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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보천리(牛步千里)'의 지혜를 가르쳐주고 있는 이 책은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사형 선고까지 받았다가 15년으로 감형된 뒤, DJ 정부에 이르러 5년간 복역으로 감옥 생활을 끝마치고 2000년 8월에 출소한 문명교류학의 대가 정수일 교수의 옥중편지를 모은 것이다. 간첩 혐의로 감옥에 갇힌 고통스런 상황에서 아내와 주고받은 편지글들은 과연 어떤 내용을 담고 있을까?

▲ <소걸음으로 천리를 가다> 표지
ⓒ 창비
그는 "편지란 제때 제때에 소식을 알리거나 용건을 적어 보내는 글로서 공개하지 않는 것이 상례인데, 이러한 상례를 어겼으니 몹시 당혹스럽다"고 책을 내는 심정을 토로했다.

나는 이따금 이상한 꿈을 꿀 때가 있다. 느닷없이 자기 몸 크기밖에 안 되는 밀폐된 직육면체의 공간 안에 갇혀서 도무지 빠져나갈 재간이 없거나, 무고한 사람이 갑자기 죄를 뒤집어쓰고 감옥에 들어가는 등등의 꿈을 꿀 때가 있다.

누가 나가라고 철창문을 열어주지 않으면 나갈 수 없는 감옥에 갇혔을 때, 바깥사람들과의 의사소통은 당연히 단절된다. 그 꽉 막힌 현실 속에서 바깥사람들과 오로지 할 수 있는 대화란 '편지 왕래'일 뿐.

도무지 창조라고는 없는 다람쥐 쳇바퀴 돌 듯 하는 단조로운 일상 속에서 있다보면 오히려 마음은 호젓해진다.

저자는 "잊혀가던 추억이나 향수, 즐기던 명시나 잠언, 뜨락의 한 포기 풀이나 꽃, 두둥실 떠 있는 달, 흘러가는 시간, 송구영신 등 극히 예사로운 일들'이 떠오를 때…, 옥담 너머의 사람들 특히 가까운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거나 마음의 소식(마음에 품고 있는 생각)을 알리고 싶은 충동을 가끔 받게 된다"고 했다.

감옥에 가보지 않은 사람일지라도 병영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러한 느낌을 충분히 받았을 것이다. 신체 건강한 대한민국 남자라면 가고 싶지 않아도 의무적으로 꼭 가야만 하는 군대에서의 경험만 보아도 그러한데…. 정육면체에 가까운 밀폐된 공간 안에서의 그리운 이와의 '대화의 단절'이란 오죽하겠는가.

▲ 옥중에서 쓴 각종 메모작업를 정리한 원고뭉치
ⓒ 창비
저자는 이 책에 실린 편지글보다 꽤 많은 내용의 편지를 보냈던 모양이다. 내용은 거의가 '마음의 소식'을 아내에게 전하는 것이다. 그러나 저자는 충동받을 때마다 장광설이며 지루한 넋두리를 많이 늘어놓았기에 주위의 출간 요청에도 응하지 않았다고 한다. 막상 책을 내놓기 바로 전에 머리말을 쓸 때도 꽤 망설였던 모양이다.

"이 글은 당시에 보냈던 편지글 그대로가 아니고, 지면이 제한된 데다가 생각나는 대로 끼적거린 글이라서 막상 책으로 엮자고 보니, 자구는 물론 내용이나 엮음새를 가심질하면서 첨삭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책은 모두 3부로 나뉘어져 있다. '제1부 청년들아, 나를 딛고 올라라', '제2부 새끼줄로 나무를 베다', '제3부 세월은 사람을 기다려주지 않네'.

이 책에는 저자의 치열한 40년 학문 인생과 학문 개척에의 열의, 분단을 해결하지 못하는 기성세대의 한 지성인으로서의 고뇌와 끝없는 겨레 사랑, 민족사의 복원을 위한 노력, 어머니 사랑, 후학들에 대한 사랑 등이 명문장으로 400여 쪽 안에 빽빽하게 담겨 있다.

이 글에서 나의 가슴을 가장 끌어당긴 것은 '사형을 구형받고서'와 '마(魔)의 2주'라는 작은 꼭지였다.

「1996. 12. 4
초겨울 추위가 이렇게 매섭기로는 서울에 와서 처음 당하는 것 같소. 예년 같으면 한 달 후인 정월초에나 있을 법한 추위요. 한나절 기온도 0。C를 밑도니 예사롭지 않구먼. 올겨울엔 동장군의 엄습이 이만저만이 아니라고들 하오. 영어(囹圄) 속의 무지렁이 같은 우리 약골들을 혼내줄 심보인가보지. 그러나 기왕 모든 것을 각오한 터라 별로 개의치 않소. 그저 모든 것을 천연스럽게. 그러나 수동이 아니라 능동으로 받아들일 뿐이오. 냉방이지만 방안에서는 냉수를 끼얹어 마찰하고 바깥에서는 러닝셔츠 바람으로 운동을 하면서 추위에 맞서고 있소. 햇볕이 나면 그마저 벗어던지고 살가죽을 태우오. 그런데 애꿎게도 요즘은 해님이 몸을 사려서 그런지, 아니면 스산한 먹구름이 심술을 부려서 그런지 햇볕이 통 나지를 않소. 요즘처럼 햇볕의 고마움을 느껴본 적은 일찍이 없었소.

