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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번 국도 지도
43번 국도 지도 ⓒ taranakinz
총연장 155km에 달하는 이 국도에는 중간에 주유소가 하나도 없으니 ‘잊혀진 세계’로 들어서기 전에 자동차의 연료 탱크를 가득 채워 놓는 것을 잊지 말라고 당부하고 있는 여행 안내 책자의 경고문은 나의 이런 호기심을 더욱 부채질했다.

그 궁금증을 풀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직접 그 길을 달려 보는 수밖에 없다. 여행 일정을 짜면서, 주로 바닷가를 끼고 달리는 이번 여행의 여정과는 어긋난다는 것을 알면서도 내륙 쪽으로 깊숙이 들어가는 이 ‘잊혀진 세계’ 국도를 일정에 넣은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였다.

여행 안내 책자의 당부대로 나는 ‘잊혀진 세계’로 들어가기에 앞서 주유소에 들르는 것을 잊지 않았다. 차의 연료 탱크를 가득 채우고 우리가 출발한 시간은 오후 3시 15분. 좀처럼 볼 수 없는 전인미답의 세계를 경험하게 되리라는 기대감에 내 발은 경쾌하게 가속 페달을 밟는다.

하지만 핸들을 잡은 손에는 그만큼의 긴장이 배어 있다. 지금까지 달려 왔던 평탄하고 곧게 뻗은 도로와는 달리, 가파른 고갯길과 굴곡이 심한 길이 이어지는 초행길을 달리게 될 터이니 긴장이 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시골 학교 담장에서 허수아비를 만나다

스트랫포드의 경계를 벗어나고 얼마 되지 않아 우리는 제법 가파른 고갯길을 만났다. 이 도로에서 만나게 되는 네개의 큰 고개 중 첫번째 고개인 스트래스모어 새들(Strathmore Saddle).

이 고개의 꼭대기에서는, 동쪽으로는 루아페후산을 비롯해서 통가리로 국립공원에 우뚝 솟아 있는 세개의 연봉들을, 그리고 서쪽으로는 타라나키산의 봉우리를 볼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낮게 깔린 구름 때문에 그 높은 산들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스트래스모어 새들에서 바라다본 풍경
스트래스모어 새들에서 바라다본 풍경 ⓒ 정철용
대신 양들과 소들을 방목하는 초록 풀밭의 낮은 구릉들이 겹겹이 물결치듯 이어지고 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답다. 그 풍경들을 보고 있는 사이, 굽이굽이 돌아가는 고갯길을 오르느라 긴장했던 손과 발과 눈이 편안해진다.

짧은 휴식을 취하고 출발한 우리는 채 5분도 달리지 않아 다시 차를 멈췄다. 길가에 도열해 있는 수많은 허수아비들이 우리의 눈길을 잡아끌었다. 한국의 가을 들판에 서있는 허수아비들과는 다른 모습이지만, 그 허수아비들에서 그리운 고국의 가을 들판을 한순간 떠올린다.

그러나 우리가 만난 허수아비들은 가을 들판의 한가운데가 아니라, 외진 시골 초등학교의 허술하기 짝이 없는 담장에 기대어 서있다. 후이아카마 초등학교. 팻말을 보니 100년도 훨씬 전인 1896년에 세워진 학교다.

도로변 학교 담장에 도열해 있는 허수아비들
도로변 학교 담장에 도열해 있는 허수아비들 ⓒ 정철용
100년이 훨씬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후이아카마 초등학교
100년이 훨씬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후이아카마 초등학교 ⓒ 정철용
여기까지 달려오면서 인가를 한 채도 보지 못했는데, 이런 학교가 있다니! 학생 수는 몇이나 될지 궁금해진다. 덩그마니 서 있는 건물 한동이 전부이다. 방학이라 그런지 평소에는 아이들 웃음소리로 시끄러웠을 넓은 잔디밭 운동장과 한쪽에 마련된 놀이터가 비어 있다.

방학 중에는 이렇게 텅 비어 아무도 없는 학교를 지키기 위하여 허수아비를 만들어 세워 놓은 것일까? 고사리 같은 손으로 이 허수아비들을 만들었을 어린 꼬마들을 생각하니 ‘훗훗’ 웃음이 절로 나온다.

