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이 이라크에, 아프가니스탄에 민주주의를 수출하고 있는 것처럼 말하지만 미국 자신이 과연 민주주의 국가인지 의문이 생길 때가 있다.
정치분석 소식지인 'The Cook Political Report'에 따르면 최근 10번의 선거에서 현역 하원의원의 재선율은 95%였다. 이 정도면 낙선하는 사람이 이상한 사람이다. 한번 당선된 사람은 출마만 했다하면 당선된다. 마치 무슨 전체주의 국가의 선거를 보는 것 같다.
한번 훌륭한 사람들을 뽑아 놓으니 바꿔야 할 필요가 없어서 재선율이 높은지도 모른다. 상당수 선거구에서 현역의원들이 무투표 당선된다. 선거구에 따라 그 좋다는 의원직에 도전하는 사람이 한 명도 없기도 하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일 것 같은데 선거가 너무 자주 있다. 미국 하원의원들은 선거에서 이기자마자 다음 선거를 준비한다. 2년마다 쉴새없이 선거가 실시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현역의원들의 선수를 보면 보통 10선, 20선 그렇다. 통계도 읽기 나름인데, 현역의원이 재직 중 숨질 확률이 선거에서 질 확률보다 4배나 높다고 한다. 맘만 먹고 건강에만 신경 쓰면 평생 할 수 있는 철밥통이라는 얘기다.
이 때 생각 나는 사람이 스트롬 서몬드(Strom Thurmond)다. 54년부터 2002년 말까지 반 세기에 가까운 세월을 상원의원으로 지내다 은퇴를 선언하고 지난해 1월 의원직에서 물러난 지 6개월 뒤에 세상을 떠났다. 향년 100세. 필자의 영어 실력이 짧은 탓인지 말년에 그가 의정 단상에서 더듬거리면서 하는 말이 중계될 때 거의 알아듣지 못했다.
미국 의원들중 절반 가까운 의원들이 백만 달러 이상의 자산을 보유하고 있다. 짐 하이타워(Jim Hightower)의 책 <높은 곳에 있는 도둑들(Thieves in High Places)>에 따르면 미국 전체 인구 중에서 백만장자의 비율이 0.7 퍼센트라고 하니까 이들이 얼마나 선택된 사람들 중에서 나왔는지 알 수 있다. 직업도 변호사, 기업인, 정치인 그렇다.
이들은 관대하다. 미국의 비정파적 시민단체인 '퍼블릭 인터레스트 그룹(Public Interest Group)'에 따르면 선거에서 가장 돈을 많이 쓴 후보들의 94%가 당선된다. 현역 하원의원의 경우 무려 7대1의 비율로 경쟁자들에 비해 돈을 많이 쓴다. '따 놓은 당상'이라는 말이 이런 데 쓰이는 것이다. 2002년 상원의원의 경우 평균 500만 달러(60억 원상당)를 쓰고 당선됐다. 하원의원은 96만6천 달러(12억 원 상당).
유권자로서는 결과가 뻔한데 투표할 맛이 날 리가 없다. 미국 중간선거(미국 대통령 4년 임기의 절반이 되는 해에 실시되는 선거다. 연방 하원의원 전원과 상원의원 3분의 1, 임기가 만료된 일부 주지사와 주의회 의원이 주대상이다)의 경우 투표율이 30% 대다. '민주주의 및 선거 지원을 위한 국제기구(IIDEA, International Institute of Democracy and Electoral Assistance)'라는 국제연구소에 따르면 2000년 대통령 선거의 투표율도 과반에 미달하는 49.3%에 불과했다.
투표율이 민주주의의 절대적 척도는 아니겠지만 시민들의 정치적 참여를, 그래서 선출된 공직자들의 대표성을 가늠할 수 있는 척도는 될 수 있다. 선거의 종류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지만 민주주의가 발달한 유럽연합 회원국의 평균 투표율은 83%이다. 영국이 낮은 편이어서 75.2%이고 스페인이 중간 정도인 85.6% 그리고 이탈리아가 가장 높은 89.6%다. 미국인들의 선거 참여도가 얼마나 낮은지 알 수 있다.
