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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월 25일부터 29일까지 계속되었던 황금 같은 추석 연휴. 모처럼 오빠네 식구들이 와서 3일 정도 함께 생활하게 되었다.
제 버릇이 어디 갈까? 웬만하면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는 가급적 PC작업을 삼가던 나도 어쩔 수 없는 연재기사 송고 때문에 연휴기간동안 PC에 붙어 앉아있는 시간이 좀 많았다. 결국 기사는 무사히 완료되어 송고했고 딸이 송고한 기사 보는 습관이 든 칠순 노모는 당연히 내 방을 들락날락 거리며 PC 앞에 앉아 기사 보는 재미에 빠지셨다.
그러자 조카들은 실제 인터넷을 하는 할머니의 모습에 놀라워하며 이런 말을 툭 내뱉는 것 아닌가?
"할머니도 인터넷을 하실 줄 아니, 이제 우리 집에서 컴맹은 엄마 혼자네…."
"컴맹은 엄마 혼자네!"
조카애들의 너무도 거침없는 말투에 조금 놀라 올케언니의 눈치를 슬쩍 보니 책을 보던 올케언니는 의외로 당당하게 이렇게 얘기하는 것이었다.
"그래, 난 인터넷 할 줄 모르지만 별로 하고 싶은 마음도 없어. 정보는 인터넷 아니어도 어디서든 얻을 수 있으니까…."
한마디로 인터넷을 배우고 싶은데 배우기 힘들어서 못 배우는 게 아니라 인터넷 필요성을 못 느껴 인터넷을 배우지 않는다는 올케언니의 당당한 태도를 보면서 매우 색다른 느낌이 들었다.
이러한 태도를 뭐라 정의 내려야 할까? 인터넷을 배우고 싶은데 배우지 못해서 된 컴맹이 아니라, 배우려면 충분히 배울 수 있는데 배울 필요를 못 느껴서 컴맹을 자처하는 사람들….
이들에 대한 적당한 단어가 떠오르지 않다가 문득 '자발적인 컴맹'이라는 단어가 생각났다. 분명 이 디지털 사회에서도 우리 올케 같은 자발적인 컴맹세력 또한 만만치 않게 많으리라는 생각을 하면서 말이다.
아날로그 사회의 가치를 지키며 사는 자발적 컴맹
며칠 후 이사간 지 얼마 안된 아는 두 분의 가정을 우연히 방문하게 되었는데 집안에 들어서자마자 환갑이 지난 노인 부부가 사는 집 거실 정면에 이제껏 보지 못한 컴퓨터들이 설치되어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갑자기 컴퓨터가 설치된 이유가 몹시 궁금하던 차 그 분들이 먼저 자랑삼아 말씀하셨다. 컴퓨터 활용방법을 가르쳐주는 강좌에 나가 석 달 동안 컴퓨터를 배웠노라고….
그렇지만 그분들도 우리 어머니처럼 워낙 키보드 환경에 익숙하지 않다 보니 주로 자주 가는 사이트를 '즐겨찾기' 해놓고 즐겨찾기 되어 있는 사이트만 이용하는 눈치였다. 그래도 컴퓨터 전원조차 켜지 못하는 사람보다는 나은 거라며 함께 컴퓨터 교육받기 거부한 남편을 은근히 빗대어 말하고 있었다.
그러자 그 분은 "내가 컴퓨터를 안 배운 이유는 인터넷을 하느니 그 시간에 책 한 줄이라도 더 읽는 게 더 유용하기 때문이야" 하며 당당하게 자신의 소신을 피력하는 게 아닌가?
우리 사회 구성원 중 디지털 격차가 비교적 큰 정보화 취약집단(저소득층, 농어민, 저학력층, 장노년층) 중에서도 특히 정보활용능력이 떨어지는 장노년층에서 또 한 사람의 당당한 '자발적 컴맹'을 발견한 뜻깊은 자리였다.
우리 사회에서 이런 자발적 컴맹의 비율은 대략 어느 정도일까?
