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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회 서울세계무용축제(SIDance 2004) 참가작 오스트레일리아 무용단 '발레 랩'의 <증폭(Amplification)>.

얼마나 파격일까? 홍보용 사진만 보아도 그런 궁금증을 갖지 않을 수 없다. 간추린 동영상을 보면 더욱 그렇다. 선정적인 것과는 거리가 먼 사진과 동영상이긴 하지만, 무용가들이 아무것도 입지 않고 있는 것이다. 남녀 무용가 모두 그렇다. 그렇다면 그랬을 때 따라올 만한 ‘오해’를 따돌릴 무엇인가가 있어야 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이 무용의 생명일 것이다.

▲ <증폭>은 교통사고로 죽음에 처하는 1.6초의 순간을 증폭시킨 도발적 실험극이다
ⓒ SIDance
무용이란 ‘몸짓으로 된 시(詩)’여서 어떤 이야기인가를 미리 알고 보면 재미가 없다. 시인이 “나는 이 시로 이렇고 저렇고 한 마음을 노래했다”고 말한 것을 미리 알고 읽으면 재미가 없는 것과 같지 않은가. 그래서 자료 읽기를 생략하고 보기로 했다.

선입관을 없애기 위해, 이 공연이 오스트레일리아 멜버른에서 초연했을 당시, 매진 사례를 기록했으며 그린 룸 상을 수상하고 오스트레일리아 무용 대상 후보에 오르는 등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다거나, 시드니와 브리스번 등 국내뿐만 아니라 도이칠란트 함부르크, 잉글랜드 맨체스터와 글레스코우 등의 유럽 해외공연에서도 호평을 받았다거나 하는 사실을 모두 철저히 잊고 보기로 했다.

1.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 안으로 들어서니, 온통 검정색 내장에 무대 뒤쪽에만 흰 막이 가로막고 있다. 오른쪽에 음향기기가 보인다. 무대예술에서 음향의 대부분은 음향실에서 하기 마련인데, 이건 다르다. 음향의 마술사처럼 보이는 사람(린튼 카)이 직접 무대 한 편에 출연한다. 그가 다이얼과 버튼을 조종하며 라이브로 턴테이블 사운드를 시작하자 아우성치는 듯한 기묘한 음향이 흘러나온다.

몸에 달라붙은 짙은(내복 같은) 회색 옷차림의 남자 무용가와 여자 무용가, 역시 짙은 회색 옷차림의 여자 둘, 그들은 아우성을 친다. 여자 둘은 엎치락뒤치락 싸운다(그러나 아름다운 몸짓으로).

그런데 남자와 여자는 다르다. 여자의 가학에 남자가 일방적으로 당한다. 역전되어 남자가 여자를 공격한다. 다시 역전되어 여자가 남자를 가학한다. 그때 남자 한 명이 더 나온다.

암전(暗轉)되었다가 적색 조명. 막에 비치는 그림자가 붉다. 이번엔 여자가 둘, 남자가 둘(이때쯤 나는, 처음에도 여자 둘, 남자 둘의 아우성 중에 여자가 한 명 더 들어왔던가 하는 혼돈에 휩싸인다)이다. 두 여자는 그냥 누워 있고, 이번엔 왜 한 남자가 다른 남자의 옷을 발목까지 벗기는 걸까?

암전되었다가 다시 시작되는데, 이번엔 여자 둘이 멀리 마주 앉아 바라보고 있고, 두 남자 양쪽에서 가학을 한다. 두 여자의 입에서 테이프를 뽑아내어 연결시켜 주는데, 어느 순간 끊어져 버린다. 커뮤니케이션의 단절을 의미하는가?

두 여자가 춤을 추는데 이것이 꼭 새의 모습이다. 그러나 펼치기도 하던 날개는 접히고 말았다. 허리에 손등을 댄 것으로 표현했던가. 이번엔 자동차가 등장한다. 장난감 자동차다. 끈에 달려 다가온다.

2.

암전되었다가 불빛이 살아나자 예기치 못한 의식(儀式)이 펼쳐진다.
자루 안에 각각 들어간 여자 둘이 빠져나오는데, 눈부시도록 흰 살결의 맨몸이다.

죽은 여자 둘, 가슴이 완전히 노출되었지만 파격이라는 느낌이 들 뿐 절대로 선정적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살색 무용 팬츠를 입었다. 흰색 천과 오렌지색 천이 조화를 이루며 두루마기 남녀 두 쌍에 의해 각기 두 여자(시체)를 감쌌다, 펼쳤다, 다시 감쌌다 한다. 그때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우리 나라에서 하는 공연이라 무용팬츠가 필요했을까?'

▲ 남녀 무용가 여섯 명은 '죽음에 이르는 아주 짧은 순간'을 맨몸으로 열연하는 치열함을 보였다
ⓒ SIDance
오해였다. 암전되었다가 불빛이 다시 살아나는데, 이번엔 남자 둘이 맨몸이다. 여기서 오해가 풀린다. 우리 나라에서의 공연이라고 해서 완전히 맨몸으로 가지 않았던 게 아니다. 한 남자는 모로 쓰러진 채 그대로 있으니까 보이지 않지만, 세 여자에게 천천히 발길질을 당하며 관 속으로 들어가 눕혀지는 남자는, 놀랍게도 맨몸의 모든 걸 드러내 보인다. 이건 분명히 파격이다. 아니, 격외(格外)란 말이 옳을 것 같다.

