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책 겉그림입니다.
책 겉그림입니다. ⓒ 눈빛
전선에서 3년 동안 흘린 수십만 명의 피로도 모자랐던 것일까? 전쟁을 반대하는 시위가 일어나야 하는데, 오히려 전쟁이 끝나는 것을 반대하는 시위가 일어났다. 정전협정에 조인해야 하는 날 반공포로를 석방해서 다시 한 달 간 전쟁을 더 하도록 만들었다. 전쟁이 끝나고서도 다시 전쟁을 일으켜 통일을 하겠다는 말만 되풀이했지, 전쟁으로부터 피해를 입은 국민들에게 어떤 식으로 보상을 한다는 말 한 마디 없었다. 머리말/박태균 씀 <10~11쪽>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의 명예를 회복시켜 달라는 유족들의 진정은 빨갱이들의 활동으로 몰렸"다는군요. "유족들은 구속되었고,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의 원혼을 달래기 위하여 세워졌던 비석은 옆으로 누워 버"리고 말았답니다. 전쟁을 벌이며 자기 나라 사람들을 지키지 못했던 남북 정권은 오히려 전쟁 뒤에 아주 튼튼한 틀을 세우며 저마다 다른 독재를 걸었답니다.

이것이 우리가 살아온 삶입니다. 역사입니다. 지우고 싶어도 지울 수 없고, 잊고 싶어도 잊을 수 없으며, 눈을 감아도 펼쳐지는 모습이에요. 지금 눈앞에서 총소리가 나지 않는다고 해서 전쟁이 없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좋을까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무엇일까요?

이런 사진은 어떻게 찍었을까요? 사진을 찍은 사람은 아이를 업은 아버지(또는 할아버지)가 느끼는 마음을 알까요?
이런 사진은 어떻게 찍었을까요? 사진을 찍은 사람은 아이를 업은 아버지(또는 할아버지)가 느끼는 마음을 알까요? ⓒ NARA
<2> 미군이 찍은 한국전쟁 사진

미군은 1950년부터 일어난 한국전쟁 모습을 수없이 많은 사진으로 남겼습니다. 그 사진을 어떤 목적으로 얼마나 많이 찍었는지는 알 길이 없습니다. <지울 수 없는 이미지>란 사진 책을 엮은 박도 선생은 "약 40여 일 동안 살펴본 사진은 수십만 장에 이르지만, 엄선해서 스캔한 사진은 모두 480여 매다(259쪽)"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 사진은 미국 국립문서기록보관청에 있는 자료만 보고 하는 말입니다. 다른 곳에 또 얼마나 많은 사진이 있는지, 또 개인이 갖고 있는 사진은 얼마나 되는지, 숨겨진 사진은 얼마나 되는지는 모를 일이에요.

사진 책을 보는 내내 마음이 무겁습니다. 도대체 이런 사진을 왜 봐야 하나 싶으면서도 눈길이 떨어지지 않습니다. 죽은 사람, 죽이는 사람, 죽어가는 사람, 아픔을 이기지 못해 울부짖는 사람, 무거운 짐을 짊어진 사람, 추위에 떠는 아이, 부모를 잃은 아이, 피난길에 '누가 쏘았는지도 모르는 총'에 맞아서 쓰러진 사람들, 양민학살, 포로 학살, 정치범 학살, 끝도 없는 폭격, 무너진 집과 건물, 불타는 집과 시설, '자랑스럽게 폭탄 세례를 퍼붓는' 미군 폭격기.

끝없이 이어지는 피난민 길 모습 가운데 하나입니다.
끝없이 이어지는 피난민 길 모습 가운데 하나입니다. ⓒ NARA
책을 3/4쯤 보다가 덮었습니다. 사진을 찍은 미국사람들은 '이름도 처음 들어 보고 처음 밟아 보는 나라' 모습을 말없이 담았을 뿐이겠지만, 우리로서는 지울 수도 없으나 잊을 수도 없는 가슴 아픈 모습입니다. 이방인이 보기에는 '좋은 사진거리'가 되고 '퓰리처상을 받을 만한 작품'을 찍을 수도 있는 기회가 되겠으나, 우리로서는 삶과 죽음이 오가는 아주 끔찍한 모습입니다. 사진을 찍은 사람은 "같은 겨레 사람끼리 치고 박고 윽박지르다 못해 총부리를 겨누고 죽고 죽이는 일"을 어떻게 생각했을까요?

어느 누구도 억지로 이끌려 죽을 까닭이 없습니다. 어느 누구에게도 누구를 함부로 죽일 권리가 없습니다. 전쟁과 학살은 '있다는 것'만으로도 불행이며 끔찍한 범죄입니다.

과연 이런 이야기를 이 사진에서 보여주거나 말하고 있을까요? 아닙니다. 절대로 아닙니다. 이방인이자 방관자로, 조그마한 나라 코리아를 돕는다는 이름으로 이 땅에 군대를 이끌고 들어와 아직까지도 똬리를 틀며 엄청난 범죄를 저지르고, 이 나라 숨통을 죄는 미국 군대는 자신들이 섬기는 '하느님 마음'으로 사진을 담은 것이 아닙니다.

