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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법 폐지와 관련하여 <오마이뉴스>는 릴레이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그 중에서 <야생초 편지>를 쓴 황대권 선생의 칼럼을 각별하게 읽으면서 나는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되었다. 떠오르는 대로 적거니와 그 두서 없음을 양해하기 바란다.
그 칼럼은 내가 최근에 읽은 글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것이었다. 이력을 가리고 읽었더라면 흡사 능란한 시인의 글인 양 착각할 만큼 매혹적이었다. 겸손하면서도 단단하였고 너그러우면서도 단호하였다. 국보법이 야만의 증거임을 그는 자신의 고통스런 기억을 위로해가며 아름답게 증명했다. 세달 전 쯤, 선생을 어느 생태 운동 모임에서 잠깐 뵌 일이 있는데 그날의 은은한 온도를 다시 느낄 수 있었다. 서둘러 일독하기를 권한다.
돌이켜보건대, 과연 수난과 고통은 한 인간을 저토록 성숙시키는구나 하는 믿음이었다. 그 야만의 국보법이 한가지라도 효과를 보았다면 그것은 처절한 고통을 통하여 인간은 강철처럼 단련되고 아름답게 성숙되는구나 하는 것 뿐이다. 물론 그와 같은 짐승의 시간은 다시 오지 말아야 한다.
조금 다른 각도에서 보건대 현재의 국보법 논쟁은 심각한 '문화적 갈등'이기도 하다. 이는 보수주의자들이 비난조로 쓰는 '문화혁명'과는 다른 말이다. 무슨 뜻인가 하면 이 논쟁(국가 정체성 운운까지 포함하여)에 있어 그대로 두자는 사람들은 그것이 그대로 있음으로 해서 더 평화롭고 안전하다는 것이고 그 반대 쪽은 폐지를 해야 한반도가 더 행복해지며 안전도 걱정할 것이 없다는 것이다.
내 생각에 국보법 폐지를 주장하는 입장에서는 그 악법이 사라져야 한반도의 인류가 더욱 평화롭고 행복하며 심지어 더 안전해질 것이라는 점을 '문화적'으로 확실하게 증명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현재까지의 '형세 판단'으로는 한나라당과 보수파들이 이른바 '선전전'을 유리하게 끌어가고 있다는 느낌이다. 그들은 국보법 유지로 이 사회가 행복해질 것이라고는 주장하지 않지만 적어도 '안전'은 유지될 것이라고 주장함으로써 여론 형성 과정에 우위를 점하고 있다.
그러던 참에 읽은 황대권 선생의 칼럼은 인터넷 용어로 말하여 수도 없이 '퍼다 날라야 할' 만큼 소중한 것인 바, 적어도 나는 이 칼럼을 통하여 과연 한반도가 평화롭고 행복하며 심지어 더 안전해지기 위해서라도 국보법을 폐지해야 한다는 확신을 갖게 된 것이다.
사회에 대한 깊은 성찰과 인간에 대한 신뢰 담긴 황대권씨의 글
보수 신문이나 조갑제 씨의 칼럼은 말할 것도 없고 김수환 추기경의 최근 강론이나 이른바 보수 '원로'들의 시국 선언, 심지어는 폐지를 주장하는 사람들의 글과 성명서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던 이 사회에 대한 깊은 성찰, 인간에 대한 신뢰, 그리고 자신의 끔찍했던 기억에 대한 좀처럼 보기 드문 여유까지 겹쳐진 이 칼럼을 읽으면서 나는 국보법 폐지가 훨씬 더 정당하고 아름다운 것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요컨대 진보라고 한다면, 이 정도로 아름답고 품위있으며 또한 단호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보수 진영은 늘 그 상대 진영을 향하여 시정잡배와 다를 바 없이 촌티나고 철없다고 타박했는데, 나는 단 한번도 그들의 생각에 동의한 적이 없다. 국보법 논쟁이 한편으로 '문화적 갈등'인 까닭이 여기에 있다. 국보법이 엄연했던 시절을 '아름답게' 기억하는 사람들의 문화적 정서와 권위에 대하여 그 짐승의 시간을 '참혹하게'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의 새로운 정서와 상상력이 겨루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 점에서 어제 <오마이뉴스>를 통하여 '짧게' 소개된 문학평론가 임헌영 선생의 '불륜문학은 쓰레기 문학'이라는 발언은 유감이 아닐 수 없다. 기사로 요약되는 과정에서 본래의 뜻이 왜곡된 바도 있을 것이다. 경쾌하기 보다는 경박하고 도발적이기 보다는 빈정거릴 뿐이고 절실하다기 보다는 상투화된 일탈이 대세를 이룬 오늘의 소설 풍토에 대하여 중진 평론가의 깊은 시름이 여과없이 전달된 것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륜이요 쓰레기'라는 표현은 이해하기 어렵다. 아다시피 최근 몇 년 동안은 여성 소설가들의 시대였다. 귓가에 들리는 '낮은 속삭임'들이 차고 넘쳤다. 귀찮을 정도로 웅얼거리는 투정도 없지 않았지만 바짝 다가와서 간절하게 호소하는 쓸쓸한 속삭임이 오히려 많았다. 그 과정에 불륜이 적절한 소재로 쓰이기도 했을 것이다. 이를 '쓰레기'라고 단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역사가 증명하듯이 대체로 진보가 그 반대에 비하여 훨씬 더 풍요롭고 매혹적이지만 결코 그 '진영'이 늘 아름답고 경쾌한 것은 아니다. 문제는 개념상의 진보가 아니라 현실 속의 이른바 '진영'이다. 넓은 의미의 현실적 '진영'이 과연 보수보다 더 풍요롭고 아늑한가, 보수보다 더 넘치는 상상력으로 충만한가, 보수보다 더 활기차고 신선한가. 진보는 혹시 그 반대편보다 편협하고 부족한 것은 아닌가. 요컨대 지금 진보는 보수보다 훨씬 더 매혹적인가.
지금 한반도는 권위적이고 편협하며 일방적이며 폭력적이었던 지난 날의 지배적 문화적 정서에 대하여 '국보법'이라는 샅바를 잡고 씨름을 하고 있는 것이다. 국보법 논쟁에서 진보 '진영'이 이뤄야 될 또 하나의 과제가 있다면 바로 이것이다.
국보법을 폐지하자는 쪽이 훨씬 경쾌하며 그들이 제시하는 미래가 훨씬 더 아름답고 풍요롭다는 것을 '논리'만이 아니라 '정서'를 통하여 입증해야 한다. 적어도 그 야만의 법 조항이 활개치던 과거의 시간보다는 더 아름답고 활기찬 공동체가 우리 앞에 있다고 증명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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