3.

암전되었다가 불빛이 살아나며 또다른 의식이 시작된다. 이번엔 키가 큰 한 여자가 아직 살아 있는 나머지 한 여자의 옷을 벗긴다. 조명이 어두워졌다 꺼졌다 하며 여자의 마지막 노출을 막는다(남자는 완전히 노출되었지만 여자는 조명 효과가 완전 노출을 철저히 가려 주었다). 맨몸이 된 그녀는 흰 막 앞에 뒤로 돌아 서 있다. 맨몸이지만 그저 맨몸일 뿐, 다른 흉계가 담겨 있지 않다.

키 큰 여자는 쓰러져 있는(목숨을 잃은) 맨몸의 남자를 끌어다가 무대 중앙에 던져 버린다. 이어서 이미 의식을 치른 죽은 두 여자를 맨몸의 남자 위에 던져 놓는다. 다음엔 어떤 일이 벌어질까 궁금하도록 잔뜩 긴장감을 주며 관에 있는 남자를 끌어내다가, 세 사람이 쓰러져 있는 곳에 아무렇게나 던져 놓는다. 마지막으로, 객석을 등지고 막 앞에 서 있는 맨몸의 여자를 끌어다가 네 사람 위에 던져 놓는다.

그런데, 마지막이 아니다. 죽은 다섯 사람의 자세를 모두 바꾸어 더 가까이 포개어 놓고는, 그렇게 다섯 남녀를 한 곳에 모아버린 키 큰 여자, 스스로 옷을 벗는다. 무용복 상의를 벗고 브래지어를 풀고 무용복 하의를 벗는다. 그러고는 맨몸이 되어 두 남자, 세 여자가 쓰러져 있는 곳으로 천천히 다가가 쓰러진다. 불이 꺼진다.

그때, 박수가 터져나온다. 그런데 미안하지만, 아직 끝난 것이 아니다. 음향이 계속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일부 관객의 관람 미숙일까, 그만큼 감동이 컸기 때문일까. “정말 작품이다” 하는 소리가 들린다.

가운 차림의 무용가 여섯 명과 음향의 마술사도 함께 나와 관객에게 인사하니, 많은 박수가 쏟아진다. 객석에 있던 안무가 필립 아담스가 나와 함께 인사를 하니, 박수 소리 더욱 커진다. 오후 여덟 시에 시작된 공연인데, 나의 아날로그 시계 바늘은 오후 아홉 시를 가리키고 있다. 공연 시간, 꼭 한 시간. 멋지게 끝났다.

그제서야 나는 연극 관련 자료를 꺼내어 확인한다. 나는 과연 무엇을 본 것일까. 안내 프린트 한 장도 없이 무용을 관람하고서 이 무용이 무엇을 말하는가를 알 수 있다는 건 무리다.

10여 년 전인가, ‘무용의 해’에 ‘무용 축제’가 벌어진 대학로 문예회관(대극장·소극장)에서 하는 무용 공연을 빼놓지 않고 보러 다닐 정도로 무용광인 나는, 아직도 정보없이 작가와 안무가가 이야기 하려는 바를 정확히 짚어내지 못한다. 무용은 그만큼 어려운 예술 과목이다.

<증폭>은 교통사고를 당한 1.6초 동안의 짧은 순간에 일어나는 분리 작용을 정지시켜 증폭해 본 작품이라고 한다. 오스트레일리아 멜버른의 한 응급병동에서 인터뷰를 하고 냉동보관된 시체를 관찰, 연구한 노력 끝에 탄생되었는데, 교통사고를 정신적·육체적 분열에 대한 은유로 활용하고, ‘소리와 빛과 신체’, 이 세 가지 영향에 반응하는 인간의 육체 영역을 탐구하였다는 것이다. 이 작품을 만들기 위해 모형자동차 충돌 테스트까지 거쳤다는 경험은 재미있다.

사람은 죽는다. 누구나 죽는다. 죽지 않는 사람은 없다. 다만 짧게 살고 오래 살고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런데, ‘숨이 살아 있음’에서 ‘죽음’에 이르는 순간은 누구나 아주 짧다. 1.6초.

그러나 <증폭>은 그 1.6초 동안의 짧은 순간을 무려 한 시간 동안이나, 그러나 오로지 1.6초가 흐른 듯 조금도 지루하지 않게 치밀하고 매력적으로 그려 놓았다. 그래서 아름다움이 창조되었다. ‘죽음’이란 결코 아름다운 게 아니지만, ‘죽음’을 예술로 창조시켜 놓으면 그 또한 아름다운 것이다.

실험예술이란 그 고뇌의 향기가 느껴지지 않으면 괜히 ‘폼’만 잡았을 뿐인 것. 다음 순간을 예측할 수 없어 한 시간 내내 보는 이를 숨죽이게 한, 오스트레일리아 무용단 ‘발레 랩’의 <증폭>은 1/10초라도 눈을 뗄 수 없도록 만든, 정말 보기 드물게 실험에 성공한 예술작품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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