이미 선출해놓은 사람들이 훌륭하고 이들이 알아서 재선될 텐데 굳이 투표하러 가는 수고를 할 필요가 없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더군다나 미국에서 선거일은 공휴일도 아니다. 그래서 후보들만 흥청망청 돈을 쓴다. 그 돈이 다 어디서 나오는가.
세계화와 정치
지난 여름 세계화(globalization) 또는 미국화(Americanization)가 미국에 끼친 영향을 살펴보고 다니면서 지난 한 세대 동안 일어난 변화들을 목격할 수 있었다. 정리하면 이렇다.
* 먼저 미국인들은 갑자기 뚱뚱해졌다. 60년대까지만 해도 인구의 25% 정도가 과체중이었는데 지금은 60%가 넘는다. 미국인들이 집단적으로 유전자의 조작실험에 응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 중간이 비어가고 있다. 미국의 곡창지대는 사막만큼 인구밀도가 희박한 평원으로 바뀌고 있고 가족농들은 자취를 감추고 있다.
* 미국 사회 중심축이었던 중산층이 오그라들고 있었다. 대신 저임금 시간제 노동자들이 양산되고 있었다.
* 미국에서 잘 사는 사람은 더 잘 사는 반면 못 사는 사람들은 갈수록 더 형편이 어려지고 있었다.
* 감옥 인구가 30년 만에 7배가 늘었다. 무슨 민란이 일어나 닥치는대로 가두는 듯하다. 그리스 인구보다 많은 1200만 명이 전과자다.
* 청교도가 세운 이 나라에 카지노와 로토가 영화와 스포츠, 음악 등 다른 문화산업을 다 합친 것보다 더 큰 600억 달러의 산업으로 급성장했다.
* 법적으로는 사라진 인종 차별이 지역에 따른 인종적인 분리라는 모습으로 새롭게 나타나고 있었다.
* 마을 자체가 아예 월마트와 맥도날드와 같은 큰 기업들의 가맹점으로 재편되고 있다.
* 노조 가입률은 격감하고 있었다.
* 미국 남부가 미국 보수주의의 새로운 본산이 되고 있었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숨을 걸고 미국으로 넘어오는 사람들이 있다.
필자는 이런 변화들의 근저에 세계화가 있다고 믿는다. 세계화가 자본의 자유로운 전지구적 이동을 보장하는 것이라고 하면 그럴게 볼 수 있는 측면이 있다. 뭔가 돈과 관련돼 있다. 아니, 돈의 움직임을 어떻게 규율하는지와 관련돼 있다. 그것은 바로 정치다. 필자는 정치의 수도 워싱턴으로 간다.
불과 4년 만에 왔는데 워싱턴은 놀랄 만큼 바뀌어 있었다. 뉴욕에 비해 한가롭고 안정된 도시라는 과거의 이미지는 사라지고 뉴욕을 뒤따라가려는 것처럼 차들은 붐비고 사방에서 신축공사가 벌어지고 있다.
시리즈를 시작할 때 워싱턴 일대 한인 인구가 10만에서 20만으로 두 배 가까이 늘어났다고 했는데 한인만 는 게 아니다. 이 일대 전체 인구가 폭발한 것 같았다. 과거 20분 걸리던 출근길이 40분, 한 시간이 걸린다. 끊임없는 부동산 개발 붐으로 인근 버지니아 주 쪽으로는 셰넌도어 국립공원이 있는 블루 리지(Blue Ridge) 산맥의 턱 밑까지 택지가 뻗어가고 있다. 집을 산 사람들끼리 집값이 50%가 올랐다느니, 두 배가 올랐다느니 흐뭇한 대화가 오고 간다.
저소득 미국인들의 공동체 운동 조직인 '에이콘(ACORN, The Association of Community Organizations for Reform Now)'의 워싱턴 지부는 워싱턴의 대표적인 빈민지역인 사우스이스트(Southeast)에 있다. 워싱턴은 의사당을 중심으로 네 구역으로 나눠지는데 조지 타운 대학이 있는 노스웨스트와 노스이스트 일부에만 상류 또는 중류층이 거주하고 사우스이스트와 사우스웨스트에는 빈민 또는 흑인이 밀집 거주하고 있다. 이곳에서 태어난 흑인들은 열명 중 일곱 명이 사는 동안 한번은 감옥에 다녀온다.