조사된 결과는 없지만 지난 9월 29일 한국마이크로소프트(MS)와 사회복지법인 케어코리아에서 발표한 자료로 대략 추측해 볼 수 있다. 서울시내 3개 노인종합복지관에서 정보화교육 초급과정 이수 중인 55세 이상 장·노년층 111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컴퓨터 이용관련 설문조사 결과, 그 동안 컴퓨터를 배우지 않은 이유에 대해 13%가 필요성을 못 느꼈다고 대답했다.
이들이 어떤 긴박한 필요에 의해 컴퓨터를 배우기 전까지는 자발적인 컴맹이었다는 사실을 추측할 수 있다. 그렇다면 장년층 중 약 13% 정도가 대략 '자발적인 컴맹'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디지털 세상을 거부하고 한사코 컴맹이 되고자 하는 자, 물론 이 자발적 컴맹들의 경우는 이미 사회에서 은퇴했거나 가정주부이므로, 컴퓨터를 다루지 못하면 먹고 살 수 없는 사회에서는 약간 벗어나 있는 세대들이다.
또한 이들의 특징은, 첫째 주로 중장년층이 컴퓨터를 배워서 하고 싶다는 '인터넷을 통한 생활정보 습득'은 신뢰하지 않는 대신 정보는 꼭 종이신문이나 TV, 책을 위주로 습득하는 형태를 신뢰하며, 둘째 바둑이나 장기 같은 취미를 즐겨하지 않는 성향이다보니 온라인게임에는 그다지 흥미 없어 하는 성향이고, 셋째 성의 없이 날리는 이메일 보다는 또박또박 예쁘게 쓴 편지를 더욱 신뢰하는 성향이 있다.
이런 성향이다 보니 당연히 스스로 생각하기에 정보습득이나 게임, 이메일 등 쓸모 없는 일을 위해 주로 컴퓨터를 배우는 동 세대를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이처럼 컴퓨터에 관한 안 좋은 인식이 머릿속에 박혀 있다보니 스스로 컴퓨터 배우기를 거부하고 컴퓨터를 열심히 배워 다룰 줄 아는 사람을 부럽다고 생각하기보다는 마음 속으로 나와는 상관없다거나 유치하다고까지 생각하는 사람이다.
얼핏 보기에 이 세상과 배타적인 생각을 가지고 사회에 적응해서 살아가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는 고집스런 성격처럼 보이지만 이들 나름대로는 스스로 소신과 선택에 따라 이 사회에서 자신의 방식대로 최선을 다해 성실하게 살고 있는 사람들이다.
문득 이 디지털 세상에서 용감하게 컴맹을 자처하고 컴퓨터를 배우려 하지 않는 이런 자발적인 컴맹들을 보면서 자신의 소신대로 살고있는 소수의 목소리 또한 소중한 것이며 존중해주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정작 본인은 배울 필요를 느끼지 않는 이들마저 정보화 격차네, 정보화 취약집단이네 뭐네 하는 한 무더기로 묶어 당장 컴퓨터를 안 배우면 큰일날 듯한 어투로 호들갑을 떨고 있는 것이 우스워 보였다.
물론 지금 당장 자발적 컴맹이 되고자 컴퓨터 교육을 거부하는 사람들도 시간이 흐르고 컴퓨터를 배우지 않으면 안될 어떤 간절한 필요가 생기면 기존의 부정적인 태도에서 벗어나 배우려고 할 경우도 분명 생길 것이다. 그러나 그러기 전에는 어느 누구도 이들의 용감한 선택을 방해해서는 안되리라 본다.
오히려 나는 고집스런 이들을 보면서 마음 한구석으로는 아주 실낱같은 위안이 생겼다. 용감한 아날로그형 인간인 자발적 컴맹, 그나마 사회의 소수자인 이들이 이들 기준에 따라 별 불편 없이 살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아직 우리 사회가 점점 살기 각박해져 가는 이 디지털 사회의 때가 덜 묻혀졌다는 것이고 어느 정도 아날로그시대의 순수함이 살아있다는 증거일 테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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