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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틀 동안 저 인간하고 무슨 일 있었수?”
저녁 식사 후 송하령이 들러 보겠다 하여 담천의가 머무는 객실에 들렀다가 돌아 나오는 길에 서가화가 물은 말이었다. 담천의와 같이 방을 쓰는 갈인규가 치료 후 그가 잠이 들었다고 해서 만나보지도 못하고 나오는 길이었다. 송하령과 둘만 있게 되자 그녀는 처음부터 묻고 싶었던 말을 꺼낸 것이다.
“얘는... 무슨 말을... 상처가 심해서 보러오자 했지.”
송하령은 시선을 돌렸다. 말도 안되는 소리하지 말라는 식이었지만 강한 부정은 아니었다.
“아니야. 언니. 귀신은 속여도 내 눈은 못 속여.”
서가화의 다긋치는 말에 송하령은 굳이 속일 필요도, 또한 속일 것도 없다고 생각했다.
“많은 말을 나눴어. 가슴 속에 어두운 상처가 많은 사람이야.”
서가화는 순순히 시인하는 송하령을 놀란 눈으로 바라 보았다. 자기가 아는 송하령은 저런 여자가 아니다. 사실 송하령은 그녀가 진심으로 인정한 여자였다. 몰락한 가문이라고는 하나 주위에서 보는 송가(宋家)는 언제나 경외의 대상이었다. 무관 출신으로 정상에 오른 서장군가와는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송하령은 외부로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를 아는 사람들의 평가는 서가화 이상이었다. 처음에는 질투가 나기도 했지만 그녀와 자주 만나면서 서가화는 있는 그대로 받아 들였다.
그녀에게는 자신이 가지지 못한 침착함이 있었고, 주위 사람들이 함부로 하지 못하게 하는 우아한 기품이 있었다. 자신은 강남삼미에 들만큼 미모에 있어서 자신이 있었지만 한때 송하령의 화려하거나 요염하지 않은 고아한 미모를 부러워 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서가화는 서가화였다. 그녀에게는 남들이 모두 인정하는 미모와 다른 사람이 가지지 못한 솔직함, 그리고 주위 사람들을 끌어 모으는 재치와 판단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헌데 뉘집 자젠데 저 지경이 됐데?”
표사로 전락한 모습을 보고 하는 말일 것이다.
“자세히는 몰라. 어렸을 때 부모님이 돌아가신 것 같아. 그 뒤로 무공을 익혔지만 왜 자기 자신을 팽개쳤는지는 모르겠어.”
“그게 이상하다구. 언니. 무림에서 풍운삼절이 차지하는 비중이 얼마나 큰 줄 알아? 풍운삼절을 그렇게 꺽을 정도면 이 중원천지에서도 손가락에 꼽힐 수 있어. 그런 그가 삼년씩이나 뭐 때문에 그런 표국에 있었겠냐구.”
“...........”
할말이 없었다. 사실 그에 대해 그녀가 아는 것이 얼마나 될까? 별로 없었다.
“여동생이 하나 있대. 지금 어디에 있는지 모르지만...”
기껏 변명처럼 한 말이었다. 서가화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떡였다.
“아마 내가 직접 보지 않았다면 믿지 않았을 거야. 오히려 말하는 사람을 거짓말한다고 몰아댔겠지. 하여간 희귀한 사람은 맞아. 그 때문에 우리는 큰 위기를 넘겼고...”
“고맙지. 뭐....”
그를 위해 변명하는 송하령을 보며 서가화는 그녀의 마음이 어쩌면 이미 기울어져 있다고 생각했다. 아까 식사 때 보여준 그녀의 행동은 돌발적이었다.
“그래 말을 나누다 보니 저 인간이 마음에 들었수?”
송하령은 서가화를 빤히 쳐다 보았다.
“............”
“뭘 그렇게 봐. 사람 민망하게... 아니면 아니라고 할 것이지...”
서가화는 갑자기 송하령이 쳐다 보자 당황하며 말끝을 흐렸다. 송하령의 저런 모습은 언제나 사람을 당황하게 한다. 도대체 속을 헤아릴 수 없다. 서가화는 시선을 돌리고 발걸음을 떼는 송하령을 향해 삐죽 혀를 내밀었다.