워싱턴 상전벽해
그런데 캐피털 사우스 지하철역에서 내려 에이콘이 있는 8번가까지 걸어가는 동안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몇 년 사이 급격하게 바뀌었다. 사무실이 있는 동네는 우리 회원들의 마을이었는데 지금은 중산층 거주지역이 돼버렸다.”
에이콘 워싱턴 지부의 총괄 간사(lead organizer)인 스티브 둘리(Steve Dooly)의 말이다. 회원들이라고 하면 저소득자 또는 빈민을 뜻한다.
-그럼 회원들은 다 어디로 갔는가.
“집값이 올라 집이 있는 사람들은 오른 재산세를, 세입자들은 오른 임대료를, 그밖에 다른 물가도 감당할 수 없어 여기를 등졌다. 대부분 매릴랜드 주의 프린스 조지 카운티(Prince George county)로 갔다.”
전형적인 밀어내기(push-out)와 귀족화(gentrification) 현상이 일어난 것이다. 뉴욕의 맨해튼과 캘리포니아 주 실리콘 밸리에서도 일어난 현상이다. 과거 도심 공동화의 정반대 현상이다. 돈과 권력의 중심인 도심에서 교외로 탈출했던 상류층들이 도심으로 되돌아오는 현상이다.
‘생각해보니 도심에 살면 교통체증도 걱정할 필요가 없고 문화적 혜택도 쉽게 향유할 수 있다. 공원도 있어서 그렇게 공기가 나쁘지 않다. 그런데 주거와 교육 환경이 안 좋다. 이걸 어떻게 하지.’
간단한 방법은 빈민들이 더 이상 살 수 없는 곳으로 만드는 것. 그것은 집값을 올리는 것이다. 교육은 공립학교 대신 사립학교에 보내면 된다.
그렇게 해서 집값이 한국의 강남은 저리 가라 할 정도로 천정부지로 뛰었다. 맨해튼의 경우 센트럴 파크의 한 귀퉁이만 볼 수 있어도 방 3칸짜리 아파트가 100억 원대까지 치고 올라갔다. 지금은 경기가 안 좋아서 하락세라고 하지만 그렇게 해서 맨해튼은 중산층도 밀어내버렸다. 실리콘 밸리는 교사를 구하기가 어려울 실정이라고 한다. 교사 월급으로 실리콘 밸리에 살 수 있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모여 살던 흑인들이나 빈민들은 사방으로 흩어져버렸기 때문에 더 이상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빈민의 문제는 사회적 의제에서 장롱 밑으로 들어갔다.
에이콘은 바로 이렇게 보이지 않는 빈민의 문제를 빈민의 단결된 힘으로 해결하려는 단체다. 1970년 웨이드 래스케(Wade Rathke)가 아칸소 주 리틀 록(Little Rock)에서 시작해 지금은 전국 70개 도시에 12만 명의 회원을 두고 있다. 회원들은 한 달에 10달러를 내야 하니까 빈민으로서는 적지 않은 부담이다. 하지만 재정의 75%까지 회비로 버틴다고 하니까 비교적 독립적인 재정 기반을 갖춘 편이다.
에이콘이 하는 일은 구체적이다. 전기요금과 집세 인상을 감시하고 학교에 화장지가 떨어지지 않도록 챙긴다. 그리고 공격적인 전술을 구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버스에 회원들을 가득 태우고 갑자기 들이닥쳐 점거하거나 농성을 벌이곤 한다. 하지만 농성으로 부동산 값의 폭등을 막을 수는 없었다.
“지금은 도시를 재개발할 경우 일정한 비율만큼 빈민에게 주거공간을 배정토록 하는 법안의 통과에 주력하고 있다.”
둘리는 그것을 ‘Inclusive Zoning’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했는데 한국 주택공사 같은 곳에서 재개발할 때 장애인이나 저소득층에게 일정한 비율만큼 배정하게끔 하는 것과 비슷한 논리라고 느꼈다.
올해 에이콘의 목표는 좀 더 큰 데 있다. 2000년 선거에서 투표하지 않았던 사람들 중에서 120만 명을 투표자로 등록시키는 것.
