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우마루누이의 한 모텔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우리는 평소보다 이른 시간인 8시 30분경에 모텔을 나선다. 내륙 쪽으로 깊숙이 들어온 탓인지 열어놓은 차창으로 들어오는 아침 공기가 싸늘하다. 가을이래도 전혀 가을답지 않은 뉴질랜드에서 처음으로 가을을 실감한다.
운전을 하면서 곁눈질해 본 차창 풍경이 눈부시다. 밤새 내린 서리가 아침 햇살에 녹으면서 물기 머금은 잔디밭과 수풀들이 하얗게 반짝거린다. 늦가을 고국의 산하를 떠올리게 만드는 그 풍경이 내 마음에 오래 맺힌다.
그 눈부신 풍경을 뒤로 하고 우리는 다시 바닷가 쪽으로 향했다. 4번 국도를 타고 남쪽으로 넉넉잡고 약 3시간 정도 달리면 만나게 되는 해안도시 왕가누이(Wanganui)가 오늘의 목적지.
그러나 우리는 그 도로의 중간쯤에 있는 작은 마을 오하쿠네(Ohakune)에서 4번 국도를 버리고 우회전을 해서 들어간다.
얼마 달리지 않아 포장도로는 끝이 나고 작은 자갈이 깔린 비포장도로가 나타난다. 좁고 먼지가 풀풀 날리며 굽이굽이 돌아가는 그 길을 우리는 덜컹거리면서 조심스럽게 나아간다.
앞으로 약 4시간 정도는 이 흙먼지와 덜컹거림과 함께 가야 하리라.
팡가누이강을 따라가며 동강을 떠올리다
포장이 되어 있어 운전하기 편하고 빠른 4번국도 대신에 우리가 이렇게 험한 비포장도로를 선택한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 그것은 바로 팡가누이강(Whanganui River)을 보기 위해서다.
지난 번 타라나키산에 대한 여행기에서 잠깐 소개한 바 있듯이, 팡가누이강은 전설의 물결이 굽이쳐 흐르는 강이다. 마오리 전설에 따르면 통가리로산에게 패배한 타라나키산이 서쪽 바닷가를 향해 달려 나가면서 땅에 깊은 골짜기를 새겨놓았고, 그 깊은 상처를 치료하기 위하여 통가리로산은 맑은 샘물을 흘려보냈다고 한다.
그것이 지금도 흐르고 있는 팡가누이강이 되었다고 전설은 말하고 있다. 타라나키산이 얼마나 요동을 치며 달려 나갔는지, 강물이 흐르는 골짜기는 숱하게 꺾어지면서 이어진다. 그렇게 꺾어지면서 급류를 만들어내는 여울이 모두 239개나 된다고 한다.
그런 골짜기를 따라 길을 내었으니 피피리키(Pipiriki)에서부터 왕가누이까지 이어지는 비포장의 강변도로 역시 구불구불 이어지는 것은 당연한 일. 그러나 좌우로는 급격하게 요동치면서도 상하로는 별로 요동이 심하지 않다는 것이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다.
운전하는 나보다 더 긴장하던 아내는 이제 덜컹거리는 비포장도로에 익숙해졌는지 차창 밖으로 보이는 절경에 감탄사를 연발한다. 아무도 없는 그 고적한 길을 달리며 우리는 중간 중간에 차를 멈춘다.
처음 와 보는 곳이고 처음 보는 풍경인데도 어딘지 모르게 익숙한 느낌이 든다. 어디서 내가 이런 모습을 보았던가? 오래 생각해 볼 것도 없이 의문은 금세 풀린다. 강원도 영월의 동강. 팡가누이강은 몇 년 전, 하회마을을 다녀오면서 들렀던 영월의 동강과 너무나 닮은 모습이다.
동강의 강변을 따라 비포장도로를 달려가 만났던 그 아름다운 어라연 계곡이 지금 보고 있는 이 팡가누이강의 계곡 모습과 겹쳐지면서 나는 잠시 그리움에 젖는다. 그리움은 해외에 나와서 살더라도 잊지 말라는 듯이 이역만리인 이 땅에 고국의 모습을 심어놓았다.
