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미의 처참한 가난과 독재 그리고 불의를 생생히 목도한 구띠에레즈 신부가 이에 대한 신학적 응답으로 세상에 내놓은 책은 그 유명한 <해방신학>(1971)이었다. 이 책은 기존 서구유럽 백인 중심의 신학에 중요한 파열구를 내었고, 흑인신학, 여성신학, 민중신학, 달릿신학 같은 제 3세계의 다양한 해방신학 운동에 불을 당겼다. 이것이 바로 구띠레에즈가 '해방신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까닭이다.
해방신학은 높은 명성만큼이나 곳곳에서 온갖 비판과 반대를 받아온 역사를 가지고 있다. 그 주요 비판 가운데 하나가 '해방신학은 신학이라는 탈을 쓴 정치 이데올로기에 불과한 것이 아니냐?'는 문제제기다. 이런 비판에는 해방신학이 맑스주의와 신학을 교묘히 배합시킨 것에 지나지 않으므로 진정한 신학일 수 없다는 뿌리 깊은 편견이 깔려 있었다.
구띠에레즈는 이러한 비판에 대한 응답으로 이 책을 쓰게 되었다고 한다. 이 책이 처음 출간된 것이 1984년이었으니 지금까지 20여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래서 '이렇게 해묵은 책에서 오늘날 무슨 건질만한 것이 있을까?'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 사람은 고전의 가치를 전혀 잘 모르는 사람이다. 무릇 고전이란 그 보편타당함으로 세월에 구애됨 없이 생명력이 매우 긴 책을 말하지 않던가. 나는 이 책을 해방신학 영성을 말해주는 고전이라고 추천하는데 조금도 주저함이 없다. 그만큼 지금 읽어도 손색이 없고 여전히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오는 책이기 때문이다.
사실 구띠에레즈는 그의 책 <해방신학>에서 이미 '해방신학의 영성'에 대한 대략적인 윤곽을 잡고 있었다. 그는 거기서 '해방의 영성'은 이웃을 향한 회개, 이웃 안에서 주님께로 나아가는 회개를 중심으로 한다고 말했다. 따라서 이 회개는, 억압받고 착취당하고 소외된 사람들 안에 현존하시는 그리스도와 똑같이 살고 느끼고 생각하는 것을 뜻하는 거였다. 즉 가난하고 억압받는 사람들의 해방운동에 투신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회개라는 이야기다. 이러한 논의를 '호된 시련의 상황적 경험'에서 검증하고 심화시켜 신학적 성찰을 통해 정리해낸 책이 바로 <우리의 우물에서 생수를...>이다.
솔직히 십여 년 전에 이 책을 처음 접했을 때만 하더라도 그 진가를 제대로 알지 못했다. 그땐 서문을 쓴 헨리 나웬이 어떤 사람인지조차 전혀 모르던 시절이었다. 단지 남미 해방신학이 말하는 영성이라는 관심에서 읽어놔야 할 교양서적쯤으로 알고 성급히 읽어 젖혔을 뿐이었다. 그런데 최근에 우연치 않은 계기로, 교우들과 다시 천천히 읽으면서 이 책이 지닌 가치가 얼마나 큰지 새삼 실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전에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그냥 보아 넘긴 많은 대목이 예리하게 폐부를 찌르는 칼날로 다가왔다.
이를테면, 뛰어난 영성가이자 저술가로 한국에도 널리 알려진 헨리 나웬이 이 책의 서문에서 밝힌 고백은 상당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나웬은 1982년 여름 페루 리마에서 열린 구스타보 강의에 출석하였다. 그는 이 강의를 들은 것이 남미에서 체류한 6개월 중 가장 중요한 경험 가운데 하나였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다음과 같이 진솔한 고백을 하고 있다.
"그 여름 강의기간에 그 사목 활동가들과 이야기하면서 나는 나 자신의 영성이 얼마나 개인주의적이고 엘리트 의식에 젖어 있었던 것인가를 인식하게 되었다. 많은 측면들에서 영적인 생활에 관한 나의 사고는 '내적인 삶'을 강조하고 그러한 삶을 발전시키기 위한 방법과 기술들을 강조하는 북아메리카의 주변환경에 의해서 깊이 영향을 받아왔다는 것은 고백하기 어려운 일이었으나 사실이었다. 나는 구스타보가 '가난한 자들의 역사 안으로의 돌입'이라 부르는 것과 맞부딪혔을 때에야 비로소 나는 나의 영성이 어떻게 '영성화'되었는가를 인식하게 되었다. 내가 알고 있었던 영성이란 사실상 내적인 조화와 정적을 발전시키는 데 필요한 시간과 공간의 사치스러움을 가지고 있는 내성적인 사람들을 위한 영성이었다."
실제로 구스타보는 물질적인 염려(음식, 주거, 건강 등의 필요)로부터 자유를 얻은 소수의 엘리트주의적 영성이 소외된 자들과 주변으로 밀려난 자들의 영적 경험, 그들 편에 서 있는 자들의 영적 경험에 의해서 극렬한 도전을 받고 있다면서 엘리트주의적 영성의 한계성을 바르게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도 개인(내면)적 영성주의, 즉 도피의 영성은 곳곳에서 감지할 수 있다. 극에 달한 자본주의 물질문명 속에 살면서 느끼는 정신적 공허함을 달래려고 명상과 기(氣)수련 등 신(新)영성 운동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눈에 띄게 늘고 있는 추세를 보라. 이것은 비단 우리나라 현상만이 아니라, 자본주의 본산인 서구유럽의 경우 더욱 광범위하게 진행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문제는 그들이 추구하는 '영성'이라는 것이 과연 '개인(내면)적 영성주의 혹은 엘리트적 영성주의의 함몰'이라는 구스타보의 비판을 과연 피해갈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구스타보는 교회사에 면면히 이어 내려오는 영성의 대가들(보나벤투라, 이그나티우스, 프란체스코, 샤를드 푸코, 십자가의 성요한...)에 관해 훤히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그는 그들의 모델을 단순히 반복하여 서술하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구스타보에서 눈여겨 봐야할 대목은 그가 라틴 아메리카의 가난한 자들이 처한 절박한 상황이라는 시좌에서 전통적 영성과 성서를 체계적으로 검토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는 가난한 자들과의 참된 사랑의 연대성을 꾸준히 강조하고 있으며 개인이 아닌 공동체적인 영성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전혀 새로운 목소리를 가지고 있다.
최근 해방신학은 기존의 가난한 자들의 해방이라는 차원 넘어서서 전지구적 생태 해방까지 아우르는 데로 나아가고 있는 것 같다. 지극히 당연하고 바람직한 방향이라고 생각한다.
소수의 부자들에 의해 억압과 착취를 당하는 자들은 다수의 가난한 '사람들'만이 아니라는 사실이 오늘에 와서 더욱 명백해졌다. 우리가 발 딛고 서 있는 땅과 전지구의 생명체들이 같은 고통 속에서 비명을 질러대고 있기 때문이다.
구스타보가 다시 해방신학의 영성에 관한 책을 쓴다면 아마도 이러한 문제까지 충분히 감안했을 것이라 믿는다. 제발 혼자만의 우물을 따로 파지 말고, 우리네 조상들이 그랬듯 공동 샘을 잘 파서 그 속에서 솟구쳐 뿜어나오는 삶의 희망과 기쁨, 생태적 대안의 샘물을 모두들 넉넉히 마시고 받아 누렸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