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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6일 오후, 10리쯤 떨어진 천주교회 공동묘지에 가서 선친 묘소 벌초 작업을 했다. 12일 주일 오후에 어머니와 동생 부부와 함께 가서 작업을 시작했다가 쏟아지는 비로 중단을 하고 16일 다시 가서 했으니 올해는 묘소 벌초 작업을 이틀에 걸쳐서 한 셈이다.

올해도 형제 가족 모두 함께 가서 작업을 함으로써 중요한 집안 행사의 풍모를 갖추려고 했으나, 휴일이 아닌 관계로 그럴 수는 없었다. 오전의 비 때문에 일터에 가지 않은 동생과 어머니만이 함께 가서 손을 맞추어 주었다.

올해의 벌초 작업 상황도 예년과 똑같았다. 내 선친 묘소 한 동만 벌초를 하는 것이 아니었다. 물론 선친 묘를 맨 먼저 하고, 바로 옆 내 어머니께서 장차 누우실 자리를 깎았다. 다음에는 그 옆에 있는 두 동의 임자 없는 묘들을 벌초해 드렸다.

그 두 동의 묘는 십 수년 전 공동묘지 확장 공사를 할 때 발굴된 조선시대 묘였다. 임자 없는 옛날 묘들이라고 해서 그대로 묻어버릴 수는 없었다. 내 선친 묘 옆으로 자리를 잡아 이장을 했다. 그리고 그때부터 해마다 그 묘들을 벌초하는 일은 내 몫이 되었다.

그 묘들이 있는 곳은 좀 후미진 곳이기도 해서인지 해마다 유난스럽게 잡풀이 우거지곤 했다. 벌초를 하러 가서 보면 묘들이 완전히 보이지도 않을 지경이었다. 그만큼 그 묘들의 벌초 작업은 힘이 들었다.

다음에는 선친 묘 근처에 있는 '라파엘'의 묘를 깎아주었다. 라파엘은 물론 세례명으로 대천사의 이름이다. 그런데 묘비에 새겨진 그 세례명 앞에 한국 성씨와 이름이 없다. 20여 년 전 안흥항의 꽃게잡이 어선 그물에 걸려 올라온 유골에 세를 주고 장사지내 준 것인데, 그가 남자인지 여자인지 알 수가 없어서 라파엘이라는 대천사 이름을 붙였던 것이다.

그때부터 그 묘의 관리는 주로 유골을 건져 올린 꽃게잡이 어선의 선장이었던 분이 맡아해 왔는데, 그 분보다 내가 먼저 벌초 작업을 하러 갔을 때는 꼭꼭 내 손으로 해주곤 했다.

다음에는 임자는 있으되 돌보는 이들이 없는 세 동의 묘를 벌초해 드렸다. 한 동은 20여 년 전부터, 두 동은 10여 전부터 해마다 하는 일이다. 그런데 나는 여태까지 그 묘들의 임자들이 과연 명절에 성묘만이라도 하고 가는지조차 알지 못하고 있다.

만약 그들이 명절에 성묘를 온다면, 해마다 묘가 깔끔히 벌초된 상태를 보면서 아무런 의문도 갖지 않을까? 나는 그것이 조금은 궁금하다. 교회에서 일괄적으로 벌초를 해주는 걸 거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교회 사무실에 한 번이라도 들러서 고맙다는 인사를 해야 하지 않을까?

누군지 모를 어떤 사람이 해마다 벌초를 해주는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전혀 못하는 걸까? 그렇다면 고맙고 미안한 마음을 가질 법도 한데, 그런 것이 그들에게는 전혀 없는 것일까?

생각하면 좀 아리송하고 섭섭하기도 하다. 하지만 섭섭한 마음은 되도록 갖지 않으려고 한다. 그들로부터 고맙다는 인사나 어떤 보답을 받으려고 하는 일이 아니지 않는가.

하지만 뭔가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은 있다. 해마다 벌초를 해주는 사람을 찾아 고맙다는 인사는 하지 않아도 좋으니, 그들이 명절에 잠깐 성묘만이라도 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성묘를 할 사람들이면 해마다 벌초를 해주는 사람을 벌써 옛날에 찾았을 거라는 생각이 없지 않지만, 그들이 제발 성묘만이라도 하는 사람들이기를 정말 간절히 바란다.

마지막으로 묘지 옆의 제대(祭臺) 주위를 돌며 낫질을 했다. 먼지가 많이 끼어 있는 성모상을 닦아 드리는 일은 어머니 몫이었다.

2시간 여에 걸쳐 모든 작업을 마친 다음에는 아버님 묘소 앞에 선친께서 생전에 즐겨하셨던 막걸리를 한잔 따라 올리고 형제가 함께 절을 올렸다. 그리고 즐겁게 음복을 하며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어머니와 단둘이 벌초 작업을 하곤 했다. 어머니도 낫질을 잘하셨고, 나는 소년 시절부터 익힌 낫질 솜씨를 유감 없이 발휘했다. 어머니가 도와주시기는 하지만 그 큰 공사를 혼자 다 하다시피 했다.

하지만 점점 힘이 부치는 것을 느끼게 되었고, 선친 묘소를 벌초하는 일은 마땅히 가족 모두가 함께 하는 중요한 행사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도 하게 되었다. 그때부터는 동생을 비롯하여 가족 다수가 작업에 참여하게 되었다.

올해는 좀더 힘이 드는 것을 느껴야 했다. 거의 매일같이 등산을 하고 산에서 맨손체조를 비롯하여 갖가지 운동을 하건만 한참 낫질을 하다보니 옆구리가 몹시 결리는 통증을 느껴야 했고, 숨이 헉헉거려지곤 했다. 이제 50대 후반의 길목에 들어선 나이건만 나도 늙어가고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그 공사를 혼자 다 하다시피 했다는 사실이 신기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내년부터는 올해 중2인 아들 녀석과 초5인 조카녀석에게 낫질을 가르쳐서 일을 시켜야겠다는 얘기도 하며 웃었다. 내가 초등학생 시절부터 산에 나무하러 다닌 것을 생각하면 가당치 않은 일은 아닐 것도 같았다.

조상님들이 누워 계시는 선산의 벌초 작업은 해마다 사촌 작은 형님이 사람을 사서 하는데, 사촌 작은 형님에 대한 고마움과 죄송스러움도 다시 느꼈다. 이미 칠순을 넘기신 두 분 사촌 형님과 건강이 온전치 않은 상태로 70고개를 바라보시는 작은 형님을 생각하니 훗날에 대한 걱정도 크지 않을 수 없었다. 세 분 사촌형님들이 모두 돌아가시면 선산 묘소들의 벌초 작업도 내 몫이 되는 것은 아닐까?

나도 세월을 강물을 타고 하염없이 흐르며 어느덧 머리칼이 세어가고 있는데….
나는 막걸리 한 잔을 마시고 나서 한마디 중얼거렸다.

"이렇게 해서 또 일년이 지났네 그려. 이 벌초 작업이 일년에 한 번씩 하는 행사이니, 이 행사를 하다보면 또 한 해가 지나는 거지…."

"그렇구먼 그려. 그새 또 일년이 지났어."
지난해 팔순을 잡수신 어머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십대 후반 세월을 살고 있는 동생도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묘소 벌초 작업을 하는 사이에 일년이 지났음을 확연히 느낄 수 있었다. 묘소 벌초 작업은 다시 일년이 지난 후에, 즉 내년 이맘때 또 한번 일년이 지났음을 내게 느끼게 해줄 터였다. 덧없고 덧없는 인생사, 유한한 세상의 허무도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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