학생 간첩단 사건'에 연루되어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으나, 98년 광복절 특사로 석방됐다... 편집자주

"도대체 무슨 증거로 저를 간첩으로 모는 겁니까? 저도 궁금해 죽겠으니 제발 좀 가르쳐주십시오!"

"야, 인마. 간첩이 무슨 증거가 있어! 간첩이 증거를 남기면 간첩 자격이 없는 거지!"

1985년 국가안전기획부 본부가 있는 남산의 한 지하실에서 있었던 일이다. 영문도 모르고 끌려간 나는 무려 60일 간의 고문과 구타 속에 정부가 공인하는 간첩이 되었다.

사회에 있을 적에 드라마에서나 보았던 일이 나에게 현실로 닥칠 줄을 그 누가 상상이나 했으랴! 부끄럽게도 나는 그때까지 국가보안법이란 것을 이름만 들어 알았지,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고 어떤 용도로 쓰이는지에 대해서는 무식 그 자체였다.

대한민국에서 간첩이 되는 길

간혹 가다 신문에 조악한 흑백 얼굴 사진들이 박혀있는 복잡한 조직도와 함께 "××간첩 일망타진"이라고 쓰인 기사를 보며, 이 사람들은 도대체 무슨 짓을 했길래 이렇게 신문에 대문짝 만하게 나와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가 하고 의아해 하곤 했다. 그러고는 끝이었다. 나하고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닌 밤에 홍두깨라고 이제 내가 그 주인공이 된 것이다. 평소에 순진하게 생겼다고 은근히 믿고 있었던 내 얼굴이 신문기사의 간첩단 조직도에 흑백사진으로 실리고 보니 여지없이 간첩처럼 보이는 것이었다.

정말이지 간첩과 일반 시민의 차이는 종이 한 장 차이도 되지 않았다. 오로지 저들에 의한 선택에 달려있었다. 고문으로 얼이 다 빠진 상태에서 감옥에 들어가 보니 세상에나! 사동 하나에 나처럼 끌려온 사람들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이른바 공안수 사동이다. 물론 거의 대부분이 두드려 맞고 간첩이 된 사람들이다.

운동 시간에 그들을 만나 사연을 들어보면 참으로 기가 차서 말도 나오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이 수사기관에 '협조'하면 조금이라도 일찍 나갈 수 있으리라는 희망 속에 기꺼이 간첩이 되기도 했다. 이건 분노도 아니고 허탈도 아니었다. 차라리 한 편의 희극이었다.

국가 안보라는 것이 이렇게 멀쩡한 사람들을 자꾸 간첩으로 만들어 내어야 지켜진다는 것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아주 틀린 논리는 아니었다.

성서에 보더라도 인간들이 자기 부족의 안녕과 무사를 위해 애꿎은 양들을 희생 제물로 바치지 않던가! 그렇다, 우리들은 분단국가의 안보를 위해 제단에 바쳐진 희생양이었던 것이다. 국가보안법은 바로 이 희생양들을 잡아오는 그물이었고. 만약, 만약에 말이다. 이렇게 라도 해서 국가의 안보가 지켜지고 국민들이 평온히 살 수만 있다면 하느님께서 나름대로 역할을 내려주신 것이려니 하고 아무 소리 않고 살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러나 희생양과는 상관없이 국가안보는 늘 불안했고 국민들은 오히려 자신이 희생양이 될까 싶어 불안에 찬 나날을 보냈다. 대신에 이를 빌미로 떡고물만을 열심히 챙기고 있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우리는 말하자면 국가안보나 국민의 안녕과는 하등 상관없이 오로지 저들의 행복과 이익을 위해 볼모로 잡혀 있었던 것이다.

국민들에게 주기적으로 레드 콤플렉스를 심어줌으로써 자신들의 지배력을 유지하는 것이다. 그리고 공장에서 자꾸 물건을 만들어내야 자금회전이 되고 공장이 돌아가듯 관련 국가기관과 그 안에서 녹을 먹고 있는 사람들도 똑같았다.