(중략)

지난주(11월 28일)에 나는 법정에서 사형이란 극형을 구형받았소. 물론 생에 대한 인간본연의 애착으로 보면, 불운이라고나 할까 비명이라고나 할까 하는 이런 식의 운명이 없었으면 좋으련만, 인과율(因果律)로 따지면 항변의 여지가 없는 귀결일 수도 있는 것이오. 물론 나도 보통인간으로서, 더욱이 이 시점에 이르러서까지도 못한 일을 너무나 많이 남겨두어 아쉬워하는 미련의 인간으로서, 또 이 시대, 이 겨레를 위해 무언가 더 남기고 싶은 의욕이 간절한 대망(待望)의 인간으로서, 생을 더 연장하고 싶은 마음, 아니 그 이상의 절규마저 어찌 없겠소. 그러나 인생의 도리 앞에서는 스스로가 수긍하고 대범해져야 하는 법이오.

(중략)

이제 며칠 있으면 선고의 날이오. 당신이나 나, 그리고 주위의 여러분, 우리 모두는 '할 수 있는 일을 다 했으니' 이제는 그저 '천명을 기다릴' 수밖에 없소. 당신에게는 모든 것이 너무나 충격적이지. 그러나 오늘도 당신은 면회를 와서 그러한 내색은 좀처럼 하지 않고 오히려 나를 위로하고 격려해주기만 했소.

나는 요즘 당신을 보면서 부드러움이 결코 약함만은 아니고, 그것이 강해질 때는 더 강하다는 유강법칙(柔强法則)을 새삼 터득하고 있소. 부디 건강하오.」('사형을 구형받고서' 중에서)

▲ '사랑하는 당신에게'로 시작되는, 저자가 아내에게 보낸 옥중편지 원본
ⓒ 창비
「구형에서 선고까지의 지난 2주간(11.28~12.12)은 나의 인생역정에서 실로 특기할 만한 순간이었소. 극형에서 15년형으로의 과도(過度)가 이루어졌으니, 형질(形質)로 보면 죽음을 당하는 것과 살아남는 것 사이에는 차이가 있겠지만, 삶의 가치로 보면 그게 그것이 아니겠소. 굳이 내 논리에 맞추어보면, 생의 인위조작적 유한에서 자연순응적 유한으로 복귀한 셈이고, '작은 유한'이 '큰 유한' 앞에서 머리 숙인 격이 되겠지.

(중략)

며칠 전 선고장에서 재판장은 "피고인은 소설 같은 인생"을 살아온 사람이라고 선고의 모두(冒頭)를 떼더군. 나는 그 말에 이의(異意)를 달지 않았소. 누구는 나더러 "드라마 같은 인생을 살아온 사람"이라고도 했소. 그 말이 그 말이오. '마의 2주', 실로 나의 '드라마 같은 인생'에서 또하나의 드라마 같은 장면이 재현된 셈이오. 어쩌면 가장 극적인 장면이겠지.

(중략)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이 드라마의 엮음새 속에서 출연한 하나의 작은 장면을 당신에게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소. 선고 전날 오후 검찰에서 갑자기 부른다고 하기에 엉겁결에 출두했소.

(중략)

그런데 뜻밖에도 몇 년간 심혈을 기울여 집필한 『고대문명교류사』 원고가 입력된 컴퓨터와 일부 복사된 원고를 내 앞에 놓는 게 아니겠소? 어안이 벙벙했소. 당신도 알다시피 이 책은 내가 문명교류사의 학문적 정립을 위해 집필한 것으로 1996년 원고를 컴퓨터에 입력해놓고 한 출판사와 그 해 연말까지 출판하기로 약속까지 한 책이오. 그런데 그 해 7월에 내가 검거되는 바람에 무산되고 말았지. 더구나 원고가 입력된 컴퓨터는 해체되어 몰수되었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이 책은 영영 증발할 것으로 판단해 늘 허탈감과 아쉬움을 금하지 못해왔소,

(중략)

그 원고에 수갑이 꽁꽁 채워진 손길이 닿는 순간, 나는 짜릿한 전율을 느꼈소. 그런가 하면 가슴 깊은 곳에서는 뜨거운 것이 뭉클했소. 증발된 것으로만 여겨왔던 그 땀이 배고 손때 묻은 작품이 되살아난다는 감격으로, 그리고 학문이 귀히 여겨져야 한다는 그 예지 앞에서 종시 흥분을 가라앉힐 수가 없었소. (중략)

이제 나에게 남아 있는 밑천이라고는 학문밖에 없으니 그것을 잘 유용해야 하지 않겠소. (이해 생략)」('마의 2주' 중에서)


