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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죽거리 잔혹사> 스타일로 이야기해보면, 1982년은 내 인생에서 유달리 특별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인생을 살다 보면 그렇게 섬광처럼 다가와 기억의 뇌리에 판화처럼 선명한 각인을 찍어놓고 사라져가는 인생의 한때가 있다. 내겐 1982년이 그랬다. 당시 초등학교 6학년이었던 나는 프로야구의 광신도가 되었다.
23년 만에 <슈퍼스타 감사용>을 통해 스크린에서 부활한 프로야구 원년의 스타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 스크린 속 1982년의 한가운데에 감사용과 박철순이 있었다.
22연승의 신화를 기록한 불세출의 투수와 고작 1승이 프로야구 통산 전적인 만년 꼴찌 팀에서도 꼴찌인 투수.
세상이 그들을 보는 평가는 극과 극이지만, 그들은 그저 진정한 야구선수일 뿐이었다. 김종현 감독의 데뷔작 <슈퍼스타 감사용>을 보는 내내 나는 '인생의 진정한 승자가 되는 법'에 관해 고민하게 되었다.
마지막까지 꿈을 지킨 남자, 감사용
김종현 감독의 회상을 빌리자면 매번 지기만 하는 사람에게 쏘아붙이던 핀잔이 있었다고 한다. 그게 바로 "네가 감사용이냐?"였다.
남들이 먹고 난 음식을 주워먹는 것에 비유되는 패전처리 전문 투수의 대명사. 도저히 이길 수 없는 경기, 이제 이기기를 포기한 경기에 '설거지'를 하기 위해 등판하는 투수가 바로 감사용이었다.
세상은 한 개인을 대할 때 원래 그런 식이다. 숫자로 한 인간이 규정되는 순간, 그 인간의 무한한 가능성과 개인의 고유한 특성 따윈 이미 아무 가치가 없는 것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슈퍼스타 감사용>은 숫자 저 너머에 엄연히 존재하는 한 인간의 간절한 소원에 대해 성공적으로 보여준다. 실제로 감사용 선수는 고교야구 선수권 대회에서 4강에 진출한 적이 단 한번도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대학에서 야구를 하지 못한 감 선수였지만, 그의 야구 사랑만은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간절한 소원이었다.
입단테스트에 늦지 않기 위해 그가 자전거를 타고 오르막을 내달리는 장면은 그래서 나의 심금을 울렸다. 뒤늦게나마 꿈이라는 종착역을 향해 달리는 막차에 오르려고 애쓰는 감 선수를 보면서 나는 가슴이 먹먹해졌다.
현실엔 얼마나 많은 감사용이 있는가
나는 감 선수가 사회인 야구대회에서 최우수선수의 영예를 안았다고 해서 그가 정말 프로야구에서도 최고의 투수가 되고 싶다는 꿈을 가졌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어쩌면 처음부터 벤치를 따뜻하게 데우는데 일조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야구가 좋았고, 야구장에 가고 싶었고, 야구복을 입고 싶었던 것이다.
그가 로진백을 만진 후, 구두를 신은 채로 야구공을 던질 때, 그의 꿈도 함께 내 마음을 향해 날아왔다. 그가 얼마나 야구선수로 살고 싶어하는지 나는 느낄 수 있었다.
이기고 지는 걸로 세상은 마치 야구경기의 모든 것이 결정되는 듯 떠들어대지만 조금만 더 다이아몬드의 필드를 들여다보면 거기엔 숫자로 이야기될 수 없는 수많은 땀과 눈물의 감동이 숨어 있다.
사람들은 원래 함부로 말하는 걸 좋아한다. 하지만 무언가를 감 선수처럼 진정 사랑해보지 못한 사람들은 입을 다물어야 할 것이다.
영화를 보고 나오며 나는 생각했다. 이제 김종현 감독의 기억 속 핀잔을 이렇게 바꾸어야 한다고.
"네가 감사용이냐? 그렇게 간절한 꿈을 가지게?"
죽어도 죽지 않고 다시 살아나는 새, 불사조 박철순
24승(22연승) 4패 7세이브, 방어율 1.84, 첫 한국시리즈에서 1승 2세이브 기록. 1982년 박철순이 받은 성적표다. 최우수선수상, 방어율 1위, 승율 1위, 다승 1위…… 아마 1982년은 그의 인생 최고의 해였을 것이다.