딸아이는 담장을 막 넘어 가려는 한 허수아비가 재미있다는 듯이 들여다보고 있고, 아내는 허수아비들보다 곱게 물든 단풍에 더 마음을 빼앗겼는지 그 나무 아래를 서성인다. 나는 허수아비들의 표정을 하나하나 살펴본다.

아예 목이 없는 것도 있고, 한국의 허수아비처럼 밀짚모자를 쓴 것도 있고, 사람의 얼굴인지 동물의 낯짝인지 언뜻 구별이 안 되는 것도 있다. 하지만 그 어느 것이나 아이들의 마음이 담겨 있는 것처럼 여겨져서 모두 반갑고 정답다.

학교 앞의 큰 나무를 곱게 물들인 가을빛
학교 앞의 큰 나무를 곱게 물들인 가을빛 ⓒ 정철용
밀짚모자를 쓴 허수아비와 고개를 떨군 허수아비
밀짚모자를 쓴 허수아비와 고개를 떨군 허수아비 ⓒ 정철용
이 외진 곳까지 먼 길을 달려온 나그네들에게 고맙다는 말을 하면서 한편으로는 자신들을 잊지 말라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해서 가슴이 뭉클해졌다. 그래, 우리가 너희들을 잊지 않으마. 너희들도 우리를 잊지 마렴.

아이들이 만들어 학교 담장에 세워놓은 허수아비들과 아쉬운 작별을 하고 우리는 ‘잊혀진 세계’의 더 깊숙한 안쪽으로 들어간다. 우리의 작별을 슬퍼하기라도 하듯이, 찌푸렸던 하늘은 참았던 눈물방울을 기어이 떨구고 만다.

유령의 마을에 웬 호텔?

큰 고개 두개를 더 넘어 우리는 ‘유령의 마을’이라 불리는 팡가모모나(Whangamomona) 마을에 도착한다. 1895년에 첫 거주민이 살기 시작하면서 한때는 ‘풍요의 계곡’이라고 불릴 정도로 번성하기도 했던 이 마을은 1924년에 대홍수를 겪고 나서 사람들이 떠나면서 점점 쇠락했다고 한다.

그러나 남아 있던 마을 주민들의 개척자적인 불굴의 기개는 꺾이지 않았다. 지난 1989년 행정 구역을 재편하면서 이 작은 마을을 어느 쪽으로 편입시킬 것인가를 둘러싸고 논란이 있었을 때, 주민들은 자신들의 마을을 ‘공화국’으로 선포하는 소동을 벌이기도 했다.

지금도 이 독립기념일(?)을 축하하기 위하여 매년 10월 마지막 토요일에 자신들만의 대통령을 선출하고 한바탕 축제를 벌인다. 이 때가 되면 이 마을 출신뿐만 아니라 수천 명의 관광객들이 몰려든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흥청거림은 일년에 단 하루뿐이고 나머지 날들은 무덤처럼 고적할 것이다.

우리가 이 마을에 들어서던 그날 오후에도 거리에는 사람 그림자 하나 보이지 않았다. 2001년 인구조사 때에는 그래도 170명의 주민이 살았다고 하는데, 지금은 모두 떠나고 고작 25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고 하니 사람 구경하기가 만만치 않은 것이다.

유령의 마을의 상징, 팡가모모나 호텔
유령의 마을의 상징, 팡가모모나 호텔 ⓒ clear.net
비가 내려 한층 음산하게 보이는 이 마을을 그나마 사람 사는 마을처럼 여겨지게 하는 것은 마을 한복판에 서 있는 94년 된 커다란 건물이다. 팡가모모나 호텔. 잠깐 내려서 호텔 바에서 따뜻한 커피라도 한잔 마시고 갈까 하는데, 아내는 그냥 통과하자고 한다.

우리는 뒷좌석에서 곤하게 잠이 든 딸아이와 가는 비가 내리는 날씨를 핑계 삼았지만, 어쩌면 사람 그림자 하나 보이지 않는 이 유령 마을의 고적함과 음산함이 두려웠는지도 모르겠다.

호빗들의 구멍, 모키 터널을 지나서

‘유령의 마을’을 통과하고 20여분을 더 달려 우리는 ‘잊혀진 세계’의 마지막 큰 고개인 타호라 새들(Tahora Saddle)을 넘는다. 나는 그 고개의 꼭대기에 있는 ‘호빗들의 구멍’이라고 불리는 모키 터널(Moki Tunnel)을 통과하고 나서 길가에 차를 멈춘다.

