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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 보면 나란 놈은 참 한심한 사람이다. 1980년대 한창 '마이카' 바람으로 너도나도 운전교습에 열을 올릴 때도 아직은 시기상조라고, 출퇴근만 하는 직장인이 무슨 자가용 이용이냐고, 왠지 나만은 그 대열에 동참하고 싶지 않았다.
그 무렵 보도에 따르면 대학총장님들은 날마다 시위가 없기를 바라면서 시위 얘기를 주로 하고, 일반 직장인들은 아침마다 교통이 원활하기를 바라면서 출근길 차 막힌 얘기나 주차 얘기를 주로 했다고 한다.
내가 근무했던 학교도 예외가 아니었다. 애초 학교를 세울 때 오늘날과 같은 주차문제를 미처 생각지 않고 건물을 지어서 학교마다 주차장이 제대로 마련된 곳이 거의 없었다.
그러다 보니 주택가에다가 슬그머니 주차하는 이도, 담 옆에 불법 주차한 이도 늘어났다. 퇴근 때 가보면 바퀴에 바람이 빠져 있거나, 소중한 차에다 흠을 내서 하는 수 없이 학교 안으로 주차하기 시작했다.
학교마다 사정은 비슷해서 학생들의 휴식처 등나무 그늘이 주차장이 되고 심지어는 운동장 일부가 주차장이 돼버려 체육수업에 큰 방해물이 되었다. 심지어 어떤 학교에서는 출근길에 한 교사의 차에 학생이 치어 학생이 한 학기 휴학을 한 사례도 있었다.
대학 시험 날 진풍경
내가 근무했던 학교는 대학 부속학교로 한때 큰집 격인 대학 구내 주차장을 이용할 수 있었는데, 주차비 문제로 선생님들이 마음고생을 아주 많이 했다. 주차료가 대학 교수는 월 1만원인데 견주어, 부속중고등학교 교사는 월 2만원을 받아서 차별 대우한다고, 대학답지 않은 치졸한 처사라고 몹시 분개했다(그 얼마 후 외부 용역회사에서 운영하고부터는 차별은 없어짐).
더욱이 그 무렵 대학 입시일에는 그야말로 교통지옥으로 대혼란을 빚기 일쑤였다. 내가 재직했던 학교 신촌 일대가 온통 자동차로 덮여서 수험생들이 차에서 내려 마라톤 선수마냥 뜀박질하거나 어떤 수험생은 퀵서비스 오토바이에, 경찰 순찰차에 실려 시험장으로 가는 진풍경도 보였다. 내 제자 가운데도 고시장에 늦게 입실하여 시험을 망쳤다고 울부짖기도 했다.
이런저런 자동차 문화 이야기를 담아서 <자가용병>이라는 제목으로 산문집 <비어 있는 자리>에 실었더니 그 책이 나간 후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이니, '자기는 자가용 안 굴릴 거냐?'는 뒷이야기가 한 동안 내 언저리에 맴돌았다. 그때마다 나는 마음속으로 현직에 있는 한 승용차로 출퇴근하지 않고, 퇴직 후에 내 차를 갖겠다고 다짐했다.
1994년 딸아이가 고교생이 된 후였다. 내 집은 서울에서 둘째로 높은 지대인데다 아이 학교도 지대가 무척 높았다.
어느 날 밤 갑자기 비가 내렸다. 딸아이가 야간 자율학습을 마치고 교문을 나서는데 대부분 친구들은 아버지나 어머니가 차를 가지고 와서 교문 앞에서 기다렸다가 곧장 태워간다고 했다. 그런데 내 집 아이는 비를 쫄딱 맞은 채 어두운 밤길을 걸어서 귀가하고는 제 어머니에게 "자기는 다리 아래에서 주워서 온 아이냐"고 불평을 터트렸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하더니 며칠 후 아내가 운전교습을 받기 시작했다. 교육이 끝날 무렵 어떤 차를 살까 물어왔다. 내가 프라이드 이상은 안 된다고 했더니 그 차를 샀다. 아내 차를 타고 한두 번 학교까지 출근했는데 내 양심에 찔려서 그 다음 날부터 다시 대중교통을 이용했다.