“엄청난 권력의 집중에 맞서기 위해서는 조직밖에 없다. 그들의 힘이 돈에서 나온다면 우리의 힘은 사람의 숫자에서 나온다. 올해에는 지금까지 보지 못한 규모와 강도로 투표 등록 운동을 벌이고 있다.”
필자가 있는 미주리 주 컬럼비아에서 빈민을 위한 시민단체인 GRO의 총괄간사(lead organizer)로 일하는 매리 허스먼(Marry Hussman)으로부터도 똑 같은 얘기를 들었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조직화밖에 없고 올해 그 방법은 투표 등록 운동이다.”
투표등록 운동에 주력
이들 단체들은 비정파적 단체로 등록해 있기 때문에 특정 정당을 지지하는 선거운동은 못하지만 투표 등록 운동은 할 수 있다. 그래서 올해 많은 시민단체들이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거나 가가호호 문을 두드리면서 투표에 참여할 것을 설득하고 있다.
그 결과 올해 대통령 선거에서는 투표율이 올라갈 것이라는 예측이 나오고 있다. 공화당 쪽에서도 사람을 사서 투표 등록 운동을 세차게 벌였기 때문이다. 특히 오하이오와 플로리다와 같은 백중 지역에서 투표 등록이 급증하는 현상이 나타났다고 <뉴욕 타임스>가 보도하기도 했다.
오하이오주의 투표등록 현황을 카운티 별로 조사한 뉴욕 타임스의 9월 26일자 보도에 따르면 2000년 선거에서 민주당의 절대우세 지역이었던 곳에서 250%나 등록자수가 늘어난 것으로 조사됐다. 공화당 절대우세 지역인 상류 주택가에서도 증가했지만 25%의 상승에 그쳤다.
<뉴욕 타임스>는 아직 이런 변화가 여론조사에 반영되지는 않은 것 같다고 보도했다. 만약 등록된 투표자들이 대부분 투표를 한다면 민주당 존 케리 후보에게는 절대적으로 유리하게 될 것이다.
저소득자를 위한 단체들이 투표등록에 주력하는 것은 현행 사회적 제도에서 불이익을 받고있는 이들이 가장 투표를 안 하기 때문이다. 미시간대 정치연구소(Center for Political Studies)가 오래 전부터 해오고 있는 전국선거조사(NES, National Election Studies)에 따르면 소득이 낮을수록 투표를 안 한다.
| 2000년 대선이후 실시된 전국선거조사 | | 소득 | 투표 안했다고 응답한 비율 | 1~16% | 52% | 17~33% | 31% | 34~67% | 30% | 68~95% | 14% | 96~100% | 12%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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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측의 표는 2000년 대통령 선거 후 실시된 설문조사의 결과다. 표에서 보다시피 소득 분포에서 하위 16%에 속하는 사람들의 '투표 안 했다'는 응답률이 가장 높고 소득이 높을수록 그 비율이 낮아진다. 투표를 안 할수록 그들의 정치적 의사와 권익은 무시된다.(<표> - 소득의 %는 밑에서부터 / 이 조사는 실제 투표결과와는 다를 수 있음)
예컨대, 96년 이후 8년 동안 최저임금은 시간당 5달러 15센트로 묶여 있는 반면, 상하 의원들은 지난 5년 간 자신들의 세비를 5천 달러씩 네 번이나 올렸다. 물가인상률을 적용해서 세비를 조정한 것일 뿐이라고 말하지만 왜 최저임금을 받는 노동자들에게도 인상되는 물가가 고통이 될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는 것일까.
깜박 잊어버린 것은 아니다. 민주당의 일각에서 인상안을 제출하지만 공화당이 지배하고 있는 의회가 통과시켜주지 않는다. 그들에게도 논리가 있다. 중도적인 노선을 걷는 <워싱턴 포스트>의 사설에까지 확산된 그 논리란 최저임금을 올리면 인건비 부담이 커져서 기업들이 일자리를 줄이고 결국은 노동계층에게 구직난으로 연결된다는 것이다.