피난을 가다가 '비명횡사'한 사람들입니다. 차라리 집에 그대로 남았으면 살았을까요?
피난을 가다가 '비명횡사'한 사람들입니다. 차라리 집에 그대로 남았으면 살았을까요? ⓒ NARA
<3> 왜 죽어야 하는가

북한 라디오 방송은 남한에서의 만행과 대량학살에 대해서 최근에 많은 주장을 해왔다. 주장들은 비록 과장된 것일 수도 있지만, 전쟁이 시작된 후 남한 경찰(헌병)들에 의한 상당히 무자비한 처형이 행해져 왔다. 서울이 북한에 의해서 함락되었을 때 수천 명의 죄수들이 석방되었다는 보고가 있었다. 육군 무관부가 믿는 바로는 진격해 오고 있는 적군에 의해서 죄수들이 석방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서울 함락 후 1,2주 내에 수천 명의 정치범들이 처형되었다. 처형명령은 의심할 바 없이 최상부로부터 내려졌는데, 왜냐하면 그러한 처형들은 전선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대전에 있는 1800명의 정치범을 처형하는 데에는 3일이 걸렸으며, 1950년 7월 첫째 주에 일어났다. <163쪽>

'양민'이라고 하는 '민간인'을 죽인 일은 남한만도 북한만도 아니고 미국만도 아닙니다. 총을 든 모두가 저지른 일입니다. 총은 사람을 지키지 않습니다. 사람을 '죽이는' 무기가 총입니다. 교도소에 있었다던 정치범은 무엇을 하던 사람일까요? 빨갱이일까요? 북녘 교도소였다면 '파랭이'일까요? 어쨌든 정치범은 "정권이 못마땅하다고 느껴서 반대하거나 옳은 길을 찾아야 한다고 외치는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이승만과 점령군인 미국이 다스리는 남녘에 있던 정치범은 어떤 사람들일까요?

정치범만 죽지는 않았습니다. 박도 선생이 <오마이뉴스>에 사진을 공개했을 때는 보여주지 않은 수많은 민간인 학살 사진이 <지울 수 없는 이미지>란 책에 실렸습니다. 그 사진을 보면 민간인들 스스로 구덩이를 파도록 시켜서 그 안에 들어가게 한 뒤, 헌병(남한 경찰)들이 머리통과 가슴팍을 겨누어 엄청나게 총질을 해대는 사진까지 있습니다. 그리고는 그 구덩이를 흙으로 메웁니다. 그 모습이 하나하나 사진에 담겼습니다.

도대체 이런 일이 왜 있어야 하며, 이런 사진은 왜 찍었을까요?

학살된 채 동굴에 암매장된 주검을 꺼내는 모습이라고 합니다.
학살된 채 동굴에 암매장된 주검을 꺼내는 모습이라고 합니다. ⓒ NARA
<4> 지울 수는 없으나 씻어야 할 역사

<지울 수 없는 이미지>란 책에 머리말을 쓴 박태균 교수는, "'빨갱이' 또는 '부역자'라는 말 한 마디로 사람의 목숨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상황에서 누가 누구에게 전쟁의 책임을 물을 수 있었겠는가(11쪽)"하고 묻습니다. 남녘에서는 전쟁 동안 '부산정치파동'을 일으켜 이승만에게 반대하는 국회의원을 싹쓸이해 버리고, 북녘에서는 '공화국 전복음모사건'을 일으켜 남조선노동당 계열 인사를 숙청했다는군요. 전쟁 때문에 가슴앓이를 하는 사람은 아랑곳하지 않고, 전쟁 동안에도 세금을 '돈' 대신 '쌀'로 바쳐야 하는 터라, 총알을 피해 가며 농사를 짓고, 그러다가도 총에 맞아 죽는 가녀린 농사꾼들을 지키지도 않고 감싸지도 않은 그 책임을 참말로 누구에게 물을 수 있을까요?

사진 책 <지울 수 없는 이미지>를 책방에서 산 지 한 달만에 덮었습니다. 이 사진을 차마 손쉽게 넘겨볼 수 없었고, 이미 본 사진도 다시 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아마, 앞으로도 오랫동안 잘 보이는 책꽂이에 꽂아두고 넘겨보아야지 싶습니다. 지금까지는 지울 수 없는 모습이자 역사인 한국전쟁이지만, 앞으로는 씻어내고 눈물을 닦아 주어야 하는 모습이자 역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들 가슴에 생채기를 내고 눈물을 짜게 한 사람이 누구인지 묻기는 아직까지도 어렵지만, 가슴에 난 생채기를 보듬고 눈물을 닦아 줄 사람은 바로 우리이기 때문입니다. 생채기 난 사람끼리 생채기를 보듬고, 눈물 흘리는 사람끼리 눈물을 닦아 주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 땅 백성들은 전쟁 동안에도 농사를 지어서 세금을 내야 했습니다. 적군이든 아군이든 퍼부어대는 총알을 피하며 농사를 지었습니다.
이 땅 백성들은 전쟁 동안에도 농사를 지어서 세금을 내야 했습니다. 적군이든 아군이든 퍼부어대는 총알을 피하며 농사를 지었습니다. ⓒ NARA
내가 아픈 만큼 남이 아픈 줄 느끼고, 우리가 겪은 전쟁이 슬픈 만큼 다른 나라가 치르거나 겪는 전쟁도 슬픈 줄 느껴야지 싶습니다. 전쟁은 세계 어느 곳에서도 일어나서는 안 되며, 전쟁무기 또한 미국과 소련과 중국과 일본과 유럽까지 아울러, 그 어느 나라에서도 만들어서 팔면 안 되고 써서도 안 됩니다. 한국전쟁도, 세계 그 어느 전쟁도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가득합니다. <지울 수 없는 이미지> 같은 사진책이 다시는 태어나지 않을 수 있는 세상을 꿈꿉니다.

지울 수 없는 이미지 - 8.15해방에서 한국전쟁 종전까지

박도 옮김, 미 국립문서기록보관청 (NARA) 사진, 눈빛(2004)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이 기자의 최신기사작은책집으로 걸어간 서른해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