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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새벽이 내 마을 등성이로부터 밀려들 때 쯤 우리는 싹을 틔운 볍씨를 판에 담고 얇게 흙을 덮어준다. 골고루 볍씨가 땅에 닿도록 하면서 전날 못자리판을 평평하게 다듬질을 못해놓은 것이 영 맘에 걸린다. 세집 분 모판을 차에 싣고 논으로 향하는 길은 매우 조심스럽다. 갓 틔운 싹이 스트레스라도 받을까 말이다.

5명이 한조가 되어 척척 모판을 받고 깔고 일은 순식간이다. 활대를 꼽고 비닐로 보온을 하면 일단은 그날 일 끝이다. 새벽이 채 걷히기도 전에 막걸리 한 사발에 온몸이 나른하다.

못자리가 끝나면 물대기가 영 힘이 든다. 남들 논처럼 수로에서 곧바로 물이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남의 논을 한번 거쳐야 들어오기 때문에 여간 신경 쓰이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들어온 물이 제대로 모판에 영향을 주는 가도 신경이 쓰인다. 아침, 저녁으로 돌보아 주는 것으로는 너무 모자라다. 움막이라도 지어놓고 그곳에 살고 싶은 심정이다.

2, 3일 지나자 비닐하우스 사이로 파릇파릇한 싹이 보인다. 예쁘다. 아직까지는 곱게 자라야 할 때이다. 모가 너무 여리기 때문이다. 여물기도 전에 세상의 바람을 맞으면 어린 모는 ‘이곳은 내가 살 곳이 못되는구나’하고 생을 포기하기에 이르기 때문이다. 좀 더 지켜보아야 한다. 어느새 모가 제법 컸다. 이제부터는 도랑에 물이 마르면 안 된다. 물이 없으면 모는 계속 자라기만 한다. 힘없이 말이다.

그러면 모내기할 때 너무 커서 힘이 많이 든다. 힘도 없어 픽픽 쓰러지기 일쑤다. 물을 먹으면서 계속 몸을 살찌워야 한다. 날이 뜨거우면 종종 양끝 문을 열어서 바깥바람도 느끼게 해주어야 한다. 너무 갑자기 비닐을 걷으면 아직 여린 모는 5월의 태양에 델 수 있으니 주의해야 한다. 쉽지 않은 일이다.

어느 정도 자란 모는 이제 세상의 바람과 본격적으로 싸워야 한다. 이것이 세상이라는 것을 알게 해주어야 한다. 비도 맞고, 종일 태양도 쬐고, 흐린 날도 보고 말이다. 이렇게 적응한 모는 곧 넓은 세상으로 나갈 것이다.

어린 모를 이제는 옮겨 심어 줄 때가 왔다. 바로 모내기를 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동안 갈아 엎어놓고 가끔씩 물도 먹은 논에 물을 흠뻑 고이게 만든 뒤 고르게 하는 작업을 해야 한다. 우리 집에는 장비가 없으니 돈을 주고 장비가 있는 사람에게 일을 맡겨야 한다. 고속도로쪽으로 있는 부분은 지대가 다른 곳에 비해 높다. 특별히 부탁을 해보았지만 너무 고르지 못해서 속이 상한다.

물을 빼보니 울퉁불퉁, 들쑥날쑥이다. 더 속이 상한다. 바로 논 고르기를 시작해야 한다. 그렇지만 너무 넓어 엄두가 나지를 않는다. 요령도 모르니 땀만 삐질삐질 흐른다. 힘들다.

그리고 가을이다. 이제 얼마 있지 않으면 이 가을마저도 기억에서만 존재하는 계절이 될 것이다. 지난 봄에 시작된 나의 첫 논농사는 방아를 찧는 것을 마지막으로 곧 끝날 것이다. 모를 심고 꼭 6개월만이다. 그동안에 논두렁에 풀을 몇 번이나 베었을까? 내 외로움과 슬픔과 쓸쓸함을 말없이 들어주던 새와 이름 모를 벌레와 메뚜기와 여치와 지렁이와 달팽이와 도마뱀과 잠자리와 어슬렁어슬렁 땅 위를 기어 다니는 수없이 많았던 벌레인 친구들도 이제는 거의 떠나고 메뚜기만 몇 남아 뛰놀고 있다.

수확량이 많거나 적거나 간에 수확은 좋은 일임에 틀림없는데 벼를 베기 일 주일 전부터 내 마음은 쓸쓸하기만 했다. 흙에서 태어나고 자라 이제 또다시 흙으로 돌아가기 위해, 벼의 가는 길을 위해 나는 오랜 시간 함께했던 벼를 베어야 하는 것이다. 이제 다시는 만날 수 없는 것들이다.

살아가는 많은 시간들은 언제나 꿈만 같다. 어제의 일들이 기억 속에 남은 꿈인 것 마냥. 살면서 가슴이 찢어지거나, 칼로 도려내야 하는 기억들, 사람들, 인연들 모두 꿈처럼 시절은 흘러간다. 술 취한 밤 말없이 쓰다듬으며 위로받고자 했던, 위로받고자 눈물을 뿌려도 아무 표정 없이 받아 바람으로만 이야기를 해주던 친구를 베어야 한다. 이렇게 헤어짐은 늘 앞날을 불안하게 만들어 준다. 내가 가야할 곳을 잃어버린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그 불안이 새로운 희망이 된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다시 비었다. 여름 내 꽉 차있던 들판 곳곳에 이제는 빈 바람이 가득 지키고 머물러 있을 뿐이다. 어쩌다 한번 계절을 잃어버린 잠자리와 나락 몇 알을 집어 먹으려는 까치 몇 마리, 이리저리 몸을 흔들어대며 뒤늦게 하늘을 향해 오르다 깜짝 놀라 주춤거리는 몇 잡초만 보일 뿐이다.

반짝거리던 아침 이슬에 포근히 둘러싸여 있던 들판에 뿌리만 남았다. 잃어버린 계절이 돌아오고 또다시 뿌리는 흙으로 돌아가고 말겠지만 사라지기 위해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는 건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리라. 비어 있는 들판에 서서 오늘도 바람과 함께 너를 쓰다듬는다. 나를 쓰다듬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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