뉴질랜드에서 예루살렘을 만나다
사람이 전혀 살 곳 같지 않은 이 외진 산골에도 마을들이 드문드문 있다. 피피리키를 지나 우리가 처음 만난 마을은 히루하라마(Hiruharama). 그런데 그 마을의 표지판에는 괄호 속에 예루살렘이라는 지명이 함께 써 있다.
그러나 여행 안내책자에는 이와는 반대로 히루하라마라는 마오리 지명이 괄호 속에 들어가 있고, 지도에는 아예 예루살렘으로만 표기되어 있다. 이것은 예루살렘이라는 지명이 더 일반적으로 쓰인다는 의미일 터이다.
빔 벤더스의 영화 <파리, 텍사스>를 보고 미국의 텍사스 주에 파리라는 지명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던 것처럼, 나는 뉴질랜드에도 예루살렘이 있다는 사실이 몹시 흥미로웠다. 그 지명의 유래를 알려주듯이 마을에는 천주교 교회와 수도원이 있다.
수녀 2명이 관리하고 있다는 그 교회와 수도원은 정갈하고 단아한 모습으로 우리를 맞이한다. 전설을 품고 있는 강의 물줄기와 그 강기슭에 울창하게 우거진 숲에 깃들어 오래 전부터 이곳에서 살아온 마오리들이 이 교회의 신자들이라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이 교회의 내부는 그동안 우리가 보아 왔던 어둡고 무거운, 경건하다 못해 억눌린 느낌마저 갖게 하는 서양식 천주교 성당의 모습과는 다르다. 벽면의 일부와 제단이 마오리 전통 문양으로 장식되어 있을 뿐, 환한 흰 색의 벽과 천정은 장식이 거의 없이 소박하고 간결하다.
가벼운 마음으로 둘러보고 나온 우리를 교회 옆의 수풀 사이에 세워져 있는 인자한 모습의 수녀상이 반긴다. 마더 메리 오베르(Mother Mary Aubert). 이 교회의 창건자인 그녀는 1880년 대에 이 외진 곳을 찾아와 약 20년 동안 선교 활동을 펼친 프랑스의 수녀이다.
그녀는 예루살렘에 머무르는 동안 마오리들에 대한 선교 활동을 펼치는 한편 프랑스에서 공부했던 약학과, 식물학과, 간호학 지식을 활용하여 병든 마오리들을 많이 치료해 주었다. 그래서 많은 마오리인들이 그녀를 '성녀'라고 부르며 따랐다고 한다.
그런데 마오리인들과 함께 살기 위하여 예루살렘을 찾아온 이는 메리 오베르 수녀가 유일한 사람은 아니었다. 뉴질랜드의 가장 위대한 시인 중의 한 사람으로 손꼽히는 제임스 백스터(James K. Baxter)는 마오리인과 유럽인이 함께 사는 공동체를 꿈꾸며 생애의 말년을 이곳에 정착해 살았다.
기도 중에 문득 얻은 영감에 의하여 1968년에 예루살렘으로 오게 된 그는 돈과 책 없이, 오직 신에 대한 기도와 땅을 일구는 노동에 의지하여 살아가는 것을 목표로 하는 공동체를 설립하고, 그를 따라 온 추종자들과 함께 이곳 주민들인 마오리인들과 어울려 살았다.
그러나 3년이 채 못 되어 공동체는 기강이 흔들리면서 와해되기 시작했고, 1972년 그의 죽음과 함께 마침내 무너지고 말았다. 그는 죽어서도 꿈을 이루기를 소원했는지 예루살렘의 산자락에 묻혔다.
한 시인의 꿈은 이처럼 덧없이 스러지고 말았지만 한 수녀의 꿈은 100년을 넘기면서까지 살아남은 것을 보면 정녕 종교는 예술보다 강한 것인가. 교회 뒤쪽으로 제법 올라간 산기슭에 있다는 제임스 백스터의 무덤에 대한 경배는 그 쪽을 향하여 눈길 한 번 주는 것으로 대신하고 차에 오른다.