행복지수가 더 높은 나라
승용차는 시골사람일수록 나이가 든 사람일수록 더 필요한 것 같다. 시골에 살아보니까 마을과 마을을 잇는 대중교통이 뜸하고, 애써 가꾼 농산물을 시장에 내다팔거나 객지에 있는 자녀에게 갖다 주려면 승용차가 아주 요긴하다. 십리 길 이십 리 길 논밭에 새참 나를 때도 얼마나 좋은가.
그런 탓인지. 요즘 웬만한 시골집에도 승용차가 없는 집이 거의 없다. 승용차와 짐차 두 대 이상인 집도 많다. 얼마 전 한 농사꾼 집에 집들이 초대를 받고 갔더니 모두 차를 타고 와서 주차 문제로 곤란을 겪는 걸 봤다.
그런데 시골도 너도 나도 자가용을 갖게 되자 또 다른 부작용을 낳고 있다. 시골 버스들이 승객이 없어서 적자에 그나마 노선마저 줄일 판이란다. 서울에서 안흥행 시외버스를 탈 때 좌석의 반 이상을 메운 적은 한두 번뿐이다. 어떤 때는 기사까지 세 사람이라 여간 미안치 않았다.
한 번은 강화 교동의 박철 목사님 댁을 찾고자 강화 시외버스터미널에서 버스를 탔더니, 버스 출입문 옆에 다음과 같은 글이 붙어 있었다.
"존경하는 강화군민 여러분! 강화군민의 급격한 인구 감소와 자가용 이용 증가로 대중교통의 경영 여건이 급속도로 악화되고 있습니다. 우리 강화군의 교통발전을 위하여 대중교통을 생활화합시다.”
또 나이가 들수록 차가 더 필요한 것은 점차 무거운 짐을 들기가 부담스럽기 때문이다. 팔자 탓인지 나는 자주 취재여행을 다니는데 요즘은 가방 무게에 부담을 많이 느낀다. 카메라에 녹음기 취재노트 등 가장 기본만 넣고 다녀도 그 무게가 만만치 않다. 그래서 아내 차를 자주 빌려 타지만 어디 늘 그럴 수 있는가.
산골에서 갑자기 병이라도 나도 속수무책이요, 누가 내 집을 몰라 헤매도 얼른 쫓아가서 모셔올 수도 없다. 그래서 요즘 아내는 지금이라도 나중을 대비해서 배워놓으라고 주문한다.
사실 지난번 네티즌 성금으로 미국에 가서 47일 지내는 동안에 자동차가 없고 운전도 하지 못하여 얼마나 불편한지 몰랐다. 국토가 엄청 넓은 미국에서는 자동차가 신발이었다.
내가 주로 지냈던 워싱턴 교외 메릴랜드 주 일대는 우리나라와 같은 시내버스라는 게 없다. 현지 동포 분들이 도와주지 않았다면 모텔 방에서 지내다가 그냥 돌아왔을 게다.
"이제는 서서히 혼자 사는 연습을 하세요. 누가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지 않아요."
아내의 말이 일리가 있다. 그런데 또 쓸데없는 기우는 요즘 따라 건망증이 심해서 운전을 하면 사고를 낼 것 같은 예감이다. 애꿎은 다른 이까지 다치게 한다면 그 무슨 큰 죄를 짓는 일인가.
옆집 큰 노씨네는 아직 승용차가 없다. 가끔 아내차를 빌려 타고 횡성 장에 간다. 그때마다 "선생님, 옛날에는 새벽밥 먹고 오십 리를 걸어서 횡성 장에 갔어요. 그날 장을 보고 가마득히 높은 전재 고개를 넘어 돌아오면 깜깜한 밤이었어요. 그래도 그때가 더 좋았던 것 같아요"하고 지난 날이 좋았다는 얘기를 자주 들먹거린다.
하기는 그렇다. "국민소득이 낮은 나라일수록 행복지수는 더 높다"고 하지 않은가.
지난 여름 중국에 갔더니 온 나라가 도로 건설로 마구 파헤쳐져 있었다. 한 미래 학자는 중국대륙이 유럽과 같은 문명을 누리면 이 지구는 돌이킬 수 없는 환경 재앙이 올 거라고 경고했다. 하지만 우리만 문명을 누리고 너희는 누리지 말라고 어찌 문명화를 막을 수 있겠는가.
옛날 기(杞) 나라의 한 어리석은 사람처럼, 하늘이 무너질까봐 땅이 꺼질까봐 걱정했다는 바보처럼, 나는 그렇게 못난이로 살아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