'호빗들의 구멍'이라고 불리는 모키 터널
'호빗들의 구멍'이라고 불리는 모키 터널 ⓒ 정철용
1936년에 이곳에 거주한 개척자들이 말과 사람들과 자동차들의 통행을 위해서 뚫은 이 터널은 길이는 180m로 제법 길지만 폭은 겨우 차 한대가 지나갈 수 있을 정도로 좁은 일방통행 터널이다. ‘호빗들의 구멍’이라는 이름이 붙을 만도 하다. 차량 통행이 적은 도로이니 이런 일방통행의 터널이 가능한 것일 게다.

그러나 이런 일방통행로는 터널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뉴질랜드의 시골길을 달리다 보면 차 한대만 통과할 수 있는 1차선 다리(One Lane Bridge)를 종종 만나게 된다. ‘잊혀진 세계’ 하이웨이도 바로 그런 1차선 다리들의 천국이다. 수십 개의 1차선 다리를 통과해야만 ‘잊혀진 세계’를 빠져나올 수 있다.

1차선 다리 표지판. 굵은 검은 선으로 표시된 방향의 차량에 통행우선권이 있다.
1차선 다리 표지판. 굵은 검은 선으로 표시된 방향의 차량에 통행우선권이 있다. ⓒ 정철용
1차선 다리에서는 굵은 검은 선으로 표시된 방향에서 오는 차에게 양보해야 한다. 그러나 같은 도로상에 있는 1차선 다리라도, 그 다리가 있는 곳의 지형에 따라 우선권이 있는 쪽의 화살표 방향이 바뀌기 때문에 이 표지판이 나오면 특별히 신경을 써야만 한다.

즉, 지금 통과하는 1차선 다리에서는 내가 우선권이 있다 하더라도 5분 후에 만나게 될 1차선 다리에서는 그 반대일 수도 있는 것이다. 따라서 좀 전에 지나친 다리에서 내가 우선권이 있었으니 이번 1차선 다리에서도 내가 먼저일 거라고 지레 짐작하고, 표지판의 검은 화살표 방향을 살피지 않은 채 무조건 진입하다가는 사고 나기 십상이다.

모키 터널을 지나면서부터 오르막길보다는 내리막길이 더 많아서 운전하기가 어렵지 않았는데도 내가 긴장을 늦출 수 없었던 것은 바로 이렇게 수분 간격으로 나타나는 1차선 다리들 때문이었다.

수없이 많은 그 1차선 다리들을 조심스럽게 건너며 나는 우거진 숲 속 길을 통과한다. 나무 그늘 때문에 대낮에도 어두울 그 길들은 오후 다섯시가 지나면서부터는 짙은 어둠이 깔려 한층 나를 긴장하게 만든다. 좀처럼 끝나지 않는 그 어둠 속 길을 달리며 나는 조금 불안해진다.

마주 오는 차들이라도 많으면 그 불빛을 위안이라도 삼으련만, 차들은 좀처럼 나타나지 않는다. 약 3시간 반을 달리는 동안 내가 만난 차량의 수는 불과 13대에 불과했으니, 정말 ‘잊혀진 세계’라는 별명이 괜히 붙은 것이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6시 32분, 헤드라이트를 켠 차 한대가 막 지나쳐 빗겨간다. 지금 이 시간에 ‘잊혀진 세계’로 들어서는 저 차량의 목적지는 과연 어디일까? 이 멀고 험한 도로를 오늘밤에 넘어가야만 하는 차량일까, 아니면 저 산골의 어디쯤으로 귀가하는 차량일까?

알 수 없다. 그러나 그 목적지가 어디가 되었든, 부디 무사하기를. 우리가 빠져나온 그 어둠 속으로 들어가는 그 열세번째의 차량을 향해 무사 운전을 빌어 준다.

저 마지막 차량은 가늠할 수 없는 어둠의 세계 속으로 빠져들고, 나는 ‘잊혀진 세계’를 막 빠져나와 문명의 빛인 가로등이 점점이 늘어선 도시로 다시 진입한다. 또 하루가 저물고 나는 도시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안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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