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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고 마시고 사랑하고 미워하며 험난한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설움과 분노, 욕정과 애증 같은 것으로 마음이 뒤흔들리고 번거로울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그때마다 장자나 도연명, 톨스토이, 간디의 글귀들을 읽는다. 그러면 어느새 푸르고 아스라한 동양의 숲과 무위(無爲)와 허정(虛靜)의 세계가 눈앞에 펼쳐진다. 돈, 명예, 지위, 권세 같은 것은 언젠가 싶게 눈 녹듯 사라지고, 일정한 거리에서 세상을 직시할 수 있는 힘과 여유가 저절로 솟아난다.

이십여년 간 베테랑 교사(?) 소리를 들어가며 수능 문제나 끄집어내는 점수 따는 족집게 노릇을 하자니 너무 지쳐 있었다. 그때 우연히 '내 인생을 바꿀 한 권의 책'을 만났다. 책을 다 읽는 순간 온몸에서 열이 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내 인생의 길을 바꿔야 되겠다고 새롭게 결심했다. 안정된 직업을 버리고 인생 행로를 비틀다니, 평소엔 생각도 못했던 일이었다. 며칠 간 밤잠을 설치며 좋은 답을 찾으려 했으나 정답은 딱 하나, 나를 부르는 숲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출가(出家)하려는 소년처럼 가슴이 두근거렸다.

숨이 찼던 세월, 버리기엔 너무 아깝고 서운했으나 버려야 했다. 장자는 '인간의 최고 지식은 한계를 깨닫고 거기에서 그쳐야만 지극한 것이다'고 했다. 명퇴를 신청했다. 아니, 멀쩡하게 잘 있다 웬 미친 짓이냐며 모두 말렸다. 더구나 교사의 꽃이라 할 수 있는 승진이 코앞에 있었다. 사직서를 세 번이나 돌려 받았다. 그러나 돌아가야 했다.

▲ <조화로운 삶>
<조화로운 삶> 헬렌 니어링. 스콧 니어링.
<아름다운 삶, 사랑 그리고 마무리> 헬렌 니어링.

이 책을 읽고 몸살을 앓기 시작했다. 책 속에서 보여준 그들의 삶이 하도 진솔하고 좋아 그 동안 내가 살아온 인생이 시덥지 않게 보이기 시작했다.

헬렌 니어링과 스콧 니어링은, 미국이 1차세계대전을 치르고 대공황의 늪으로 빠져 들며 안전을 위협 받던 1930년대, 버몬트라는 시골로 들어간다. 더 이상 서구 도시 문명 속에서는 살 수 없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서구 문명이 그 누구에게도 안전한 삶을 보장해 주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그때부터 그들은 땅에 뿌리 박은 삶, 조화로운 삶을 시작한다.

둘은 조화로운 삶을 살기 위한 원칙을 세운다.

* 먹고 사는 데 필요한 것의 절반쯤은 자급자족한다. 그러므로써 이윤만 추구하는 경제에서 할 수 있는 한 벗어난다.
* 돈을 모으지 않는다. 따라서 그해 먹고 살기에 충분한 양식을 모으고 나면 돈 벌 일을 하지 않는다.
* 되도록 다른 사람과 힘을 합쳐 일을 해낸다.
* 짐승을 기르지 않는다.
* 집을 멋있게 고치느라 시간을 쓰지 않는다.


▲ <아름다운 삶, 사랑 그리고 마무리>
이 책은 이 원칙대로 산 두 사람의 삶을 낱낱이 기록하고 있다. 두 사람이 집을 짓고, 밭을 일구어 채소를 기르고, 이웃과 함께 한 생생한 이야기다. 그리고 '조화로운 삶', 참으로 이 세상에 보탬이 되는 삶이 어떤 것인지 온몸으로 보여준 자연 사랑이 그만 나를 시골길로 들어서게 만들었다.

새파란 호수가 그림처럼 드리우고, 수수하고 꾸밈없는, 있는 그대로의 솔바우 마을. 그 속에서 땅 파고 땀 흘려 아주 작은 행복을 일궈 내는 사람들에 반해서 새로운 둥지를 튼 지도 여러 해가 되어 간다. 교직 이십여년을 서둘러 뒤로 하고, 오솔길을 밟으며 곧장 이 작은 마을로 들어와 귀농의 길을 시작했다.

아파트 생활에 길들여진 인생이 오지인 시골에 적응할까 걱정도 많았지만, 염치, 체면, 권위 같은 나부랭이들이 밥 먹여 주나 싶어 훌훌 벗어 팽개쳤다. 그리고는 동네 사람들 꽁무니를 따라다니며 품앗이로 손발 맞추고, 새참 먹어 흐르는 땀방울을 씻다 보니 어느새 촌부가 다 되었다.

아파트와 승용차를 처분해 이천여평의 밭을 매입하고, 농촌형 세레스 덤프차로 차종을 바꾸었다. 몇 년째 사람이 살지 않아 쓰러져가는 오막살이를 수리하여 붉은 흙을 맨발로 이겨 창문을 남쪽으로 내고, 재래식 황토 온돌방도 만들었다. 송암리라는 동네 이름이 말해주듯 이곳은 돌과 나무가 많은 척박한 땅이다. 밭뙈기도 예외는 아니어서 돌이 하도 많아 돌아 버릴 지경이었지만, 틈나는 대로 돌밭을 일궈 주 작물인 감자와 배추 농사를 시작했다.

▲ 귀농하여 조화로운 삶을 경험하며 쓴 에세이 <북한강 이야기>
이젠 품앗이는 기본이고 동네 일에 발벗고 뛰어 다니다 보니, 누구네 집 숟가락이 몇 개인지 알 정도로 이웃들과 가까워졌다. 농사를 열심히 짓는다고 해서 '농학 박사' 소리도 듣고, 고무신을 늘 끌고 다니다 보니 '몽달 귀신'이란 별명도 갖게 되었다. 나도 헬렌 니어링과 스콧 니어링처럼 내 조그만 조화로운 삶이 담긴 책도 올해 펴냈다. <북한강 이야기>가 그것이다.

누가 나의 자존심만 건드리지 않는다면, 여기 솔바우 농장에서 흙을 일구고, 청설모, 너구리, 다람쥐, 토끼들과 더불어 땅을 파면서 매일처럼 맑은 물에 자신을 헹궈 내며 나의 길을 가다가 한줌 흙이 돼 새처럼 날아가리라.

화악산 뒷자락 저편, 해 웅덩이로 사위어 가는 저녁 노을이 저리 아름다울 수가 없다. 오늘 저녁엔 설렁대는 가을 바람과 떨어지는 낙엽 소리를 들으며 내 인생을 바꿔준 책 <조화로운 삶>과 <아름다운 삶, 사랑 그리고 마무리>를 다시 읽으며 새로운 삶을 추슬러 볼까 한다.

조화로운 삶

헬렌 니어링 외 지음, 류시화 옮김, 보리(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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