끊어진 도로에서 마음을 졸이다
예루살렘을 벗어난 차는 1853년에 밀가루를 빻기 위하여 지은 카와나 물레방앗간에서 잠시 멈추었을 뿐 내처 달린다. 점심을 바닷가 도시 왕가누이에서 먹으려면 서둘러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뿔싸, 이게 뭔가! 도로 폐쇄 표지판이 차를 막아선다.
오는 도중에도 중간 중간 산사태 난 곳이 있어 가슴이 조마조마했는데, 우려하던 사태가 기어코 현실로 나타난 것이다. 우회로가 없으니 2시간이 넘게 달려온 비포장도로를 다시 되돌아 달려가 4번 국도를 타는 방법 말고는 다른 수가 없다.
그 생각을 하니 머릿속이 캄캄해진다. 잠시 후 우리 뒤에 차 한 대가 멈춘다. 예루살렘의 교회에서 보았던 젊은 여자들이다. 차에서 내리는 그들의 얼굴이 우리처럼 일그러진다. 그런데 내려서 보니 산사태로 무너진 저쪽 도로 위를 작은 불도저가 분주하게 오가면서 작업을 하고 있다.
저들이 오늘 중으로 도로를 이을 수 있는 것일까. 멀리서 그 모습을 바라보며 우리는 똑같은 곤경에 처하게 되었다는 연대감으로 서로 인사를 나눈다. 체코에서 왔다는 그들은 한숨을 내쉰다.
그런데 공사를 하고 있는 저쪽에서 아버지를 따라 나온 모양인지, 한 어린 소년이 우리를 향해 달려온다. 숨차게 달려온 그는 반가운 소식을 우리에게 전한다. 15분이면 도로가 임시 복구될 것이니 돌아가지 말고 기다릴 것! 우리의 얼굴이 환하게 펴진다.
그 짧은 시간마저도 그냥 헛되이 버리기가 아까운지 체코에서 온 여자들은 차를 길가에 세워 놓고 카메라를 들고 나선다. 우리는 차의 창문을 올리고 만약의 경우에 대비해 준비해 온 뜨거운 물을 부어 컵라면을 먹는다. 그 맛이 어찌나 좋던지!
마침내 저쪽에서 이제 됐다는 수신호를 보내오고 우리는 임시방편으로 복구한 길을 먼지 가득 풍기면서 지나간다. 길을 만들어 준 불도저 기사에게 손을 흔들어 고마움을 전하고 우리는 다시 굽이굽이 산길을 달린다.
제법 높은 고개를 하나 넘고서야 길은 평온해진다. 얼마 달리지 않아 포장도로가 나타나자, "야호! 이제 포장도로다"하고 아내와 딸이 먼저 환호성을 지른다. 나는 환호성을 지르는 대신 모험 없는 삶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해본다.
모험이 없다면 삶의 기쁨도 없을 터이다. 비록 4시간에 불과하지만 험한 비포장도로를 달려왔기에 우리는 이제 편안한 길에 들어섰다는 안도감을 맛보게 된 것이 아닐까. 그리고 험하긴 해도 그 비포장도로가 산사태로 중간에 끊어지지 않고 계속 이어져 있었더라면, 우리가 그 길의 끝에서 이렇게까지 큰 기쁨을 느낄 수 있었을까.
깊은 골짜기를 굽이굽이 요동치며 달려온 팡가누이 강물도 마침내 닿는 바닷가에서는 우리처럼 이렇게 기쁠 것이다. 왕가누이 시로 진입하는 다리를 건너면서 나는 그 다리 아래에서 들려오는 팡가누이 강물의 노래를 듣는다. 기쁨에 넘쳐 바다로 달려 나가고 있는 강물은 나지막하지만 매우 분명한 노래 소리를 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