1982년을 시간적 배경으로 삼고 있는 <슈퍼스타 감사용>은 박철순의 화려한 날들을 보여준다. 하지만 1982년 이후, 박철순의 화려한 날들은 더 이상 지속되지 못했다.
1983년 MBC 청룡과의 경기에서 송영운의 타구를 허리에 맞고 박철순은 들것에 실려 경기장을 떠났다. 그의 부상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부상과 재기, 아킬레스건이 끊어지는 시련 속에서 그의 별명은 바뀌었다. 1982년, 야구모자 뒤편으로 볼록하게 길러진 그의 뒷머리를 보며 팬들은 '아톰머리'라는 애칭을 붙여주었다.
하지만 진통제를 너무 많이 맞아서 그의 머리카락은 빠졌고, 더 이상 아무도 그를 아톰머리라는 애칭으로 부를 수 없었다. 대신 그에게는 새로운 별명이 생겼다. 그게 바로 '불사조'였다.
이집트 신화에 나온다는 불멸의 새. 죽어도 죽지 않고 다시 살아난다는 불멸의 새. 박철순의 야구생명은 끝났다고 함부로 지껄이는 사람들에게 자신이 야구선수로 살아 있음을 보여주었던 박철순이었다. 그는 오뚜기처럼 넘어져도, 넘어져도 다시 일어났다.
1986년 롯데 자이언츠와 OB 베어스의 경기가 열렸다. 이날 박철순은 재기의 의지를 불사르기 위해 삭발을 했다. 스포츠 신문의 1면에는 '불사조, 삭발투혼'이라는 기사가 실렸다. 그가 롯데를 상대로 완봉승을 거두고 난 후, 1루 관중석을 향해 모자를 벗고 인사를 할 때, 관중석은 눈물바다가 되었다.
그 때였다. 잠실 야구장에 프랭크 시네트라의 <마이웨이>가 울려 퍼진 건. 고등학생이었던 나는 오랫동안 그날을 기억할 것이라고 예감했고, 그 예감은 적중했다. 나는 아직도 그날의 감동을 잊지 못한다. 자신의 길을 끝까지 가려고 했던 남자, 마지막까지 야구선수로 기억되고 싶어했던 남자가 서있었다.
미국의 메이저리그처럼 한국에도 명예의 전당이 생긴다면 과연 어떤 선수가 가장 먼저 헌정될까?
최고의 선수들은 셀 수 없이 많다. 광속구 박찬호, 핵잠수함 김병헌, 무쇠팔 최동원, 무등산 폭격기 선동열, 바람의 아들 이종범, 헐크 이만수, 연습생 신화 장종훈 등등 최고의 선수들이 아마 거론될 것이다.
하지만 나는 당연히 그 명예는 1995년 한국시리즈에 40살의 나이로 마운드에 오르는 최고령 투수, 박철순의 몫이라고 생각한다. 그 무수한 부상과 고통의 세월을 이기고 마지막까지 마운드를 지킨 등번호 21번의 박철순이 그 영광의 주인공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싶다.
기록이 나빠지자 박철순은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졌다. 하지만 감사용이 그랬던 것처럼 박철순도 진정한 의미의 야구선수다. 최고의 야구선수의 영예는 당연히 그가 얼마나 야구선수다운가로 판가름나야 한다고 나는 믿는다.
고독한 마운드에서 전력투구하라
볼록하게 솟아 있는 마운드에 단 한번이라도 서본 사람이라면 그 자리가 주는 중압감을 이해할 수 있다. 투수라는 포지션이 주는 고독감과 책임감을 몸소 느끼며 마지막까지 야구사랑에 전념했던 두 야구 선수를 보며 나는 그들이 진정한 슈퍼스타임을 느꼈다.
진다고 해서 낙담할 필요는 없다. 감사용의 마지막 대사처럼 "다음 번에 꼭 이길 테니까"라는 다짐만 있으면 된다.
2004년을 사는 현실의 모든 감사용과 박철순들이여, 고독한 마운드에서 전력투구하시라. 살아 있는 동안 아직 게임은 끝나지 않았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