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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하일기~> 표지
<열하일기~> 표지 ⓒ 그린비
교과서에서 몇 토막 배웠던 <호질>과 <양반전> 등의 저자 박지원. 그의 이름은 한자투성이의 글을 싫어하는 내겐 여지없이 고리타분함의 대상이 되고 말았다. 박지원을 택하느니 차라리 몽테뉴나 루소를 읽겠다는 말까지 내뱉은 나였으니 말이다.

그런데 우연히 매스컴으로부터 고미숙의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이하 열하일기>를 소개받은 나는 기묘한 텍스트 속에 담겨진 박지원의 풍모에 완전히 매료당하고 말았다. 물론 처음엔 '우리 선조들 가운데 이런 사람도 있었구나!' 하는 호기심으로 책의 시위가 당겨졌다.

어느 날 문득 인간 박지원에 놀라다

첫 번째 감동은 박지원의 뜨거운 우정에서 비롯된다. 홍대용을 시작으로 정철조, 박제가, 이덕무, 유득공, 백동수 등에 이르기까지 그의 벗들과 나눈 우정은 우리네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게 무엇인지 다시금 생각하게 한다. 박지원은 그들 친구와 함께 한 시간이야말로 생의 여정 중 몇 안 되는 빛 가운데 가장 찬란한 빛임을 확신하는 듯하다.

또 하나의 감동 진원지는 그의 자족적인 인생관. 일절 남의 시선에 두려움을 갖지 않아 보이는 박지원의 인생관은 참으로 경이롭다. 특히 권위와 명목의 조선시대 상황 속에서 철저히 권력의 바깥을 지향한 그의 삶 앞에서는 전율을 느끼게 된다.

이제 연암의 글쓰기를 엿보기로 하자. 44세라는 나이는 육십을 한 평생으로 삼던 200년 전에는 장년층에서 노년층으로 넘어가는 나이. 하지만 연암은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것를 자신의 글쓰기를 통해 여실히 보여준다.

넘쳐나는 호기심으로 이국적 풍경의 경계를 넘나들며, 말과 사물의 간극을 매끈하게 메워나가는 자유로운 글쓰기. 실제로 박지원은 당시 조선시대 양반들의 보편적 글쓰기를 버리고 '이단적인' 글을 통해 당시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다.

그의 글에는 비판의 통렬함이 웃음 속에 배어 있다. 문제 앞에 멈칫함은 있어도 당혹감이나 적대감은 절대 끼어들지 않는다. 다시 말해 그의 글은 유연해 단도직입적이지 않다. 한번 걸러지고 다듬어져 상상하게 만드는 문학적 글쓰기 때문이리라. 각 구절에서 미소가 번져난다.

작가 고미숙을 통해 느끼는 연암

양반 지배층에서 '일탈과 전복'을 즐겼던 박지원의 생애를 어찌 책 한 권으로 알겠는가만은 이 책의 저자 고미숙은 입체적이고 다층적으로 연암을 알려 준다. 진솔한 문체로 '한 유쾌한 인간' 박지원을 소소한 에피소드를 통해 소개하고 있어 읽는 내내 참으로 유쾌했다.

연암의 전달자 고미숙 역시 고문을 연구하는 데에 학자연하지 않는다. 그녀의 글쓰기도 연암에게 영향을 받은 것은 아닐까 싶을 정도로 발랄하다. 그래서 고전을 꺼리는 내게도 박지원을 읽는 행복을 선사하고 있는 것일 테다.

연암이야말로 머묾과 떠남에 자유로왔던 유목민이었으며, 사물의 '사이'에서 사유할 줄 알았던 경계인이었다고 본다. 『열하일기』는 중심이 없고 시작도 끝도 없는 '리좀'이며, 모든 장이 저마다 독립적인 세계를 가진 천의 고원이다. 또 '탈주'와 '재코드화', '재배치'의 대가인 연암은 사물의 어느 한 국면에 머물지 않는 강한 호기심과 풍부한 유머, 그리고 통렬한 패러독스로 『열하일기』를 채우고 있다.

그녀와 연암의 공통점은 바로 이런 것, 사물을 고정된 틀에 가두지 않는 태도이다. 이것이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연암의 사상,'북학파'로 대표되는 실학사상의 근저가 이 책 후반에서 심도 있게 다뤄지고 있는 이유인지도 모르겠다.

이놈, 소위 사대부란 도대체 어떤 놈들이야. 오랑캐의 땅에 태어나서 제멋대로 사대부라고 뽐내니 어찌 앙큼하지 않느냐. 바지나 저고리를 온통 희게만 하니 이는 실로 상인(喪人)의 차림이요. 머리털을 한데 묶어서 송곳 같이 짜는 것은 곧 남만의 방망이 상투에 불과하니, 무어가 예법이니 아니니 하고 뽐낼 게 있으랴(중략)

이제 너희들은 대명(大命)을 위해서 원수를 갚고자 하면서 오히려 그까짓 상투 하나를 아끼며, 또 앞으로 장차 말타기, 칼치기. 창 찌르기, 활 튀기기. 돌팔매 던지기 등에 종사하여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 넓은 소매를 고치지 않고서 제딴엔 이걸 예법이라 한단 말이냐.


사대부들이 섬기는 한족을 멸망시킨 '청나라를 무너뜨리자'(북벌론)는 말만 내뱉는 당시 지식층에 일격을 가한 발언이다. 연암은 현실의 변화를 주시하고, 그 표면 뒤에 숨은 만물의 근본을 이리저리 다른 겹눈으로 인식하고 있다.

이런 사유가 바로 '이용후생'으로 전해지는 그의 경제적 논리다. 이용후생의 바탕에는 언제나 인간과 자연을 하나의 평면에서 파악하는 '생태주의'가 자리하고 있다.

'천지가 만물을 낳는 인(仁)의 관점에서 본다면 범이나 메뚜기나 누에나 벌이나 개미나 사람이 모두 함께 같이 살기 마련이지 서로 해치고 지낼 터수가 아니다.'

요즘 우리 사회는 이분법적 사고방식에 몸서리를 치고 있다. 어느 시인이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고 말한 걸로 아는데, 연암 역시 '사이'에서 접점들을 파악한다. 그렇다고 그는 상대주의에 빠진 모호한 경계론자는 아니었다. 인접한 것들과의 관계 속에서 질문을 하며 새로운 '길'을 찾아낸 그야말로 변증법적인 인물이었던 것이다.

연암의 혜안을 그리워하는 분들에게 이 책을 권한다.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 - 개정신판

고미숙 지음, 북드라망(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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