이 글을 읽는 순간 독자인 나도 짜릿한 전율을 느꼈고, 가슴 깊은 곳에서 뜨거운 것이 뭉클하게 올라오는 느낌을 받았다. 나는 문예창작과 다니던 시절에 술에 잔뜩 취해 "이게 무슨 원고냐"며 그동안 육필로 써놓았던 원고와 타이핑된 원고를 모조리 찢어내 버리고, 한동안 허탈 병에 빠져 지낸 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보다 더한 아픔이 지난해 여름에 찾아왔다. PC 본체를 떨어뜨려 하드디스크가 손상되었던 것이다. 디스크 복구에 정평이 난 곳에 맡겼는데도 불구하고 '완전 복구 불능' 판정을 받았다. 거기에는 고려의 역사를 새롭게 해석한 역사소설 앞부분 1500여 매를 포함한 무려 2만장의 원고가 들어 있었다.

마침 플로피 디스켓에 보관된 수필 원고 한 편을 발견할 때도 가슴에 뭉게구름이 피어오르는 기분이었는데, 저 문명교류학의 대가가 몇 년에 걸쳐 완성한 원고를 다시 찾았으니 얼마나 기쁘셨겠는가.

▲ 국어사전에서 만난 낯선 우리말을 보던 책에 적어가며 복습했다
ⓒ 창비
「그간의 편지에서 나는 넓게는 내가 걸어온 길과 삶에 관한 나의 생각(인생관), 세상사에 관한 나의 견해(세계관)에서부터 좁게는 지금의 옥살이에 이르기까지 계기마다에 이것저것 적지 않은 것을 술회하고 논하기도 했소. 물론 빠진 것도 있고 미흡한 것도 적지 않으며, 게다가 환경이 환경이니만치 다 말할 수 없는 한계나 제약도 있었소. 그렇지만 나름대로의 좌표를 따라 나를 한번 정리해봤다는 데서 의미를 찾고 일말의 자위를 느끼오.」

그는 옥중에서 삶과 앎의 심조(深造, 심오한 이치를 깨닫는 깊은 조예)를 터득하고 그 실천에 힘을 기울였다고 했다.

그가 옥중에서 써낸 집필물의 양을 모으면 200자 원고지 2만5천매 가량 될 거라고 했다. 참고자료를 마음껏 이용할 수 없는 상태에서 쓴 것이니 그 양은 엄청난 것이다. 그는 그 모든 것이 자신의 심혈의 결정체이므로 더없이 소중하다고 했으며, 특히 문명교류학 연구의 핵심인 '실크로드학'의 학문적 정립을 위한 메모작업을 완성했다는 것을 가장 큰 성과와 보람으로 생각한다고 했다.

「요즘 당신의 건강이 말이 아닌 것 같소. 면회실의 작은 투명창 너머로 희미하게 보이는 당신의 얼굴색이 그렇게 창백할 수가 없소. 끼니도 거르고 잠도 설치니 그럴 수밖에 없겠지. 여린 당신의 마음씨로 이 모진 세파를 헤쳐나가자니 정녕 힘에 부칠 수밖에 없겠지. 이제 나에게 있어서 당신은 인생의 반려자에 더해 후견인까지 되었소.」 ('40년 학문인생' 중에서)

이 콧날이 시큰하고 가슴에 물기가 오게 만드는 글을 읽노라면 저자의 겨레 사랑 또한 얼마나 클 것인가를 짐작하게 한다. 그는 글로 쓰기에는 너무 모자랄 정도로 짓궂은 옥바라지에 노고를 아끼지 않은 '집사람'에 대한 고마움과 위로의 마음이 크다고 했다.

▲ 대학원생들에게 하려고 한 '씰크로드학' 편지 강의. 그러나 발송이 불허되었다
ⓒ 창비
분단의 아픈 시대를 살아가는 한 지성인이 남긴 책 <소걸음으로 천리를 가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절박한 공간 속에서의 호젓함과 여유, 겨레와 '겨레의 하나됨'을 생각하는 학자로서의 진지하고 끝없는 탐구 정신을 곳곳에서 느낄 수 있었다. 더구나 줄줄이 명문장으로 짜여진 이만한 편지글을 읽을 수 있었던 것은 큰 기쁨이라 아니 할 수 없다. 마치 노벨문학상 후보작에 오른 옥중소설을 읽은 기분이었다.

이분은 원로 문인이 아니다. 큰스님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분의 옥중편지를 읽노라면 인생 달관의 경지가 느껴진다. 그것은 아마도 그가 옥중편지를 쓰는 과정에서 자신의 '드라마 같은' 인생 그러나 늘 겨레를 생각하며 치열하게 살아온 삶을 되돌아보는 동안에 저절로 육화된 것이 아니었을까. 진작에 내세웠던 '시대와 지성 그리고 겨레'라는 삶의 화두를 한번 점검해 볼 수 있었고, 동시에 우보천리의 슬기를 터득하였을 테니 말이다.

소걸음으로 천리를 가다

정수일 지음, 창비(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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