황대권 대표가 관련된 '구미간첩단사건'을 보고하고 있는 조선일보 1985년 9월 10일자 1면 기사.
황대권 대표가 관련된 '구미간첩단사건'을 보고하고 있는 조선일보 1985년 9월 10일자 1면 기사. ⓒ 조선일보PDF
"국가보안법의 수혜자는 소수 지배집단"

나는 지금도 똑똑히 기억한다. 방금 한차례의 고문 끝에 나로부터 허위자백을 이끌어낸 수사관이 상부에 보고를 올리면서 주고받았던 전화 내용을. "축하하네!" "감사합니다!" 무엇을 축하하고 무엇에 대해 감사하다는 것인가? 이것은 마치 각고의 노력 끝에(저들은 고문수사 60일 동안 피의자와 동고동락하였다) 신제품을 개발하여 출시를 기다리고 있는 국영기업체 간부의 설레는 표정 그대로였다(실제로 그들은 우리 앞에서 자기들끼리 부를 때 상무 이사 등 일반회사의 호칭을 썼다).

피해자의 편견을 최대한 자제하고, 또 자제하고 생각해 보아도 국가보안법의 수혜자는 일반국민이 아니라 소수의 지배집단이었다. 그것도 부당하게 나라의 권력을 틀어쥐고 호의호식하는 부패한 집단들이었다. 비판의 목소리에 대해 그들은 이렇게 항변하곤 한다.

"좀처럼 증거를 남기지 않는 간첩을 잡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간첩 한 사람이 국가를 위기에 빠뜨릴 수도 있음을 생각할 때, 그들을 잡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불가피한 인권침해는 이해해주셔야 합니다."

그러나 이 말은 도로 공사장에 붙어있는 "통행에 불편을 드려 죄송합니다"와 같은 협조문구와는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가 있다. 적어도 길거리 통행자는 공사가 어떻게 얼마나 진행되고 있는지 밖에서 들여다 볼 수 있으므로, 그리고 도로가 좋아지면 누구에게나 이익이 되므로 잠시의 불편쯤은 기꺼이 감수하고자 한다.

그러나 간첩 잡는 일은 철저히 밀실에서 이루어진다. 대한민국 어느 누구도 그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 방도가 없다. 선량한 시민 100명을 잡아넣고 겨우 한 명의 제대로 된 간첩을 만들어 내는지, 아니면 한 명도 못 잡고 그 모두를 바보로 만들어 버리는지 아무도 알 수가 없다.

피해자들은 그 밀실에서 나올 때에 자기가 그 안에서 보고 겪은 일에 대해서는 일체 발설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쓰고 나오기 때문에 더욱이나 그렇다. 그러나 내가 감옥 안에서 만난 대부분의 공안수들은(북에서 남파된 사람들은 제외하고) 조작간첩이었다.

한 사람의 간첩을 만들기 위하여...

한 사람의 간첩을 만들기 위해서는 수많은 주변 사람들이 밀실에 끌려들어가 고초를 당해야 한다. 이들과 옥에 갇힌 관제 간첩들의 가족과 주변 인물들의 고통까지 모두 감안한다면 실로 국가보안법의 인권침해 수준은 전국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인권침해는 여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다. 형을 살고 나오더라도 끊임없는 보안관찰에 시달려야 하고 제대로 된 직업을 가질 수가 없다. 한 마디로, 어느 날 갑자기 국가기관에 의해 간첩으로 낙인찍히는 순간부터 그는 더 이상 대한민국 국민이 아니다. 그리고 '그'는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일 수도 있다!

법에는 문외한이지만 어느 나라에도 범죄를 저질렀다고 하여 국민으로부터 제외된다는 말은 들어 본 일이 없다. 하물며 조작된 범죄임에랴! 1948년에 국가보안법이 제정된 이래 무려 수십만 명에 달하는 사람이 이 법에 의해 처벌을 받았다. 얼마나 무분별하게 잡아넣었는지 정확한 통계 기록조차 찾기 힘들다. 제정 당시에만 1년 새에 11만 명을 잡아넣었다고 하니 다만 미루어 짐작할 뿐이다.

지금 이 땅에는 지난 50여 년간 국가보안법에 의해 피해를 입은 수많은 사람들의 영혼이 중음신이 되어 산하를 떠돌고 있다. 이들의 넋을 위로하고 다시는 그러한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다 함께 다짐하고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야 함에도 아직도 이 법의 존치를 고집하는 이 땅의 현실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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