“끝까지 대답 안해 줄 꺼야? 하기야 뭐 마음에 들 수도 있지.”
“............”
송하령은 다시 서가화를 바라 본다. 그러다 마치 탄식처럼 한마디를 흘렸다.
“그래.”
서가화는 놀랐다. 송하령과 담천간의 묘한 흐름이 있고, 서로를 어느 정도 생각하고 있다고는 생각했으나 단 사흘 만에 송하령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온 것은 의외였다. 그런 말은 확신이 없으면 나올 수 없는 말이었다. 이미 마음 속으로 결정하지 않으면 나올 수 없는 말이었다.
“언니... 정말로..?”
“들어 가자. 나도 피곤해.... 옷도 갈아 입고 싶고 ....”
그녀는 서가화에 앞서 함께 배정된 객실로 들어 갔다. 뒤에 서있던 서가화는 마치 둔기에 맞은 듯 멍하니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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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의 편안한 휴식이었다. 초저녁에 상처를 아물게 한다는 약초를 끓인 물에 목욕을 하고, 뒤 따라온 갈인규의 치료를 받은 그의 몸은 기분 하나만으로도 상쾌했다. 그래서 잠이 들었나 보다.
그의 눈이 떠진 것은 새벽 묘시(卯時) 초반 무렵이었다. 어둠 속에서 잠들어 있는 갈인규를 깨우지 않기 위하여 조용히 한 쪽에 단정하게 놓인 청색의 단삼(單衫)을 걸쳤다. 수화라는 여인이 갈아 입으라고 속옷까지 챙겨 가져다 놓은 것이었다.
그는 옷을 입고 나서 조용히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섯다. 고요함 속에서 어슴프레 아름답게 꾸며진 정원의 모습이 보이고 그 사이를 가로 지르는 연못이 보였다. 새벽의 풋풋함과 습기가 그의 얼굴로 느껴졌다. 그는 천천히 걸어 연못가에 다가갔다.
새벽 공기가 상쾌하게 느껴진 것이 언제였는지 모른다. 그 동안의 나태와 팽개쳐 버린 삶이 단 열사흘 만에 바뀌어져 이렇듯 낯선 곳에 있는 자신의 모습이 너무나 생소하게 느껴졌다. 송하령에게 약속했던 것과 같이 그는 이제 그의 삶을 사랑할 것이다.
아직 살아가야 할 이유가 있고, 이렇게 숨쉬고 살 수 있다는 것에 감사했다. 그러고 나니 그에게는 할 일이 너무나 많았다. 삶을 내팽개쳤을 때는 모르겠더니 지금 자신에게는 너무나 할 일이 많다고 생각했다.
부모님의 두 눈을 편안히 감겨드려야 하고 동생도 찾아봐야 했다. 그리고 버려진 삼년 동안 그의 황폐한 정신을 갉아 먹던 무도(武道)의 한계도 벗어나야 했다.
그가 알고 있는 무공 세가지. 그것 중 어느 하나라도 완벽하게 익히면 적수가 없을 것이라던 사부 아닌 사부의 말은 옳았다. 그러나 그는 그 끝을 보지 못한 채 성급하게 덤벼들었고, 그도 아닌 그의 호위로 보이는 상대에게 철저하게 패했다. 검을 꺾었으나 그것은 언제나 그를 괴롭혔다.
하지만 그는 다시 시작할 것이다. 두려워 잡지 못했던 검자루가 그의 손에 잡혔던 그 순간에 그는 푸근한 고향에 돌아 온 느낌을 받았다. 잊어버렸던 검자루는 마치 자신의 신체 일부분이 된 듯 익숙하게 다가 왔던 것이다.
그가 할 첫번째 일은 아마 송하령을 소림사까지 데려다 주는 일일 것이다. 그 뒤에 할 일은 그의 두번째 고향을 찾는 일이 될 것이다. 아홉살 이후 십이년 동안 자신 혼자 살아왔던 바로 그 곳. 가면 아마 그를 만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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