삐딱하게 말해서, 주는 대로 받고 일해야지 괜히 더 달라고 앙앙대다가 밥그릇마저 걷어차이는 수가 있다는 엄포다. 마치 노동자들을 생각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기업의 논리다. 기업에게 가장 돈 벌기 편한 환경을 만들어줘야 노동도 살고 미국도 잘 살게 된다는 논리다. ‘기업하기 좋은 나라, 우리 나라 좋은 나라.’어디서 많이 들어본 슬로건인데 어쨌든 그게 공화당의 논리이고 보수의 논리다.
그게 논리의 대결에 그치지 않고 미국에서는 금권정치로 변질되곤 한다. 왜냐면 기업은 그 논리를 관철시키기 위해 선거 과정을 돈으로 사기 때문이다. 하지만 '눈물의 길' 편에서 썼듯이 미국은 다 법대로 한다. 그러니까 법이 문제다.
금권정치의 법적 근거
미국에서 최근 30년간 일어난 변화들의 한 가운데 가장 중요한 사건을 들라고 한다면 과문하지만 필자는 서슴지 않고 1976년 '버클리 대 발레오(Buckley v. Valeo)' 건에 대한 대법원의 판례를 꼽는다. 미국 속담 중 '돈이 말한다(Money Talks)'란 말이 있는데 대법원은 이 '속담'이 합헌이라는 판결을 내렸다.
만약 100원 내는 사람에게 찬성표를 한 표 주고 200원 내는 사람에게는 두 표, 300원 내는 사람에게는 세 표를 준다고 가정해보자. 그걸 민주주의라고 부를 수 있을까.
그렇다는 게 이 대법원의 판례다. 공직 입후보자들의 선거비용 지출을 제한하는 것은 헌법 수정안 제 1조 표현의 자유에 위배된다는 내용이다. 미국에서는 텔레비전 광고를 통해 선거운동을 많이 하기 때문에 전파를 사는데 천문학적인 돈이 든다. 그걸 사서 할말을 하겠다는데 그걸 못하게 하면 표현의 자유에 위배된다는 뜻이다.
이 버클리는 뉴욕주의 연방상원의원이었던 제임스 버클리다. 그는 자신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의회가 선거자금 규제법안을 통과시키자 상원 사무국에서 묵묵히 일하는 의회 직원 프랜시스 발레오에게 시비를 걸어 소송을 걸었다(사실은 소송을 걸기 위해서는 기술적으로 피고가 있어야 하기 때문에 의회 직원의 이름을 소장에 적은 것뿐이다).
텔레비전 광고는 시청자들의 무의식에까지 영향을 미쳐 효과가 크다. 정치 광고가 상업 광고와 다른 점은 상업 광고는 돈을 벌기 위한 것인데 정치 광고는 표를 사기 위한 것이다. 많이 광고할수록 더 많은 표를 살 수 있으니까 300원 내는 사람이 세 표를 가져가는 것을 허용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그렇게 무제한 정치광고를 허용하는 나라는 세상에 많지 않다.
반면 미 대법원은 유권자들의 기부액은 제한했다. 돈 많은 사람들이 후보자들을 매수하지 않도록 한 것이다. 지금은 한 사람 당 기부액의 상한선이 2천 달러다. 그런데 일년에 2천 달러는 고사하고 200달러라도 정치자금을 기부하는 사람은 미국 인구 2억8800만 명 중 65만1739명, 0.2%밖에 안 된다. 어차피 상한선이 있든 없든, 기부는 돈 있는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얘기다.
그러나 이것도 당시로서는 혁신적으로 비춰졌다. 왜냐면 선거자금 규제에 대한 논의를 촉발시킨 공화당의 리차드 닉슨 대통령의 선거 캠프는 72년 선거에서 140명에게 한 사람당 5만 달러씩 받았다. 어떤 보험회사 간부는 무려 200만 달러를 냈다. 왜 이렇게들 내는지에 대해서는 조금 뒤에 설명한다.
그 당시 선거자금을 규제하는 법안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이것을 강제하고 집행하는 기관을 두지 않았기 때문에 상상을 초월하는 자금을 모금하고 썼다. 거기에다 워터게이트 사건까지 터지니까 미 정치권도 더 이상 개혁을 하지 않고 버틸 수 없었다. 그래서 76년 선거를 앞두고 의회가 부랴부랴 선거자금 모금과 지출을 규제하는 동시에 이를 집행하고 감시할 연방선거위원회를 설치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는데 대법원이 급브레이크를 걸었다.
