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밸런타인데이, 크리스마스, 로즈데이를 비롯한 무수한 데이들 그리고 곧 다가올 추석. 가장 괴로운 사람들은 누구일까? 그렇다. 애인 없는 사람들이다.

온 거리가 달짝지근한 초콜릿과 몰랑몰랑한 사랑 노래로 물결치는 것이야 눈을 덮고 귀를 막으면 된다지만, 하나같이 걱정스러운 기색으로 "왜 '이성' 친구가 없느냐"고 물어대는 친척들에게는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다.

누구도 "도대체 왜 넌 이성 친구가 있는 거냐" 하고 의아해하진 않는다. 마치 우리가 "연애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나"기라도 한 듯이 말이다. 노래도, 영화도, 소설도 온통 연애 이야기뿐이다. 연애를 빼놓고는 되는 게 없으며 될 것도 안 된다.

이러한 연애과도집착 사회에서 연애 얘기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연극이 나타났다. 여성 예술인들의 가능성을 모색하기 위해 마련된 젠더 크리에이티브 페스티벌에서다.

▲ <연애얘기아님>의 배우들
ⓒ 연습실 놀땅
<연애얘기아님>(작가·연출 최진아)의 주인공 선희는 남자친구와 헤어지기로 결심한다. 당신은 반문할 것이다. "왜?"

우선 그의 상황을 보자. 착하고 소심한 선희는 보험회사 대리다. 능력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구조조정의 두려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간간이 후배 직원에게 무시를 당하기도 한다. 하나 있는 오빠는 손을 대는 사업마다 족족 말아먹고는 선희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이런 상황에서 남자친구와 헤어지다니. 당신은 석연치 않아 할 것이다. 아, 남자친구에게 무슨 문제가 있나보군!

그렇다면 이번엔 그의 남자친구 석영을 보기로 하자. 석영은 착하고 따뜻한 남자다. "무슨 일이 있어도 넌 잘 해낼 거"라며 선희를 응원하고, 야근하는 선희를 위해 과일을 씻어다준다. 아침이면 부드러운 노래로 선희의 잠을 깨워주기도 한다.

대개의 작품에서 착한 사람들이 무능하게 그려지지만 석영은 능력도 있다. 해마다 우수 사원으로 뽑혀 연수를 갈 수 있지만 아픈 아버지와 혼자 있을 선희를 생각해 연수를 포기하기도 하는 놀라운(!) 남자친구다.

당신은 세 번쯤 반복해 물을지도 모르겠다.
"왜, 왜, 도대체 왜 헤어지는 거야?"

"널 보면 기대고만 싶어."

ⓒ 연습실 놀땅
연애를 해본 사람이라면 이 말을 이해할 것이다. 너무 편해서 그의 품에 안겨 있고만 싶은, 그렇게만 할 수 있다면 평생 안전하게 살 수 있을 것 같은 그런 안온함. 선희는 그렇기 때문에 석영을 떠나기로 결심한 것이다.

"세상이 너처럼 따뜻하지 않다"는 걸 이미 알아버린 선희에게는 홀로 서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여기에서 '연애와 독립의 공존은 불가능한가'라는 고래의 질문이 제기될 수 있다).

그래서 선희는 석영에게 헤어지자고 한다.

대략의 줄거리를 말했지만 사실은 작품에 대해선 하나도 이야기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작품은 이러한 줄거리보다는 석영에게 이별을 통보한 후의 선희가 겪는 갈등과 고민에 초점을 맞추기 때문이다.

ⓒ 연습실 놀땅
선희의 갈등을 보여주는 여러 가지 소소한 에피소드들이 이어지는데 그걸 보고 있자면 이 작품이 절대로 쉽게 쓰여진 것이 아님을(쉽게 쓰여지는 작품이 어디 있겠느냐만은!) 절로 알게된다.

이를테면 석영더러 오라고 해놓고는 왜 왔냐고 화를 낸다거나, 가위바위보 게임을 하면서 서로를 마구 두들긴다던가, 무딘 칼로 손목을 베려고 하지만 그 피를 귀찮아하지 않고 닦아줄 사람이 없어 죽지 못한다던가 하는 에피소드에서 선희의 내적 갈등-자아를 찾기 위한 홀로서기와 생존을 용이케 하는 애정행각 사이에서의-은 놀라울 만큼 세심하게 드러난다.

그걸 쓴 작가도 대단하지만 구구절절이 설명되었을 리 없는 심리를 읽고 해석해낸 배우도 보통이 아니다.

그렇다고 음습하고 무거운 연극은 절대 아니다. 빠르고 재치 있게 치고 받는 대사와 상상과 현실의 반복적 교차, 얄미운데 미워할 수 없는 후배 직원 재호라는 캐릭터 덕분에 첫 회 관객들은 내내 웃음을 터뜨렸다.

결국 <연애얘기아님> 역시 연애를 소재로 한 이야기였다. 연애 이야기 아니라고 해놓고 선희는 시종일관 연애를 회상하고 고민한다. 그러나 연애는 소재일 뿐이다. 작품은 자아를 찾기 위해 고민하는 한 인간의 내밀한 심리를 그려내고 있을 뿐이다. 그리하여 <연애얘기아님>은 연애 이야기가 아닌 것이 된다.

이 작품의 재미는 바로 여기에 있다. 연애와 연애가 아닌 것의 오묘한 교차점. 이 연극이 시장할 때 끓인 라면 냄새만큼이나(왜 굳이 라면 냄새인지는 직접 와서 확인하시길) 좋은 이유도 그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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