대법원이 모금은 묶고 지출은 풀어놓은 결과, 씀씀이가 헤픈 사람들이 한 사람이 아니라 수많은 사람에게 손 벌리고 다녀 천지에 빚을 깔아놓은 형국이 돼버렸다. 닉슨 시절 같으면 딱 몇 백 명한테만 부탁하면 되는데 지금은 수천, 수만 명에게 손을 벌려야 하니까 오히려 모금에 더 매달리게 되고 그럴수록 돈을 낼 수 없는 사람들은 안중에서 사라진다.
부시 대통령이 2000년 당내 경선을 손쉽게 통과한 것은 그가 선거운동도 시작하기 전에 1억 달러에 가까운 선거자금을 모금했다는 소식이 전해졌기 때문이다. 텍사스 주 주지사였던 부시 대통령은 아버지 조지 부시 전 대통령의 인맥에다 자신의 것을 더해 초반에 압도적인 자금을 확보함으로써 다른 후보들의 도전의지를 꺾었다.
그 때 부시 대통령은 파이어니어(Pioneer)라고 불리던 246명의 자금 모집책에 의존했다. <워싱턴 포스트>에 따르면 당선 후 논공행상할 때 이들 중 40%에 해당되는 104명이 정치적 임명직에 자리를 받았다. 파이어니어 중 가장 높은 자리를 받은 사람이 9.11 이후 신설된 국토안보부의 톰 리지(Tom Ridge) 장관이고 (정경유착으로) 가장 유명해진 사람은 엔론의 케네스 레이 전 회장이다.
대놓고 하는 엽관제
가장 만만하면서도 가장 인기 있는 자리는 대사직이다. 모집책 중 23명이 대사로 나갔다. 이걸 한국 역사에서는 엽관제라고 가르친다. 닉슨 시절에도 기어코 사람들이 돈을 내려고 했던 것은 바로 정치적 영향력과 자리를 살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음은 비정파적 시민단체 'Center for Responsive Politics'가 수집한 자료에 따른 사례들이다. 58만 달러의 거금을 쾌척한 쇼핑몰 개발업자인 존 프라이스(John Price)는 미국처럼 쇼핑 몰이 많지는 않을 것 같은 인도양의 섬나라 모리셔스의 대사로 나갔다. 14만 달러를 낸 켄터키 더비 경마장의 회장인 윌리엄 패리시(William Farish)는 영국 대사로 갔다. 돈 액수에 비해서는 큰 나라로 갔는데 아버지 조지 부시 전 대통령과의 인연이 크게 작용했는지 아니면 1호 개라고 불리는 밀리(Millie)를 백악관에 선물한 게 더 크게 먹혔는지는 알 수 없다. 그는 부시 전 대통령의 자금을 관리했었다.
러셀 프리먼(Russel Freeman)은 단돈 3500 달러만 내고 벨리즈 대사로 나가서 궁금했는데 알고보니 노스 다코다 주의 모금책이었다. 사우스 캐롤라이나주의 모금책 로버트 로얄(Robert Royall)은 탄자니아 대사로 나갔다.
톱 시퍼(Tom Schieffer)는 부시 대통령이 공동 구단주였던 텍사스 레인저스 프로 야구팀의 구단 사장을 지낸 인연으로 2천 달러만 내고 오스트레일리아로 갔다. 크레이그 스테이플톤(Craig Stapleton)은 6만1천 달러를 냈지만 무엇보다 부시 대통령과 친구이고 인척관계다. 체코 대사로 나갔다.
정치자금 기부자뿐 아니라 기부자의 배우자인 수 코브(Sue Cobb, 자메이카), 부시 대통령의 고문변호사인 로버트 조단(Robert Jordan, 사우디 아라비아), 부동산 개발업자 조지 아지로스(George Argyros, 스페인)도 대사가 됐다.
2004년 재선 운동에 더 많은 모집책이 몰려든 것도 무리가 아니다. 이번에는 파이어니어 위에 레인저스(Rangers)라는 자리를 신설해, 20만 달러 이상을 모금하면 레인저의 자격을 부여했다. 모두 2000년의 두 배인 511명이 모집책으로 임명돼 발벗고 나서니 선거자금이 지난 8월말까지 3억3834만 달러(4천억원 상당)나 걷혔다.
이에 질세라 존 케리 민주당 후보도 무려 3억1085만 달러나 걷었다. 사상 유례가 없는, 그리고 다 쓰지도 못할 돈이 들어왔다. 천문학적인 선거자금 지출에 대한 반대여론을 의식, 두 후보는 9월 첫째 주부터 시작되는 공식 선거기간에는 연방정부 지원 자금만 쓰겠다고 해 각각 또 7500만 달러를 받았다. 어차피 돈 선거의 폐해는 이미 다 발생한 상태에서 국민의 혈세만 추가로 나가는 셈이다. 두 후보는 미처 선거에 쓰지 못한 돈을 각각 1억 달러 이상 현금으로 보유하고 있다. 이렇게 남는 장사가 있을 수 없다.
호텔 아메리카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잡지인 <하퍼스(Harper’s)>의 편집장인 루이스 래펌(Lewis Lapham)은 저서 <호텔 아메리카(Hotel America)>에서 이런 미국을 나라가 아니라 호텔로 비유했다. 호텔에서는 돈을 많이 낼수록 대우가 달라진다. 그리고 국민은 나라의 주인이 아니라 잠시 머물다 가는 투숙객이다. 호텔은 이윤 창출이 목표다. 투숙객의 복지가 아니다. 투숙객은 호텔의 경영에 대해 이래라 저래라 간섭하지 않는다.
필자는 이 모든 현상의 근저에는 1976년 대법원의 판결이 있다고 믿는다. 그 무렵 이후 사회가 급격히 보수화된 것도, 기업의 논리가 확산된 것도, 진보와 유사한 개념인 리버럴(liberal)이 부정적인 이미지로 고착된 것도 모두 돈이 말하기 때문이다 (Money Talks).
보수가 기업과 결합해 확성기로 자신의 메시지를 전파할 동안 진보진영은 두 손을 모아서 입에 대고 소리를 질러야 했으나 들리지 않았다. 그러니 힘을 결집할 수도 없고 선거를 치를 때마다 공화당을 앞세운 기업과 보수세력이 서서히 세를 늘려 60여 년만인 1994년에 뉴트 깅그리치(Newt Gingrich)를 앞세운 공화당이 드디어 상하 양원을 장악하는 데 성공했다. 지금은 백악관, 상하 양원, 대법원 4대 권력기관이 모두 공화당의 수중에 있다.
그래서 콜라와 햄버거를 마구 팔아 국민의 체형이 집단적으로 왜곡되고, 다국적 대기업이 소농과 가족농을 농토에서 몰아내고, 노조가 무력화되고, 임금이 깎이고, 저임금 시간제 노동자들이 대거 양산되고, 중산층이 줄어들고, 카지노가 늘어나도 정치는 침묵하거나 방조했다. 자본의 논리를 견제할 인간 본위의 논리는 실종됐다.
“그래도 거리로 나가 사람들을 만나고 설득하고 조직하는 수밖에 없다.”
‘노력해도 세상은 갈수록 불평등해지고 있지 않느냐’는 물음에 에이콘의 둘리는 전혀 머뭇거리지 않고 그렇게 말했다. 둘리는 스스로 도전하고 스스로를 변화시키고 싶어 이 일을 선택했다고 말했다. 그 동안 사람들과 소통하면서 많은 것을 배웠고 자신이 하는 일이 사회적 정의를 보다 구체적이고 진정한 의미에서 실현하는 데 기여하고 있다고 믿는다고 말했다.
“그렇게 믿고 행동하는 게 세상을 변화시킬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올해 선거는 둘리 같은 이들의 우직한 신념이 신념에 그치지 않고 얼마나 구체적인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는지 볼 수 있는 중요한 지표다. 하지만 돈으로 표를 살 수 있는 선거 문화와 그것을 뒷받침하고 있는 법적 구조를 개선하기 전에는 큰 변화를 기대하긴 어렵다. 하지만 그 변화도 역설적으로 말해 선거를 통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니 얼마나 갈길이 먼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